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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들아, 똥같은 (shitty) 직업을 두려워하지 마!
    부모님 이야기 2019. 4. 2. 14:58

    따다따다,  샤악샤악,  챡챡챡챡  스윽스윽.  부엌에서 칼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살림을 시작했다.

     

    아버지 수발을 들기 시작하면서  결혼 전은 물론이고 결혼 후에도 20 년간 남편의 이해와 관용을 밥삼아, 아이들의 무지를 반찬삼아 잘도 피하고 도망다니던  밥하기, 부엌일은 끝났다.  달걀 프라이에 김치 볶아주고, 거기에 김 몇 장 잘라주면 “엄마, 그레잇 디너! 땡큐~~!” 남발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뿌듯해하던 사깃꾼 엄마는 없어졌다. 완전 대대적인 변화가 진행되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이것저것 줒어먹을 곳도 많고, 몸이 건강하니 줒어먹어도 괜찮지만 아버지는 아니었다.  모든 음식에 구역질을 하셔서 누릉지만 드시다보니 영양 부족으로 몸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좋아하던 음식들이 다 역해지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 씹을 수 있는 능력이 다 감퇴되어 버린 상황이니 어떻게든 아버지 입맛과 치아 능력에 맞고 영양이 골고루 가게끔 노력해야한다. 그러다보니 부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다행히 아버지는 참 잘 드시고, 당도 잘 유지되고 있으며 변을 잘 보신다. 아주 뿌듯하다.

     

    문제는 안하던 요리를 하자니 내 몸은 상처가 많아졌다. 한번은 왼쪽 손바닥에 큰 칼 흠집 하나, 중지에도 하나, 오른손 집게 손가락에 상처 하나 등, 요리 처음해보는 자취생이나 신혼 부부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상처들이 수두룩하니 에릭이 깜짝 놀라 물었다. 

     

    "당신 일을 많이하네. 어쩌다가 이렇게 상처를 많이 입었어? 손바닥의 상처는 어쩌다가 난거야?"

     

    살림꾼이 되어 버린 부인에게 존경과 감사가 범벅이 된 그의 말에 난감했다. 남이 보면 한상 크게 차려주겠다고 먹잇거리 찾으러 산으로 가 들짐승과 사투를 벌이면서 얻은 상처같은데 실제로는 도망가기는 커녕 아주 조신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예쁜 아보카도를 잡다가 받은 상처이다. 에릭이 "아니, 아보카도를 자르다가도 이렇게 될 수 있어?"라고 놀라 물었다. 에릭이 미소를 띈채 존경심이 가득한 톤은 저리가라 추긍조로 '손가락에는 왜 반창고를 붙였냐'고 물었다.

     

    "양파 자르다가. 양파도 미끄러워."

     

    마치 남편이 세상에 태어나 한번도 양파를 본 적이 없기라도 한 양 뻔뻔하게 둘러대면서 약간 쑥스러웠다.  그 옆의 상처는? 또 묻는다. 그건 샐러리를 자르다가....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상황이었다. 일을 열심히 하고 인정을 받기는 커녕, 내가 잘못해서 상처낸 거라는 것만 스스로 폭로하고 있으니 말이다.  . 마치 전투에서 폭파 사고 와중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참전 무공 훈장을 받은 용사가 나중에 조사에 의해  애초에 실수로 지뢰를 잘못 건드려 폭파를 일으킨 주범이라고 밝혀져 훈장을 빼앗겼을 때의 기분이 이럴까?

     

    칼의 상처만이 아니라 불에 데는 일도 잦아졌다. 스프 저을 때 뜨거운 스프가 튀겨서 아앗~ 비명 지르는 것은 애교에 속한다. 뜨거운 기름에 수분이 들어가, 아니면 수분에 기름이 부어질 때, 뜨거운 팬을 잘못 잡을 때 입은 크고 작은 화상이 팔과 손에 즐비하고, 게다가 손빨래, 설거질, 아버지 목욕 등으로 손에 물이 마를 틈이 없이 일을 하니 부분적으로 습진도 생겨 결혼반지를 낄 수 없게 되었다.

     

    핸드크림이란 것을 발라야한다던데 그걸 발라봤자 금방 다시 손을 물에 담궈야하고 한번도 바른 적이 없다. 내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아버지의 생사가 나눠지는 상황--질식, 감기, 욕창--에서 내가 잘먹고 잘쉬는 것--내 건강--은 중요했지만 내 손과 얼굴의 미용은 당연히 관심 밖이 되었다.

     

    어느날 엄마가 나의 손을 보고 가슴아파했다.

     

    "네 손이 아주 거칠구나. 손이 참 고왔었는데....."

     

    그말은 맞는 소리였다. 그런데 곱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로 내 손은 고생할 일이 없었다.  글쓰고, 낙서하고, 편지쓰고, 그림그리고, 자판 두드리고, 피아노치고, 기타 줄 튕기고---그렇게 나의 손은 사고의 세계를 넓혀주고, 즐기게 해주고, 그렇게 재밌게 살라고 머리가 지시하는대로 움직여주는 도구였다. 힘든 일 안하고 사니 손이 고왔던 게 당연하다. 

     

    결혼하고 나서도 동네에 소문날 정도로 허술한 살림 실력에 나의 손은 큰 고생을 하지 않았다. 나의 살림의 목적은 '빨리 해치우고 내가 좋아하는 거 하자' 였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집안 일들은 어서 대강 해치우고 내가 좋아하는 일, 의미있는 일, 내 정신 세계를 건강하게 해주는 일들을 해야지...여전히 나는 책을 읽고, 편지쓰고, 자판을 두드렸다. 아기 손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런데 이제는 쭈글쭈글...

    엄마는 내가 아버지와 엄마를 모시느라고 손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내 손을 만지면서 안타까워했다.

     

    "어쩌다가 네 손이 내 손같이 되었니...우리때문에 고생해서 너무 미안하구나."

     

    어이구, 무슨 소리!  내 손이 엄마같다니! 내 손이 아무리 늙어도  평생 쉴사이 혹사되어온 엄마의 손을 따라갈려면 멀었다.  엄마는 항상 바쁘게 몸을 움직이고 손을 써서 가족을 섬기고 전업주부로서 당신의 삶에 만족하고, 살림을 재밌어 하고 살아온 엄마의 거친 손.

     

    그런데 엄마의 열정적 살림은 당신의 딸들은 경제력을 갖고, 자신만만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수 있게 하겠다는 결심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있었다. 즉 엄마는 내가 엄마같이 되지 않기를 바라셨다. 내가 엄마께 죄송한 부분이다. 학위를 수집하기라도 하는 양 이스라엘, 프랑스, 미국에서 여러 학위를 따고나서 전업주부가 되어버린 나는 엄마에게 못할 일을 했다. 내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그 긴 여정 동안 나를 항상 든든히 지지해주고 기다려준 엄마께는 항상 죄송함을 느낀다.  내 마음의 빚을 영원히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어떨 땐 슬프기조차 하다.

     

    하지만 어쩌면 나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엄마이다. 엄마는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여 열정적으로 해온 주부이고 섬기는 삶에서 행복을 느끼셨으니까. 나는 엄마처럼 살림을 하면서 그런 기쁨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이제까지와는 다른 용도로 손을 쓰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고 무척 행복하다.  

     

    내가 해보지 못한 것을 하게 해주고, 내가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내 손이 감사하다. 아버지의 용변 수발은 단지 '똥을 치우는 일' 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아버지께 사랑을 표현하고, 아버지를 외로움과 두려움에서 보호해드리고, 삶의 마지막 챕터를 용감하게 써나갈 수 있게 해드릴 수 있기에 소중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그까짓 똥기저귀 가는 일로서 한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의지를 지키는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감지덕지하다. 손으로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그래서 '죽을 지경'을 '살림'으로 변환할 수 있다는 게 경이롭다.

     

    그렇듯 거칠어져가는 나의 손은 나에게 새로운 경험과 관계를 가져왔다.

     

    이제까지 '머리 대신'에 '몸'을 쓰는 직업에 종사하는 분들을 무시하거나 무례하게 대하지는 않았다고는 자부하지만 내가 그들과 진정으로 동일화하고 연대한 적은 없었다.  경비원 아저씨, 동네 행상 아줌마들, 환경미화원 어르신, 그 모두에게 나의 시선은 다정했고, 나의 마음은 따뜻해했지만, 나는 항상 그들과 거리가 있었다. 마치 상아탑 창문을 통해서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는 것과 같다고 할까?  내가 그들과 같은 삶을 살지 않으리라는 것은 내가 굳이 결심할 필요도 없는 하나의 '팩트'였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자아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나에게는 교육 받아서 사회에서 인정받고 대우받고 편안하게 사는 게 지하철 1 호선, 시청 역 다음에 종로 2 가 처럼, 당연한 귀결으니까.  

     

    그런데 요양보호사들과 같이 일을 하면서, 나의 아버지를 위해 궂은 일을 성심껏 하는 그들을 통해서 나는 '도움을 주는 손' '마음을 담아 일을 하는 손'의 아름다움에 감동받았다. 책 속에 파묻혀 읽고, 글쓰고, 수정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학회에 가서 발표하고---그런 학자의 길이 아름답다면 그에 못지않게 적은 보수에도 열심히 자기가 담당한 환자들을 위해서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하는 요양보호사들의 일도 귀하고 아름다움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나도 그런 일을 배워가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나는 변화했다. 이런 이야기 쓰면서 마치 내가 누구를 내려다보면서 '이 내가 누군데 이런 궂은 일을 하고 이런 훌륭한 생각을 하게 되었니..난 여러모로 잘났구나...' 라고 하는 것같이 들릴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든다만, 그건 내 진심의 왜곡이다. 그러므로...who cares! 이다. 나는 분명히 뭔가 배웠고 그걸 이야기하려함이니...  

     

    나의 변화를 나는 아이들 교육 방식에서 나타났다.  1 년 전,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관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던 우울한 아들이 나와 남편에게 "나는 똥같은/더러운 일 (shitty job)은 하고 싶지 않아!" 라고 투덜거렸다. 

     

    욕처럼 사용되는 저속한 단어의 사용에 내가 충격을 받아 잠시 말을 잊었는데 남편이 1 초의 망설임도 없이 반박했다.

     

    "에밀, 이 세상에 더러운 일이란 존재하지 않아. 세상에는 일만 존재할 따름이야."

     

    그 말이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었는데! 나는 감사했다. 그리고 내가 끼어들었다. 내 경험으로 나는 확신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에밀, 너는 실제로 shitty job 을 가진 사람을 알고 있어. 누군지 아니?"

     

    에밀이 그게 무슨 소린가 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너의 엄마야! 하하하! 엄마는 아침 저녁으로 똥을 만지고 살아. 엄마랑 같이 일하는 아줌마들도 똥치우는 일을 하지. 사실 그분들은 엄마보다 더 많이 똥을 치우고 있어."

     

    에밀은  '더러운 일 (shitty job)'이라고 했을 때 shitty 란 단어를 하나의 비유--즉 '똥만큼 더러운'의 의미--로 사용했다. 나는 에밀에게 나와 간병 도우미들이 하는 일은 비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 똥의 일 (shitty) 을 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에밀아, 엄마가 해보고 알았는데  '똥을 만지는 일'은 절대로 '똥같이 더러운 일'이 아니야. 그걸 너랑 나누고 싶어."

     

    미국 사람들이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욕, 'shitty' 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또박또박 사용하면서 이야기를 하니 에밀이가 아무 말 없이 들었다.

     

    사실 나는 에밀이가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큰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나도 55 세가 넘어서 서서히 깨닫게 된 일, 책을 통해서 머리가 깨인 게 아니라, 실제로 손을 사용해 일하면서 터득한 진리인지라, 20 세 초반의 아이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게 오히려 당연했다.

     

    '에밀아, 엄마와 함께 shitty 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밤에 달게 잠자고, 사소한 것들을 감사하고, 그러면서 자기가 선 자리에서 더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어. 물론  그들이라도 100 퍼센트 행복한 건 아니지. 엄청 피곤하니까. 가난하니까. 남들이 내려다보니까. 

     

    그러나 그들의 shitty job 때문에 그들의 삶이 shitty 하지는 않아. 그들은 배웠다고 교만하고, 사랑의 마음은 고사하고 분노와 질투가 가득하고, 항상 자기를 증명하려고 애쓰면서 자기도 피곤하고 남들도 피곤하게하지 않아. 그리고 적어도 그들이 하는 일들은 직/접/적/으/로 한 생명의 존립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일이야. 돈을 많이 받지는 못해도....얼마나 고마운 일이니. 남들이 더럽다고 안하는 일들을 해서 사람들을 살려주고 있으니 말이야."

     

    에밀은 이해를 하는지 못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진정성을 존중해 내 이야기를 듣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 후 1 년간 에밀은 더 큰 격동의 시간을 거쳤다. 에릭과 조심스럽게 그를 관찰하고 도우려했다. 이러다가 아이의 정신이 다 무너져버리는가 두려운 순간도 있어서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두렵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작년 11 월이었다. 추수감사절 휴가가 끝날 무렵, 에밀과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자기는 공부가 재미없고, 왜 공부해야하는지 모르겠다고--나에게 화를 내듯이--이야기했다. 그 순간, 아, 이제까지 내가 인내하고 돌봐줬으면 되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왜 내가 너를 공부하라고 독려해야하는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학교를 그만둬라."

     

    에밀이 깜짝 놀랐다. 1 년만 하면 학사가 끝나는데 그만두라고 하니까 놀랄만도 했다.

     

    "네가 학위 끝난다고 다른 사람이 될 것같아? 아닐 거야.. 넌 여전히 불만스러워하고, 여전히 불평할 거야.  그렇게 살아도 상관없어. 네 인생이니까. 단지 그런 너에게 우리가 경제적 보조를 해줄 필요는 없지."

     

    나는 에밀이가 오해할까봐 정성을 다해서 설명했다. 우리가 경제적 보조를 끊겠다는 게 그를 미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공부 안한다는 것에 대한 처벌도 아니라는 것을.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을 '특권'이라는 것을 매 순간 느끼고 살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특권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 불평불만만 일삼는다면, 비싼 돈 내면서 그런 소리 하고 있느니 아예 때려 치우는 게 낫다고.

     

     '머리에 똥만 차는 교육' 보다는 '똥을 만지는 일'이 더 교육적이라는 게 나의 확신이고 진심이었다. 학위는 필요없다!

     

    나의 말에 반박도, 부정도 없이 에밀은 가만히 들었다. 나는  '에밀아, 너도 shitty work 을 한번 해봐. 뭐든간에.' 라고 권했다. 

     

    "지난 1 년 동안 너는 너무 아팠고 그래서 엄마 아빠가 너더러 날아보라고 밀치지를 않았어.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널 도와주면 너를 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상황이 된 것같아. 너는 이제 날아야해. 너를 믿고 한번 날아봐."

     

    (그 후 4 개월뿐이 안 지났으나 에밀은 정말 많이 변했다. 현재 에밀은 휴학 상태로 신발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일주일에 2-3 회 새벽 4 시 반에 일어나 다섯시까지 출근해서 신발 박스를 내리고 정리하는 일을 하고, 2-3 일은 오후와 저녁에 일을 한다. 책도 읽기 시작했고, 자기가 좋아하는 피트니스 트레이너 자격증 과정도 잘 해가고 있다. 며칠 전에 문자가 왔는데 자기가 죠르단 피터슨의 책을 읽던 중, 자기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자녀 교육'에 관한 챕터를 읽으면서 부모의 역할과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영향에 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그 챕터를 읽은 뒤에 나도 이제 자녀 교육에 관해서 옛날과는 달리 어떤 의견과 방향을 갖게 되었고, 동시에 엄마랑 아빠가 나에게 해준 교육에 관해서 더 큰 감사함을 느낀다" 는 문자를 보내왔다. 아이의 고통스러운 방황이 점점 끝나가는 것같아서 정말 다행이고 감사하다)

     

    만약 아이와 내가 바로 3 년 전에 아이의 진로와 직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면 어땠을까?

     

    분명 나는 아이가 '더러운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고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의 교육의 목적이 그것이니까), 어떻게 하면 아이가 사회적 보상과 인정을 받고 자신감을 갖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를 같이 고민했을 것이다. 대학원을 갈래, 유학을 갈래, 1 년간 봉사활동을 가서 여러 경험을 쌓아볼래, 그러기 위해서 일을 해서 돈을 좀 모아봐라, 우리가 도와줄께~~~ 하면서 아이의 '독립적' '성장'을 위해 같이 고민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면서도 내가 좌지우지하지 않으려 하고  아이가 스스로 결정을 하게끔 하려고 조심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건 가장 바람직한 부모의 태도일지 모른다. 분명 아이가 앞으로도 그런 고민들을 할 것이고, 부모로서 나의 역할은 만년 현재 진행형인 고민거리일 것이다.

     

    그러나 3 년 전, 아버지 수발을 들기 전과 그 이후의 내가 다른 점이 있다. 아이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직업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이래야 애가 편하게 잘 살텐데---!' 라는 간절함이란 1 퍼센트도 없다. 직업관이 달라지고 일에 대한 관점이 달라져서이다. 섬김의 아름다움, 희생의 중요성 어쩌구 저쩌구의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세상에 '똥같은 직업, 엿같은 직업'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어서이다. 그저 엿같은 직업이라고 차별하는 인간들만 있을 따름이다. 그게 좀 성질나게 만드는 요인이지만 그것도 '엿같은 분들' 이라 생각하고 넘겨버리면 된다. 나는 그저 내 아이가 엿같은 직업을 차별하는 것을 바꾸려고 노력할 따름이다. 그리고 지금 서서히 아이의 사고가 바뀌고 있다. 다행이다.

     

    물론 가능하다면 아이가 자기가 원하는 일 찾아서 하면 정말 좋겠다. 그러나그런 사람은 아주 소수라고 하고,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다 고려해보면  내 자식이 그런 선택받은 소수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흐...어쩌겠냐. 그러면 그런 거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아니지만 많은 돈을 주무르는 성공을 했다? 그것을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온 몸이 삭게 노력을 한다? 그것은 아이의 선택이니 존중해야하겠지만 나는 돈이 많고 세상이 알아준다고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에휴...가엾은 것...할 것같다..

     

    좋아하는 일도 아닌데, 돈도 많이 못 받는다? 그럼 어떠냐. 그냥 열심히 살아라. 꾀부리지 말고, 수 쓰지 말고. 

     

    뭐든 다 좋다다. 수발을 들어서 깨달은 진리라고 하면 꼭 '힘든 일을 해야 인간이 성숙한다'는 식의 따지고 보면 아주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세상의 많은 일들이 어떻게 보냐에 따라서 힘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한 뒤의 든든한 뱃짱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차별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아니며 모든 사람이 직업에 의해서 남을 차별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단지 우리가 암암리에 직업과 일의 귀천을 미리 정의해버리는 버릇은 다시금 암암리에 사람의 귀천을 정의해버리는 엄청난 과오로 이어질 수 있다.  직장 뿐이랴, 외양, 소지품, 출신학교, 집안---남과 자신을 평가하게 만드는 말도 안되는 '엿같은' 기준이 많기도 하다. 그런 기준에 놀아나서 사람들이 서로서로를 차별해서 잘해주거나 박대하고, 동시에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와 근거없는 오만함에 빠지게 하거나 불행한 인격적/정서적 자해를 하게끔 만들지 않는가!

     

    나는 에밀이랑 꼴렛에게 함부로 내 의견을 강요하지 않으려하지만 직업과 일의 귀천을 정의해버리는 사회의 편견과 거짓말을 믿지 말라는 말은 자신있게 한다.  사람을 눈으로 만나고, 마음으로 발견하고, 머리로서 현명하게 관계를 키워나가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도 한다. 틀린 소리가 아니므로 아이들이 고깝게 듣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 바램이 있다. 그런데 너무 유치하게 들리기도 하고 분명 못 알아들을 이야기라서 안한다. (내가 55 세 되어서 깨달은 걸 애들이 알아들을 리 있으랴...)

     

    나는 그들이 이담에라도 거친 손을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들/을 위/해/서.  내 손보다더 거친 할머니의 손을 갖게 된다면 더더욱 환영할 일이다.  

     

    물론 지금 거울을 보면서 역기를 들어 올리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게임기를 현란하게 움직이고, 기타를 치고, 핸드크림으로 마사지해서 보들보들한 손을 가진 그들이 덜 사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되려 자신의 평안함과 안전함에 집착하는 그 젊음이 귀엽기조차 하다.  

     

    그러나 언젠가 그들이  '수고하는 손'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손길' '마음을 담는 손'의 의미와 그런 손의 바쁨이 주는 기쁨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손으로 쌓아가는 사랑의 탑은 남의 인정이라는 신기루와 달리 단단하기 때문이다.

     

    녀석들이 60 이 다되어 혼자 거울 보면서, 쭈글쭈글한 스스로의 모습에도 흐믓하게 씨익 웃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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