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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 오면 봄 또한 멀겠는가?
    부모님 이야기 2019. 4. 3. 04:28

    아버지가 손을 못쓰시게 된 뒤에 어떻게든 손을 움직이게 하려고 한 일들이 몇 개 있다. 종지 하나에 박하사탕을 채우고, 옆에 빈 종지를 두어, 아버지가 박하 사탕을 한 종지에서 다른 종지로 옮기시게 하였다.  지력이 왕성한 아버지가 그런 단순한 동작을 하셔야하는 게 가슴아팠다. 어느 날,  손가락을 굽힐 수 없어서 펜을 잡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공처럼 둥근  플라스틱 펜꽂이를 사서 아버지가 펜을 잡게 해드렸다.

     

    "아버지, 쓰고 싶은 거 뭐든 써보세요"

     

    아버지는 잠깐 생각하시더니 아주 천천히 엄마, 오빠, 언니, 나의 이름을 한문으로 쓰셨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시더니 이렇게 쓰셨다. 

     

     

    나는 '아.....' 하고 소리내었다. 관사가 두 개가 빠지고 동사 하나가 빠졌지만, 아버지가 쓰신 구절은 분명히 영국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 (Percy Bysshe Shelley) 의 '서풍에 부치는 노래' (Ode to the West Wind) 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The trumpet of a prophecy! O, Wind,

    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예언자의 나팔 소리! 오, 바람이여,

    겨울 오면, 봄 또한 멀겠는가?)

     

    아버지는 펜을 놓으시고 나를 올려다보시며 "왜 이 구절이 생각나는 걸까?" 내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하셨다.

    그리고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내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미군 헌병의 통역관으로 죄수들의 심문을 통역했을 때....."

     

    (아버지는 서울대 재학 시 전쟁이 발발해 국군으로 참전했고 영어 통역관으로서 거제도 포로 수용서의 포로들의 출신 (남한/북한), 나이, 소속, 계급 등을 묻고 이념적 성향을 파악/분류하는 심사의 통역을 했다.) 

     

    "그때 만난 한 포로가 있어. 셸리의 '서풍'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 사람이 생각나.  그는 자기가 김일성대학 영문과 교수라고 했는데 철저한 공산주의자같았어. 그가 심문이 끝난 뒤에 미군 헌병의 눈을 쏘아보면서 "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라고 하겠지!

     

    난 정말 깜짝 놀랐어. 당시 정치학과 학생이었지만 시를 사랑해서 외우고 다니던 나는 그게 셸리의 시의 한 구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포로수용소에서 심문을 하는데 포로가 시를, 그것도 영시를 읊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지. 그때는 지금과 달리 영어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었거든. 골수 공산주의자가 자기가 경멸하는 영미 제국주의의 언어와 문학을 통해서 자신의 저항 의지를 표현하고 이념을 주장했다는 건 참 흥미로운 사건이지.

     

    더군다나 그가 도전적인 표정으로 인용한, '겨울이 오면 봄이 멀겠냐' 라는 구절이 너무도 의미심장했어.  자기가 지금 포로로 갇혀 있지만 언젠가는 해방될 것이라는 소리도 되겠고, 아니면 북한이 인민해방 전쟁에서 이길 거라는 도전적 희망의 표현일 수도 있었으니까. 

     

    그는 심문 중에 나와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서울대학교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자기가 인용한 시의 의미를 내가 알아차렸다는 것도 느꼈을 거야.  정작 미국인 심사관은 그 시를 모르니 한국인인 우리가 영시를 인용하고 의미를 주고받는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난 참 복잡한 감정을 느꼈어. 나랑 그는 다른 상황에서 만났다면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몰라. 문학을 사랑하는 그와 내가 이념에 의해 나눠져서 포로와 심문관이라는 처지로 만났다는 것이, 같은 시를 들으면서 우리는 서로 다른 '봄'을 꿈꾸고 있다는 사실에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그런 슬픈 감정을 느꼈어.

     

    나중에 내가 70 년대 중반에 셸리의 시를 번역했는데 그때 내내 그 포로 생각이 났어.  

    그는 북한으로 돌아가서 다시 교수가 되었을까?, 똑똑한 사람이니까 무슨 일이든 했겠지? 그는 과연 자기가 꿈꾸던 봄을 맞이했을까?"

     

    아버지가 천천히 오래 오래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심취해서 들으면서 서풍의 그 마지막 구절이 아버지 세대에게는 아주 큰 울림과 의미가 있는 듯하다 싶었다. 김일성 대학 영문학과 교수는 그렇다 치고, 아버지도 정치학 전공자였음에도 셸리의 시을 외우고 있었고, 나의 주례를 섰던 아버지 연배의 신학자 황성수 목사님도 그 시를 다 암송할 수 있었다. 1989 년 도, 내가 한국을 방문하고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길에 비행기에서 만난 연세가 지긋한 한 어르신도 내가 영문학을 한다고 하니 자신은 영문학이라고 하면 '겨울이 온다면 봄이 멀겠는가'라는 싯구절 하나밖에 모른다고 했었다. 함석헌 선생이 그 시를 번역하고 ("서풍에 부치는 노래") 마지막 구절이 어떤 고난에서도 그를 잡아준 강력한 구원의 메시지였다고 한 것도 유명한 사실이다. 어쩌면 일제의 압제와 참혹한 이념 분쟁과 전쟁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어낸 세대가 공유했던 처절한 저항의식, 혁명이 가지고 올 새로운 세상, '봄'에 대한 간절한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말을 멈추고 우수에 잠긴 표정으로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말씀했다.

     

    "오늘따라 최석규 생각이 많이 나는구나. 신주, 너는 내 친구 최석규를 기억하니?"

     

    기억하다마다. 최석규 씨는 아버지가 수상록에서 언급한 적이 있고, 몇 번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왜 최석규 씨를 떠올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도 김일성 대학 영문학과 교수처럼 '봄'을 꿈꾼 청년이었다. 나는 아버지 침대 근처에 내내 놓여있는 수상록을 펼쳐서 최석규 씨 부분을 아버지께 읽어드렸다.

     

    (수상록에서의 글을 요약한다)

     

    최석규 씨는 한국 동란 전 강대건씨가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3 학년 재학 중에 만난, 당시 연세대 철학과 대학원에 재학중이었던 학생이었다.  그는 학업 성적이 우수할 뿐만이 아니라 꽁트도 쓰고, 작곡도 하는 등, 다양한 취미와 재능을 가졌고, 점잖고 사려깊은 인품을 갖고 있어서 강대건은 그를 내심 존경했다.

     

    전쟁 발발 후, 강대건은 인민군이 점령하는 서울에서-- 누가 나의 편이고 누가 적인지 구별이 안되는 흉흉하고 두려운 분위기에서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기위해 몸을 사리고 있었다.  어느날 광화문에서 최석규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 강대건은 그의 사상이 어떤 것인지 몰라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길을 걸으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최석규가, "세상이 어떻게 되더라도 학문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겠다' 고 결의를 토로하는 순간, 깊이 감명받고 그를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을 했다고 한다. 

     

    그들은 당면한 문제, 즉, 어떻게 먹고사는가, 그리고 불시의 가택 수색으로 해서 젊은이를 끌고가는 '인민 위원회와 민청원의 마수에서 어떻게 벗어사는가의 문제를 협력해서 같이 풀어가기로 했다. 일단 민생고 해결책으로 빵을 만들어 팔기로 했는데, 서투른 실력으로 반죽해 기름에 튀긴 빵은 작고 딱딱해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고 저녁마다 그들은 안팔린 빵을 먹어치워야했다.

     

    하루는 갑자기 날이 흐리더니 천둥번개가 치며 비가 오기 시작해서 허둥지둥 빵이 든 바구니를 들고 뛰던 중, 둘 중 누군가가 바구니를 땅에 떨어뜨렸다. 모래가 묻어 팔 수 없게 된 빵을 먹은 뒤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면서 허탈한 마음으로 대화를 주고받던 중, 최석규는 철학도다운 초탈한 태도로 강대건에게 말했다.

     

     ‘지금은 천둥 번개 치며 비를 쏟아 내리고 있지만 저 구름 위에서는 태양이 여전히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후 얼마 안되어  보안 서원들과 민청원들의 가택 수색이 더욱 강화되었고, 최석규는 아침에 기습적으로 들이닥친 보안서원에 의해 잡혀갔다. 강대건은  일본인들이 방공호 용으로 파놓았던 토굴, 집주인이 피난가서 빈 집의 마루 밑 등에 숨어 지냈다. 

     

    서울 수복 후 강대건이 최석규의 집을 찾아갔을 때. 대문을 들어서는 강대건을 맞이한 것은 낯익은 노래 “돌아오라,소렌토로”를 부르던 최석규의 목소리였다. 최석규와 강대건은 이제까지 각자에게 있었던 모든 일을 서로에게 설명하고 서로의 행운을 축하했다. 최석규는 다른 피납 인사들과 함께 결박되어 긴 도보 행렬을 이루어 북쪽으로 끌려갔는데 원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일어난 혼란을 틈타 도주하여 서울까지 온 것이다. 최석규는 자기는 머리를 깎아 인민군으로 오인될 우려가 있으니 강대건이 대신 일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 날 헤어진 후 그들은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최석규가 우리측 헌병대에게 인민군의 혐의를 받고 또 다시 강제 연행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최석규를 구하기 위해서 강대건은 그가 인민군도 아니고 부역자도 아님을 증언하고 그의 조속한 석방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동네 거주자들과의 연서로 제출했다. 강대건은 연락장교로 군에 들어간 뒤에도 부산 일대에 산재한 포로 수용소의 포로들을 심사/통역할 때, 혹시라도 최석규가 인민군 포로가 되어 어딘가에 수감되어 있을지 모른다 생각하여 모든 포로 수용소에 문의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전쟁이 끝난 뒤 60년이 지나도 강대건은 최석규를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최석규의 빼어난 천부적 소질이 언젠가는 그를 학계나 기타 전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해 줄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최석규에 관한 소식은 영영 들려오지 않았다.  팔순이 가까운 나이에 강대건은 연세대 동문회 발행의<<2004동인록>>을 입수하여 46 년 철학과 입학생 명단에서 최석규의 이름과 연락처를 발견하여, 혹시라도 자신이 찾고 있는 인물인지 확인하고자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답장이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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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수상록을 덮으면서 아버지께 말했다.

     

    "아버지, 왜 최석규 선생님을 떠올린지 알 것같아요. 김일성 대학 영문과 교수가 '겨울 오면, 봄 또한 멀겠는가' 라고 한 것이나, 최석규 선생님이 '지금은 천둥 번개 치며 비를 쏟아 내리고 있지만 저 구름 위에서는 태양이 여전히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라고 한 것이나 다 같은 사고의 표현이었네요."

     

    "그래. 같은 저항정신, 같은 꿈. 다 같다. 단지 서로 다른 이념을 지지하고 그것을 위해 저항하고 투쟁하려고 한 게 달랐지."

    "정말 그렇네요."

     

    그날 밤 늦게까지 나는 잠을 못이뤘다.  이제까지 나에게 흑백 사진으로만 존재하던  과거가 갑자기 총천연색을 입고 새롭게 떠올라서였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 군집해 있는 포로들의 또렷하지 않은 이미지 속에서 갑자기 눈매가 또렷한 한 북한 군인이 나타났다. 짧으나 더부룩한 머리, 맑은 피부, 우중충한 포로복을 입은 그가 영시를 읊었다. 또한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고무신을 신은 청년 둘이 기름에 쩔은 빵을 팔겠다고 길가에 앉아 있는 모습도 떠올랐다.  비를 피해서 뛰다가 빵을 떨어트리는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그리고 그 빵을 줒어 털어서 먹는 모습도 상상되었다. 그런데 세 명의 청년들의 마음에 시가 흐르고 있었고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기억과 함께 그날 아침, 손이 굽은 아버지가 정성들여 쓴 싯구-- '겨울 오면 봄 또한 멀겠느냐' ---의 삐뚤삐뚤한 글자가 생각났다.

     

    아버지는 왜 그 구절을 썼을까? 

     

    그것을 쓰면서 구순의 긴 여정에서 스치듯 짧게 지나쳐간 김일성 대학 영문과 교수와 친구 최석규.  일제의 압박과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그들이 포기하지 않았던 희망의 메시지를 지금 아버지가 다시 떠올리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죽음의 '겨울'이 가까워지는 지금, 아버지에게 '봄'은 무엇일까?

     

    전쟁 후 60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고, 아버지는 불구가 되어 미국 땅에 살게 되었다. 이념을 위해 투쟁하던 동년배들은 필시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아버지처럼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겨울 오면 봄 또한 멀겠느냐' 라는 싯구를 쓰면서 그가 희구하는 '봄'은  분명히 서풍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사회적 주제--즉, 고루한 사고, 낡은 구세계가 타파되고, 자유와 평화가 꽃을 피우는 시기--로서의 '봄'을  아닐 것이다. 

     

    언젠가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담담히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에게 '봄'이란 문자 그대로 죽음의 겨울이 끝나고 도래하는, 죽음 후에 새생명이 꽃피고 움트는 시기가 아닐까? 그에게 김일성 대학 영문과 교수와 친구 최석규는 어떤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희망의 상징적 존재들이다. 왜 희망을 가져야하는지, 또한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역경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여준 롤모델들이다.

     

    힘든 투병의 시간에 아버지가 밝고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이유, 불평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주위 사람들에게 상냥할 수 있는 이유는, 영시를 읊는 북한군 포로와 비구름 너머의 해를 희구하는 철학도마냥, 아버지 역시 '겨울 오면 봄 또한 멀겠는가' 라는 희망을 가슴에 품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봄에 향한 희망은 곧 겨울의 혹한과 죽음을 끌어안는 것을 의미한다. 겨울을 거쳐야만 봄이 올 수 있으니, 어떤 면에서 겨울은 필요한 과정이다. 재생을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하다. 그러니 죽음에 조바심을 내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죽음이 삶을 잉태하고 있는데 뭐가 두려우리오!  바로 저편에서 새생명과 재생을 약속하는 봄이 손짓하는데 못 참을 게 무엇이리오.

     

    이미 삶 속에 죽음을 서서히 키워가는 아버지, 아버지는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절망하지 않듯이 나도 절망하지 않는다. 그가 언젠가 겨울을 맞이할 때 그 얼음을 뚫고 움트는 봄의 약속, 새로운 탄생을 기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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