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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발은 노는 전업주부의 몫이라?
    부모님 이야기 2019. 3. 29. 04:07

    아버지를 모시는 동안 내가 정말 힘들었던 적이 있다. 경제력이 없는 전업주부라는 나의 경제적 무능력에 스스로에게 분노와 자괴감을 느꼈을 때와 전업주부에 관한 편견에 상처를 받았을 때였다. 

    부모님 영주권 신청 때 일어난 일.

    아버지의 낙상으로 부모님이 한국에 돌아가실 수 없다는 게 확실해진 뒤, 에릭이 부모님의 영주권 신청을 들어가자고 했다. 변호사 비용이 한 사람당 1500 불까지 든다니 서류 작성을 내가 하기로 했다. 일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단지 아버지 건강이 안좋아서 병수발에 집중해야하는 상황이라 많은 서류를 꼼꼼히 기입하고 확인하는 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서류가 얼마나 많던지...내가 작성해야하는 이민 초청 청원서와 부모님이 작성해야하는 영주권 신청서가 기본, 여권 사진 (아버지 몸이 불편해서 사진사 친구가 와서 찍어야했음),신원조회서, 부모님의 출생증명, 여권, 비자, 혼인관계 증명서, 나와 에릭의 시민권자 증빙서류 (사진, 출생증명), 혼인증명, 재직증명, 급여 명세서, 세금보고서, 귀화 증명서---많고도 많은 서류들. 이중 몇몇 서류는 불어를 영어로,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해야했다.

    많은 서류 중 내 자존감을 흔들어놓은 서류는 '초청자의 재정보증서.' 

    영주권자가 나중에 생활보호대상자가 되어 국고를 축낼까봐, 이민 신청자 (부모님)가 경제력이 없을 경우 초청자 (나)가 책임을 질 수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한 서류다. 그런데 초청자도 경제력이 없다면 (나!) 초청자의 재정보증인인 배우자 (에릭!)가 '보증동의서'를 제출해야했다.

    일단 초청자로서 나는 재정보증서에 나의 직업을 적어야했다. 돈을 벌지 않으니 나는 '무직'이다. 내가 전업주부서의 나의 일을 직업으로 생각하고 '홈메이커'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여긴다는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서류에서 직업은 소득의 여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었다. 

    서류 작성의 실수를 방지하려고 서류를 출력하여 '시범'으로 작성해보고 검토한 뒤에 컴퓨터에 기입하고 그걸 다시 프린트하다보니 나는 무직이란 단어를 수없이 쓰고 있었다. 아버지 서류 작성 뒤에 엄마 서류 작성하면서 또 도돌이표로 무직, 무직 무직~타령이...

    이어서 나의 재정보증인인 남편의 서류를 작성했다. 듣기 그럴싸한 그의 직업과 소득을 여러번 적어야했다. 남편이 이미 준비해놓은 3 년간의 세금 보고서는 두툼했다. 그와 나의 공동 명의로 되어 있지만 내 눈에는---그리고 그 누구의 눈에든---그것은 돈을 번 에릭의 소득의 보고서일 따름이었다. 

    서류를 준비하는 며칠 동안 나는 우울해졌다. '경제력'이라는 제한된 정의로서 새로이 인식하게 된 나의 정체성, 나는 그냥 '돈 못버는 여자' 일따름이었다. 나는 그 유명한 '전업주부 바이러스'에 걸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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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업주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나타나는 증상은 자아 존중 상실, 우울증, 의욕상실, 그리고 대상이 정확치 않은---주로 자신에게로 향하는-- 분노이다. 

    나는 결혼 초에 그 바이러스에 감염된 적이 있었으나 성공적으로 퇴치하고 건강하게 20 여년의 결혼생활을 해왔다. 면역이 되었다 생각했고 내가 다시 그 바이러스의 공격에 무너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부모님 영주권 준비와 수발로 너무 많은 일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면역력이 떨어진 건가?  이제까지 나를 지탱해주었던 견고했던 방어 체계는 '무직'이란 단어 여러번 쓰고 나서 허무하게 무너져버렸다. 

    내 나름의 방어 체계는 여러가지였다. 일단은 전업주부에 대한 숱한 부정적 견해와 폄하와 동의하기는 커녕 그것을 무시해버릴 수 있었던 나의 긍정적 사고였다. 예로, 가사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 풍토, 전업주부가 '논다' '능력없는 여성들의 집단'이라는 편견에 나는 동의하지 않음은 물론 무시했다. 아이들 학교 보내고 운동, 쇼핑, 맛집 전전하는 팔자 늘어진 일부 엄마들을 기준으로 모든 전업주부를 남편의 경제력의 기생충으로 취급하는 사고방식은 거의 종교심과 같은 여성 혐오적 믿음이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을 내가 어찌 말로 전도하랴. 그냥 열심히 살자! 끝!  (나의 이런 사고를 동료 전업주부들에게 전도하려고는 노력했다.)

    전업주부의 노동은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는 반복적 노동이기에 전업주부 바이러스에 감염에 취약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살림에 소질이 없는 나는 스트레스 받지 않는 한도에서 살림을 했다. 가사노동은 남편이나 내가 가족이 사는 공간을 쾌적하게 만들기 위해서 같이 하는 일로  집이 좀 덜 정리가 되어도, 빨래가 덜 예쁘게 개어져도 상관없이, 살림보다는 아이들과 노는데 더 집중한 불량 살림이었으나 나도, 아이들도 스트레스 없었다.

    전업주부라는 단어는 전업으로 살림하고, 돈받아 쓰는 여성'의 사고를 깰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홈메이커'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이제까지 남편도 홈메이커, 나도 홈메이커라 믿고 살아왔다. 아주 옛날에 명함을 박은 적도 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살림이 빠듯했고, 명함을 박아봤자 주고받을 일이 없으니 무용지물이었지만, 냉장고에 한장 붙여놓고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자긍심을 잃지 않으려 했다.

    나의 살림의 목표 중의 하나는 '엄마인 내가 없어도 집안일이 잘 돌아가게 한다'였고 그 목표 하나는 확실히 이뤘다고 자부한다.  내가 없을 때 우리집은 솔직히 내가 좀 섭섭하리만큼 잘 돌아간다. 식구들은 수다스러운 나를 그리워할지는 몰라도 내가 개어주는 빨래, 내가 해주는 밥을 그리워하진 않는 듯하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큰 도움을 받았다.  예로 2011 년 이후 부모님 건강 문제로 내가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 한국을 들낙날락 거리고,  오빠가 돌아가셨을 때 아이가 대학 입시 준비 중이었으나 한 달을 비워도 아이들의 학업과 삶에 큰 지장이 안 갔다. 내가 더 잘 챙겨줬으면 더 좋은 대학 갔을 거라고들 하던데 그렇게 했다간 내 건강에 무리가 왔을 것이니 안될 말이다. 내 생각으로  교육을 받은 부모가 이혼하지 않고 같이 사는 우리가정의 아이들은 이미 큰 혜택을 받고 있다고 보고, 더 이상 무리해서 챙겨주지 않아도 생각한다. 세상에 고생하면서 사는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미 팔자 좋은 우리 아이들이 에릭과 나의 무리한 노력과 희생을 통해서 더 좋은 대학에 간다면, 그것은 비정상적으로 경기 능력을 높이는  '도핑'과 다름없다. "약물 복용은 안되는 거야...흠흠..." 하고 지나갔다.

    애초에 고소득 직장, 돈,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 내가 전업주부 바이러스에서 보호된 것도 있었다. 소위 잘나가다고 하는 사람들이 부럽지도 않고, 그들에 비해 내가 초라하다고 느끼지도 않았다. 아무데도 속하지 않을 때 느끼는 불안감이나 외로움이 없진 않으나 그것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자유를 택한 댓가이니 받아들이는 게 공평하다. 힘들게 사회에서 열심히 일한 여성들이 받는 대접과 인정은 질투할 일이 아니라 축하할 일이다. 

    풍족한 돈이 없는 대신 절약에 도가 텄다.  몇 년 전, 아이들이 대학을 갈 무렵에 우리집 경제사정이 많이 좋아졌지만 그전까지는 동네에서 가장 낡은 차를 몰았고, 화장실 하나인 작은 집, 중고품, 얻은 물건에 익숙한 우리의 삶이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비굴하거나 위축된 적은 없고 돈이 있다고 해서 마구 쓸 필요도 없다고 믿기에 우리는 경제적으로 넉넉해진 뒤에도 더 큰차로 바꾸고 더 크고 좋은 집으로 이사할 계획 없이, 짝 안맞는 그릇에 밥먹으면서 뭔가 구차하게 살고 있다.

    물론 가끔 기분 나쁠 때가 있긴 했다. 끼리끼리 모이는 세상에서 어디에 낄 데 없는 전업주부가 받는 교묘한 홀대, 특히 딱 찝어서 말할 수 없이 교묘해서 더 기분 나쁘게 만드는 대접을 받을 때는 혼자 삭여야한다. 조금 젊었을 때는 무시나 홀대를 받을 때는 불쾌함에 끙끙거리기도 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는 여성들끼리 서로 무시하고 반목하는 게 싸울 일이 아니라 슬퍼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려요...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하고 그냥 지나쳤다.

    속할 곳이 없고, 돈도 없으니까 좋은 것은? (남편의 돈이든, 부모의 돈이든, 자기가 만든 돈이든) 돈많은 여인들의 끼리끼리 '여인천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예 초대를 받지 않으니 초대를 거절해야하는 수고조차 면제! 얼마나 다행인가.  나의 삶은 나를 돈과 지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진정한 친구들만 존재했고, 그래서 나는 대체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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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전업주부 바이러스의 공격에 나름 단단하게 무장되어 있었음에도, 부모님 이민 초청장에 '무직'이란 단어를 쓸 때마다 자존감은 점점 낮아졌다. '무직'이란 단어는 설거질을 하고, 아버지 목욕을 하고, 밥하고 청소하는 내내 나의 뇌리에 달라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살아도, 아니,  지난 20 여년 동안 나는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 나는 내 돈 한 푼 없이, 부모님 부양을 남편 돈으로 해야하나?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다가 남편과 싸움이 났다. 

    모든 서류가 다 준비가 되어서 이제 서류마다 부모님이 싸인을 해야하는 날이었다. 에릭과 마주앉아 두툼한 서류 뭉치를 꼼꼼히 읽으며 마지막으로 확인을 했다. 갑자기 에릭이 '이거, 숫자가 잘못 기입되었네' 라고 지적했다. 그의 월급 액수에 숫자 하나를 바꿔쓴 거다. 그의 찡그린 표정에 나는 갑자기 자존심이 상했다. 불쾌감을 못참고 차갑게 쏘아부쳤다.

     "서류를 여러번 읽고 고치다보면 틀릴 수도 있지. 그걸 발견하려고 지금 같이 교정하는 거잖아!"

     그는 지지않고 맞섰다.

    "어서 서류를 보내야하는데 이렇게 사소한 것에 실수하면 안되지."

    뭐.라.구?  서류 작성 다 한 게 누군데?  수십장 서류 다 읽고, 기입하고, 번역하고 한 게 누군데? 어딨다가 나타나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날 뭘로보고?  아니, 내가 무직이라고 날 무시하는 거야? 허! 그래, 당신이 내 재정보증인이라 이거지? 그래서 막 대해도 된다는 거지?

    라는 생각이 휘리릭 스쳤다.

    기분이 잡쳤다. '돈 버는 남자, 돈 못 버는 여자' 란 이분법의 사고가 내 이성에 빗장을 걸어버리고 감정의 샘을 폭파시켰다. 이해할 수 없는 훅 올라오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버려서 끙끙거렸다. 억울함에 눈물이 터질 지경이었다.

    에릭은 내가 화난 것을 느꼈는지 아무 말 없이 주섬주섬 서류를 챙겨 아버지 방으로 갔다. 나도 따라들어가 아버지가 싸인을 할 수 있게 쿳션을 겹겹히 쌓아 올려서 손이 불편한 아버지가 펜을 들고 이름을 쓸 수 있게 도와드렸다. 그렇게 침착하게 일을 하면서도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저 위선자, 나를 무시하면서 우리 아버지한테 잘하는 척하고 있네...'란 생각때문이었다. 

    부모님이 다 서류에 싸인을 한 뒤에 서류함에 챙겨 넣자마자 나는 쌩~이층으로 올라가버렸다. 그 이후로 나는 나를 무시한 그 무례한, 꼴도 보기 싫은 나의 재정보증인, 남편이란 작자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아침에 출근할 때 등돌리고 쌩~, 퇴근 후 집에 돌아와도 눈길 한번 안주고 아버지 방으로 쌩~, 아이들과 함께 먹을 저녁밥 차려놓고 먹으란 소리도 안하고 쌩~~사라졌다. 같은 공간에 있기도 싫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뭔가 씌었던 것같은데 나는 마음 속으로 이혼의 상황까지 상상하고 있었다. 나는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배우자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항상 이혼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아왔다. 내 존엄성을 침해하는 행위는 참을 수 없다, 참으면 안된다라는 그런 선을 그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는 에릭이 그 선을 넘었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혼을 한 뒤의 나의 삶을 상상해보았다. 캘리포니아는 재산을 깨끗하게 반으로 나누게 되어 있다. 그래, 정확히 반을 내 몫으로 받아야해. 부모님 모시고 한국에 돌아가자.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내가 뭘하지? 운전도 잘 못하고, 요리도 못하고, 청소도 못하고.... 나의 무력함이 낱낱이 들여다보였다.  내가 사회적 재기 불능자같이 느껴졌다. 

    아냐, 아냐... 뭐라도 할 수 있어. 학원 강사같은 것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그렇게 하자. 뭐든 하면서 부모님을 모시자. 아이들은 대학생이니 방학에 한국 방문하면 되고....

    이런 식으로 남편에 대한 복수극을 꿈꿨다. 내 생각에 나를 경제력이 없다고 무시한 듯한 남편에게 나 너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가장 신나는 복수극이 아니겠는가! 나의 상상은 끝이 없었고 그러면서 화가 슬슬 풀리기 시작했다.

    일주일의 냉전 끝에 에릭이 나에게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신주, 나는 이런 식으로는 살 수 없어."

    (나도 그렇다! 이제 한번 우리 관계를 정확히 정리해보자!)

    앗, 그런데 에릭의 눈에 눈물이?

    "우리의 일상이 어디로 간 거야? 왜 당신은 나를 무시해? 나는 집에 돌아와서 저녁 먹는 시간을 고대하면서 집에 와.  당신이 해준 밥 먹고나서 '맛있다'고 이야기하는 순간이 행복해. 그런데 요즘 당신이 아무 말 안하니까...."

    (헉...내가 해준...밥을? 그거...별로 맛 없는 건데...) 뜨끔했다.

    에릭의 말을 들어보니 이해가 되는 구석이 있었다. 그 즈음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집에 와서 영주권 서류 뭉치를 읽으면서 마음의 여유를 잃었노라고. 그래서 잠시 짜증을 냈는데, 그게 정말 미안하지만, 내 반응이 너무도 공격적이어서 자기가 놀랐다고...

    그래서 나도 설명했다. 왜 그렇게 화가났는지 모르겠는데 정말 이혼하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 당신과 동역자로 홈메이킹을 공유하면서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내가 아무런 ‘경제력’이 없더라, 난 무직이더라! 내가 무직이란 소리를 얼마나 많이 적었는지 아느냐!  

    남편은  내가 와다다다~ 말을 풀어내니까 당황해서 가만히 쳐다보았다.

    "난, 이혼하면 한국에 돌아가서 일을 찾아보려 했어. 부모님 모시고 가서. 간병 도우미를 많이 써야하겠지만 그래도 당신의 부양인, '딸린 식구' 가 아니라 '내가 독립적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싶었어."

    그말에 에릭의 눈이 커졌다. 당혹감과 섭섭함을 쏟아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런 사소한 일로 이혼을 생각하다니? 나는 당신과 냉전 기간 동안에 온 세상이 암흑으로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는데 당신은 부모님 모시고 한국 가서 사는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고 있었다고? 날 두고서 그렇게 뭔가 건설할 생각을 할 수 있어?"

    에릭이 억울한 표정이었다. 그는 나에게 따졌다. 우리가 이것밖에 안되냐고. 이제까지 자기가 나에게 경제적으로 귀속된 존재라는 기분을 들게 한 적이 있었냐고. 자기가 나의 경제적 자율권을 부정하거나 억압한 적이 있냐고.

    할 말이 없었다. 왜냐면 에릭은 나에게 집에서 놀면서 왜 살림을 못하냐고 잔소리하기는 커녕, 매사에 감사하면서 살림과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홈메이커 동지였기 때문이다. 따지고보면 내가 전업주부로서 자존감을 지키고 산 것은 나의 노력의 결과만이 아니라 남편의 덕이 컸다.  경제적인 차원에서도 그는 항상 우리가 운명공동체임을 존중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나보다 먼저, 그리고 나보다 더 깊게,  우리의 결혼이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결합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우리가 혼인신고를 하자마자 자신의 은행 계좌를 공유하는 신용카드를 선물함으로써 우리가 경제적 운명 공동체라는 사실을 공식화한 것은 그였다.   single income 으로 빠듯한 살림에도 그는 내가 나에게 전업주부로서 월급을 주기로 했을 때 대대적 환영을 한 것도 그였다.  '당신이 건강하게 아이들을 키워주기 때문에 온 가족이 행복하고 내가 일에 집중하고 잘 살 수 있어. 그걸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이 고마운 일이야.' 라고 모범답안과 같은 소리를 하면서.  (내 월급은 처음에는 한달에 50 불이었다가, 일주일에 20 불 (한달에 80 불),  점점 인상되어 일주일에 100 불까지 되었다.)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와 같이 살자는 제안을 하 것도 남편이었다. 의료보험도 만들어드리고, 아버지께 필요한 모든 의료 기구들을 다 구매한 것도 남편이었다. 그는 아버지 수발도 적극적으로 도왔다. '당신의 아버지니까 당신이 모든 걸 다 해야지'란 사고는 추호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왜 남편은 숫자 하나 잘못되었다고 하는 지적에  자존심이 상해 펄펄 뛰고 이혼까지 결심했을까? 나는 왜 그렇게 분노했을까?

    에릭이랑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깨달았다. 나의 자각, 분노, 이혼---이 모든 것은 나와 에릭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나의 의식을 암암리에 지배하고 있는  짓누르고 있는 가부장적 제도, 성착취적 사고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내가 돈 못벌어서 자존심이 상했고 내가 그런 자존심을 상하는 상황에서 산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화가 난 것이었다. 나는 전업주부 바이러스에서 방어체계를 잘 구축해서 살아왔느니 어쩌니 하던 나의 의식 속에  내가 반대하는 거부하던 전업주부의 정의, 즉 놀며 사는 무직자, 가 내재화되었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서류 몇 장 작성하고서 나는 나를 남편의 부양자, 무직으로 나를 정의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민서류만일까? 나는 내가 지난 20 년 동안 진정으로 '에릭이 벌어온 돈'이 나와 공동 소유라고 진정으로 믿었던가가 의심스러웠다.  은행 구좌를 공유하고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살아온 20 여년의 결혼생활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편과 내가 동등한 경제적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백퍼센트 받아들이고 있지 못한 것같았다. 예로 나는 나의 일로 지출해야해서 에릭에게 상의를 하고 결정을 같이 내릴 때,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약간 불편했다.  에릭이 아무리 기꺼이 동의해도로 뭔가 찜찜한 기분. 마치 에릭에게 내게 필요한 지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내가 그의 허락을 받는 것이라도 되는 양 불편했다. 물론 우리가 경제적 공동체라는 사고를 떠올려 내 불편함을 묻어버리곤 했지만....

    어떤 면에서 내가 이혼에 대해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그것도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서류는 남편에게 '내가 너 없이도 살 수 있다' 라는 비장의 독립선언문이기도 했다.

    이혼한 뒤에 받는 재산의 반쪽에 대해서는 법적으로만이 아니라 내 사고 안에서도 내가 당연히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 결혼 생활 중에는 그렇지 못할까?  민주적 관계를 맺었네, 경제적 공동체이네 하고 살면서는 배우자로서 나의 경제적 권리/몫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이혼을 한다면 반쪽으로 나눠진 소유에 대해서는 불편함 없이 정당하게 내 몫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이유는 뭘까? 전업주부가 결혼 생활을 하면서 경제적 자율성을 즐기고 경제적 권리/소유권을 온/전/히 느끼고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며칠 동안 많은 생각을 하던 중, 아침에 회사를 가기 전 에릭이 나에게 물었다.

    "이번 주에 운동화를 하나 사려고 하는데, 삼종 경기에 신을 수 있는 것이라 좀 비쌀 것같다" 라고 했다.

    "얼마 정도?"

    "100불은 넘을 거야."

    며칠 계속 돈에 대해 골몰해왔던 나는 에릭에게 '사도 좋아' 라고 동의했다. 에릭은 생긋 웃으면서 고맙다고 했다.에릭이 회사에 간 뒤 다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내가 에릭한테 '나 운동화 하나 사고 싶은데--' 라고 물어야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어땠을까? 나의 지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분명 목에 생선 가시가 걸려있는 듯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적 가정의 동역자이니 운운하면서 내게 자격이 있음을 상기시킴으로써 불편함을 꿀꺽 삼키려고 했을 것이다. 해맑게 웃는 에릭과 달리..

    그러고보니 에릭은 사진기나 자전거 구입과 같은 큰 지출, 부모님께 송금 문제는 물론이고, 사소하지만 가격이 100 불 이상인 물품 (운동화, 카메라 부속품 등) 이나 기부금을 보낼 때 나에게 의논해왔다. 20 년간 삼종경기를 해왔지만 자기 맘에 드는 잠수 수영복을 구입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었는데 그것도 나에게 자문을 구하고 구입했다. 한국 기준으로는 '쫌상' 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가 나와 의논하지 않고 하는 지출은 어쩌다 점심 식사 (10 불 미만)나 속옷이냐 양말 구입이고, 그 외에는 매사를 나와 함께 지출 여부를 결정하고 대부분 다 오케이! 지출 허락이 떨어짐은 물론이다. 

    그가 나에게 의논을 하고 내가 오케이를 하기때문에 마치 내가 '결정을 내리는' 것같이 되는데  에릭은 나에게 억압되었다고 느끼고, 자존심 상해하지 않는다. 그게 가진 자의 여유인가? 숨겨둔 거 있나?  

    에릭의 운동화 건으로 나는 내가 내내 가졌던 질문----전업주부가 결혼 생활을 하면서 경제적 자율성을 즐기고 경제적 권리/소유권을 온/전/히 느끼고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은 것같았다.  나는 내가 경제적 자율성을 온전히 느끼고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불가능함은 내가 자존심이 상해서 전전긍긍했던 이유---즉 내가 돈 못버는 전업주부로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어서--가 아니었다.  남편과 내가 공동으로 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그래서 서로를 존중해야하기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에릭이 자기가 돈을 벌어온다는 이유로 재산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해서 마음대로 관리하거나 자기 멋대로 쓰지 않고, 나와의  '공동재산'임을 인정하고 매사에 나의 동의를 구하듯이, 에릭도 나도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상의하는 것이 마땅하다. 에릭이 내가 경제력이 없다고 무시하고 억압하지 않는데, 내가 '나는 무능력자'라고 셀프 서비스로 나의 머리를 벽에 박치기를 할 이유가 없다. 왜? 나는 무능력자가 아니므로! 내가 '무직'일지언정 내 노동이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므로!

    이제까지 결혼 생활에서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전업주부-취업남편'이란 우리집안의 가정 구조가 가부장제도의  여성의 경제적 의존성과 불평등이란 병폐를 재생해버리고 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영주권 초청 사건으로 나는 나의 두려움을 맞닥뜨렸고, 에릭과 충돌과 대화를 통해서 어느 정도의 안정을 얻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우려는 평생 지고갈 짐이라는 것을알고 있다. 내가 동등하고 민주적인 부부관계를 추구할 것이고 이룬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그런 불평등을 계속 조심할 것이고 남편에게도 표현하고 살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남녀의 차이는 여전히 존재한다.  분명히 에릭은 나처럼 생각이 복잡하지 않을 것이니까...경제적 협력, 상호 존중하는 부부관계에 대한 희망과 추구를 별다른 결심이나 자각 없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에릭과 달리 나는 매사를 항상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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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발 기간 동안  전업주부 바이러스 공격을 몇 차례 더 받았다. 아버지 수발 드는 것에 대해서 "전업주부니까 아버지 수발 드는거라" 거라는 말을 두어 번 들었을 때이다.  나는 몹시 불쾌했다.  그것은 '노는' 전업주부니까 시간이 많고, 시간이 많은 사람은 '돈 버는 일 하느라도 바쁜' 사람대신에 당연히 부양의 의무를 담당해야한다는 식의 사고로 무척 무례한 소리다.  (시)부모 부양과 수발을 전업주부라는 이유로 딸/며느리/올케/아내가 집에서, 또는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부양/수발을 드는 것은 공정치 않다. 전업주부들도 할 수 없는 일의 선을 정확히 긋고, 죄의식 느끼지 않고, 자존감을 지키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잠깐 이야기가 새는데) 전업주부와 마찬가지로 부양의 의무가 쉽게 떠맡겨지는 사람들은 독신 자녀들이다.  혼자사는 언니/형/아우가 기혼자인 자신보다 부모의 부양의 의무를 더 많이 지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고방식도 정말 고쳐져야하는 사고방식이다.  혹시라도 가죽 중의 돌싱/독신이 부모님을 당연히 맡아 돌보리라 생각하는 분들은  병수발, 부양은 엄청난 정신적 지지가 필요한 일이므로, 스트레스 풀 데 없는 독신자 보다는 '벼겟머리 송사'를 할 수 있는 복받은 기혼자들이 더 많이 참여해주는 게 훨씬 더 낫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란다.  결국 독신 형제 자매가 부양의 의무를 전담하는 경우에는 진심으로 많이 감사하고 지지하고 도와주시길....) 

    부양의 의무처럼 육체적/정신적으로 소모가 큰 일은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선택의 여지가 있어야한다. 전업이든, 독신이든, 마음이 준비가 안된다면 하면 수발은 섯불리 감당하겠다고 나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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