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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레스 할아버지가 준 노년의 교훈
    부모님 이야기 2019. 3. 25. 03:58


    내가 무슈 페레스를 만난 것은 1990 년, 빠리에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는  70 대 중반 이스라엘 남성으로 나의 은사의 오프라의 친구였다. 오프라는 내가 파리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오프라는 나더러 무슈 페레스를 만나보라고 연락해왔다. 좋은 친구가 거라면서.. 


    오프라는 페레스에 대해 사전 정보를 주었다. 그는 결혼한 50년이 되었는데 부인은 프랑스 남부의 항구 도시에 살고 있고, 그는 파리에 조그만 스튜디오를 하나 소유하고 있어 년의 반을 파리에서 보낸다고 했다. 그는 과거에 예술 평론가였으며 파리의 박물관과 화랑들이 너무 좋아 파리의 스튜디오를 포기하지 못한다고 했다.

    재미있는 사람이리라는 기대를 갖고 그를 찾아갔다.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이라 꼽히는 " 마레" 근처에 위치한 스튜디오에서 살고 있었다. 약간 어두컴컴한 그의 스튜디오는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거의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아기자기하며 편리하게 꾸며져 있었다.

    무슈 페레스는 가무잡잡한 피부에 반짝이는 , 70 중반이라는 믿어지지 않는 노인이었다. 자그마한 체구이지만 건강했으며, 마치 셰익스피어 연극의 주연 배우마냥 또박또박 위엄있게 이야기했다.


    그는 오프라의 말대로 박학다식했다.  파리에서 오래 외국인답게 그는 나에게 불어 공부하는 방법에서부터 (' 몽드 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라. 달만 해보면 실력이 늘것이다'), 싸고 맛있는 레스토랑이 어디어디에 있으며, 주말에 서는 장터 중에서 가장 싸고 좋은 곳을 가르쳐 주었고, 자기 전공인 음악, 미술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많았다.

    그후 우리는 여러 점심을 같이 먹었다. 나는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페레스 할아버지'가 좋았다. 그런데, 이상한 페레스 할아버지랑 앉아 있을 때는 이스라엘의 사바와 이야기할 때의 포근함 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매, 웃음기 없는 표정, 엄청난 지식욕의 그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나보다더 젊은, 야망이 있는 오만한 젊은이와 같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우리가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그는 나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주 친하게 지내는 남자친구들이 있었으나 그는 당시 설흔 살이었던 내가 진지한 교제를 하고 있지 않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어느 , 그는 나에게 '남성 공포증' 있냐고 물었다. 사실 질문은 내가 이스라엘과 유럽에서 사는 동안 여러 받던 질문이다. 동양 여성을 밝히는 남성들이 많은 곳이라서 혼자 있는 듯한 동양 여성을 보면 다들 별별 상상을 다하는 듯했다.


    나는 아주 가깝게 지내는 한국 친구들이 있어서 굳이 외국인 남성을 애인으로 삼고 싶지 않다고, 관심이 가는 사람이 애초에 없노라고 했다. 페레스는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심리학에 조예가 깊던 그는  내가 한국 사회에서 억압되었기에 남성에 대한 공포증이 있는 거라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나는 서양사회에서 내가 내내 느끼던 불편함을 다시금 느꼈다.  혼전 성교를 억압하던 (그래서 결혼 전에 처녀막 복원 수술도 행해지던) 80 년대의 한국 사회의 성관념 과 나이 먹어서 성경험이 없으면 부끄러운 일이라는 식의 서양식 성관념의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한국 여성의 성에 남들이 이렇게 관심이 많은 것이란 말인가


    그는 나에게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부인과 그는 50년을 살았지만 아이가 없다고 했다. 아이를 원치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정부' 있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렇게 담담하게, 미안함이나 부끄러움 없이  정부가 있다는 소리를 하다니..

    그는 마치 신문 기사를 읽어주듯이 편한 어조로 자기가 일년에 6 개월을 파리에서 보내는 이유가 그녀와 가까이 있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장난스런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
    나의 애인이 살인가 추측해봐."

    황당한 질문이다. 그냥 유부남이 애인이 있다고 하는 이야기라 해도 어색할 상황이었는데, 부인이 있는 80 이 가까운 할아버지가 자기 애인 나이를 맞춰보라고 하니.. 나는 우물쭈물했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말했다


    "너
    동갑이야."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정부가 있다는 충격에 이어 그의 나이가 나와 동갑이라니...

    갑자기 그때까지 이제까지 나를 불편하게 해왔던, 그 만날 때마다 느끼던 형언할 없는 긴장감, 날카로운 그의 시선의 이유가 명확하게 보였다. 


    그는 어쩌면 나도 한 여성으로 대했던 것이구나. 

    나는 한국식으로 어르신 공경 차원에서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주고, 재밌는 할아버지라 여겨서 자주 만난 것데...


    내가 어질어질한 사고를 정리하려고 애쓰고 있는 동안 무슈 페레스는 부연 설명을 했다. 자기의 젊은 애인은 그의 수제자였으며 그녀는 그의 훌륭한 유전자가 탐나서 그와 아이를 갖고 싶어하지만 자신은 아이한테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는 마치 내가 받은 쇼크가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기라도 하는 , 나에게 하나의 폭탄을 던졌다.

    "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내가 신주를 도와줄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야. 나는 네가 남성 공포증이 있다는 알고 있어. 네가 30 넘어서 처녀로 남아있는 이유가 바로 성에 대한 공포증, 남성에 대한 공포증이 있기 때문이지. 공포증을 내가 있다는 이야기야. 내가 너와 있다."

    나는 너무 놀라서 마디도 못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무슨 권리로 나라는 사람을 분석하나? 사실에서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 그의 상상에 경악을 나는 침묵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물론 네가 놀라리라는 것은 알아. 그러나 나는 너에게 지속적인 성관계를 요구하는 아니야. 그냥 네가 부담스럽게 지고 사는 처녀성의 굴레에서 너를 해방시켜줄게. 나이가 있으니 너를 쫓아다니면서 사귀자고 부담주지도 않을 거고, 한국에 돌아갈 때 스캔들의 위험도 없어..."

    나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식당의 식탁을 두 손으로 꼭 잡은 채, 상채를 올리면서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내가 처녀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당신이 내가 남성 공포증이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내가 처녀라면 왜 내가 거기에 대해서 불편해 해야해요?

    서양식 잣대로 나를 평가하지 말아요. 나는 지긋지긋해요. 동양 여성이면 이럴 것이다, 동양 여성이면 이래야 한다

    나의 몸을 구속하고, 나를 한계 짓고, 나를 맘대로 정의하는 이야기들이 지긋지긋해요!"

    그는 이제까지 순하고부드럽고 나긋나긋하던 내가 호랑이처럼 포효하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했다. 나는 그를 '노인'으로서 존중할 필요가 없었다. 손녀딸처럼 공손하게 굴던 나는 없었다. 내가 느꼈던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내가 무식했다면 할 말이 없지만, 나는 그가 '할아버지뻘 어른'이 아니라  남성으로서 나를 대했다는 것을 전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그를 멸시하는 한 동등한 여성으로서 그를 대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후로 그를 만나지 않았다. 2 년  이스라엘에 갔을 그를 오프라의 집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는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았고 그는 급히 일이 있다면서 자리를 떴다

    오프라는 최근의 페레스의 삶을 요약해줬다. 

    "페레스의 프랑스 여자 친구가 아기를 낳았어. 그리고 얼마 안되어 헤어졌단다. 애초에 페레스의 유전자가 탐이 난다고 했던 여성이니까 필연적으로 일어났어야 일이었지만...정작 아기가 태어난 뒤에는 페레스를 버린 거야. 페레스는 자기 아기를 한번도 보지 못했어. 그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지. 결국 그는 파리의 스튜디오를 처분하고 본부인에게 돌아갔어." 

    나는 오프라에게 빠리에서 페레스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줬다. 오프라는 내가 그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가 불편해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는데 그 이유를 알겠다고 했다. 

    페레스는 얼마 안되어 치매로 생을 마감지었다. 이제 거의 30 년 전의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나에게 충격을 주었던 페레스의 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로서만 반응했던 일들이 새롭게 다시 읽힌다. '처녀성'에서 해방시켜주겠다는 명목으로 잠을 자자고 제의하는 할아버지, 두뇌 좋은 할아버지 뻘 남성 유전자가 탐이 나서 연애를 하고 아기를 낳는 여성, 50 살아온 부인과의 신뢰보다 자신의 젊음을 확인하는 작업에 골몰하는 남성, 원하던 아기를 낳았으니 관계를 정리하는 여성----언뜻 보면 자신의 원하는 것을 자율적으로 결정하고 실천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주인공들이 공유하는 특성이 있다. 자신을 그릇된 방법으로 증명하려는 욕구, 지나친 자기애로 인한 전정한 사랑의 실패, 자기 삶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과도 맺지 못하는 믿음과 신뢰의 관계.

    의리, 신뢰, 사랑이 부재한 인간관계가 30 대의 나에게는 큰 충격이고 실망이었다. 그런데 60 이 가까워지는 나이의 나는 더이상 놀라지 않는다. 주위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이고 나 스스로도 뾰족하게 날이 서서 누가 나를 어떻게 보냐, 어떻게 대하냐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뿐더러 나에게 실질적으로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은 페레스에게 내가 분노할 이유는 전혀 없으니 말이다.

    오히려 그렇게 찬란한 지성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어쩌면 그 지배적인 지성 때문에  남에게 상처주고 자신도 상처받으면서 인생을 마감한 그에게 안스러운 감정마저 든다. 인생의 맨 마지막 챕터의 초반부---그가 빠리에서 살 때, 죽기 5-6 년 전까지만해도---그에겐 모든 인간관계를 자기 입장에서만 분석하고 자기의 이익만 추구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아니 노년에 그렇게 사는 게 오히려 '쿨'하게 보이기만 했다. 그런데 그 챕터의 맨 마지막 페이지는 너무도 비참했다.  아이가 태어났으나 그 기쁨을 누릴 수 없었고, 연인에게서 버림받았고, 결국은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던 빠리의 보금자리를 포기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관점으로 그를 함부로 동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만약 그가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았었다면 내가 그를 동정하는 것은 참으로 무례한 일이다. 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잠시라도 옷깃을 스친 관계인  그에 대한 예의라고 여긴다. 또한 나는 지독히 이성적인 그가 마지막에 일어난 일련의 불행한 사건들에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차갑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로부터 '내가 그렇게 사는 게 아니었어' 라던가 '내 주위의 여성들이 나를 이용했다면 나도 그들을 이용한 것은 마찬가지다' 라는 식의 깨달음을 기대하지 않는다. 아니, 아예 그 깨달음이 없었다면 좋겠다. 그래야 덜 아프니까.

    페레스의 삶을 통해서 내가 얻은 교훈은 분명히 있다. 페레스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본받을 점이 많은 노년의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나는 늙어가면서 페레스처럼 형식과 속박에서 자유로운 관계를 추구하려고 할 것이다. 나는 페레스처럼. '노년' '늙음'에 쉽게 항복하지 않고 매사에 호기심과 긍정적 마음가짐으로 살려고 할 것이다. 나는 페레스처럼 '이성'의 힘으로 복잡한 인간관계와 어려운 일들을 차근차근하게 분석하고 풀어나갈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익만을 챙기는 자기애와 그것을 합리화하는 지성은 나의 삶을 내가 전혀 원치 않는 황무지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은 기억하려한다. 굳이 밑지고 살 필요 없고, 밑지게 사는 것이 미덕은 절/대 아니지만, 남의 삶을 밑지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긍정적 대안이 아니다.  형식과 속박에서 자유로운 관계를 꿈꾸는 것은 마땅한 권리이나, '자유로운 관계'도 하나의 '관계'라는 사실, 그리고 어떤 관계든 정직, 공정, 신뢰, 그리고 가끔가다가의 희생을 필요로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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