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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고통으로 당신을 사랑하리
    부모님 이야기 2019. 3. 20. 01:29


    3 월, 벨기에에 정확히 5 일간 다녀왔다여행시간 빼면 벨기에에 머문 것은 사흘.

    아버지를 두고 그렇게 오래 시간을 비운 것은 에릭 큰형의  혼수상태이라는 비상사태 때문이었다.


    건강하던 형이 갑자기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에 에릭이 충격받아 흐느끼는 모습을 보다가 에릭더러 이렇게 울고 있느니 가서 형을 보고 오라고 권고했다. 에릭은  막내 동생이 내일 전화를 해주기로 했다면서 그와 통화 후에 가야할 것같다고 했다.


    "에릭, 지금 뭘 기다려?  무슨 소식을? 티에리 형이 회복이 기미가 있다는 소식, 아님 금방 돌아가실 것같다는 소식, 아니면 지금같은 상태로 계속 계실 것같다는 소식...그 세 가지 소식 뿐이 없는데, 뭘 기다려? 당신이 갔는데 깨어나셨다면 좋은 거고, 갔는데 돌아가실 지경이라면, 마지막 인사라도 할 수 있으니 다행인 거고, 계속 혼수상태라면 적어도 형수랑 부모님께 당신이 위로를 해줄 수 있는 거고. 가야될 이유만 있네. 어서 가."


    에릭이 가만히 혼자 생각을 하더니만 어렵게 말했다. 


    "...당신이 잠깐이라도 같이 갈 수 있어?.....아버지 돌보는 일 바쁜 거 아는데, 당신이 잠깐이라도 나와 갈 수 있어?"


    나는 적지 않이 놀랐다. 그만큼 에릭이 흔들리고 괴로운 거구나. 이제까지 나에게 뭔가를 부탁한 적이 없던 에릭의 부탁이었다. 가줘야할 것같았다.


    엄마 아버지께 여쭈었다. 대찬성! 버지니아에게도 물어보았다. 대찬성! 엄마는 "신주야, 내가 약속할께. 내 몸을 먼저 잘 지키면서 아버지 돌보기로, 그래서 우리가 잘 할 수 있다는 거 보여줄께, 걱정말고 다녀와" 라고 여러번 말씀했다. 


    바로 그 다음날 에릭이 떠났다. 에릭만큼 오래 집을 비울 수 없어서 나는 이틀 후에 떠나기로 했다.


    에릭이 벨기에에서 전화를 했다. 병원에 가서 보았는데....라고 하더니만 말을 끝맷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충격이 심한 것같았다. 나는 에릭과 오래 이야기 나눈 뒤에 마지막으로 에릭에게  한가지만 약속해달라고 했다. 


    "에릭, 내가 갈때까지 부모님 앞에서는 막 울지마. 부모님도 감정 표현을 자유롭게 못하시는 분들이이라 당신과  함께 울지 못하실 거야. 그러나 지금 부모님은 당신을 위로해야할 힘이 없어. 그러니까 부모님이 당신을 챙겨야하는 상황으로 몰고 가지는 마. 내가 가면 나랑 같이 울자."


    에릭이 그러겠노라 약속했다.


    기도모임 친구들과 기도를 나누고, 계속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브러셀로 떠났다.  


    브러셀 미디 역, 에릭이 저만치서 나를 보고 반가히 달려왔다. 차를 타고 집에 가면서 티에리가 처한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해줬다. 티에리가 밤에 심장에 통증을 느껴 앰뷸란스를 불러 지역 병원에 갔는데 상태가 심각해서 헬리콥터로 큰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았단다.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 순간부터 수술을 받을 때까지 소요된 시간이 40 분이란다. 그렇게 빠른 시간에 일이 진척되었기에 살아 남은 것이란다. 부모님은 어떠시냐니까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시고, 어머니는 어떤 상황에서든 '다 괜찮아질 거야' 라고 하신다고, 그러나 어머니도 많이 흔들린 것같다고....


    집에 도착했다.  우울하고 슬픈 얼굴의 시부모님이 꼭 껴안아주셨다.  


    공포와 슬픔을 침묵 속에 가둬두는 시부모님의 모습, 나에게는 생소하지 않다.  5 년 전, 나의 부모님이 그러했다. 오빠가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석 주, 부모님의 삶은 정지되었다. 살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들--밥먹고, 등산, 목욕--은 거의 기계적으로 할 따름, 슬픔이나 걱정의 표현이 병상의 아들의 숨을 앗아가기라도 하는 듯, 아무런 표현을 하지 않은 채 그냥 존재하고 있었던 부모님. 바로 그 모습이 시부모님의 모습이었다.


    시어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신주, 이 일이 터지고 나서 너의 부모님 생각을 했다. 네 오빠가 사경을 헤맬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정말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그런 끔찍한 경험이야." 


    그날 밤, 시차로 잠을 못잤다. 눈을 뜬 채 여러 생각을 하다가 옛 생각에 빠져들었다.  오빠의  혼수상태, 뇌사판정,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졌던 5 년 전 6 월의 기억이 담박 나의 마음을 채워버렸다.  


    날씨가 내내 화창하고 맑았지. 여의도 성모병원 중환자실 면회시간, 복도에서 같이 기다리던 이름모르던 환자 가족들. 통성명 인사가 없어도 매일 같은 시간에 보면서 친근하게 느껴졌던 그들... 중환자실을 지키는 '수문장' 아저씨. 검은 테의 안경에 단정한 용모의 그에게 환자의 이름이 달린 명찰을 받아야 그 문을 통과할 수 있었어. 그의 글씨체는 얼굴마냥 단정했지....


    병원 건물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미소'와 '웃음.' 다 어두운 얼굴들... 아, 한번 크게 웃은 적이 있었다. 커피를 마시던 일층 휴게실의  '재활용' 과 ' '음식물 쓰레기' 로 분리가 되어 있던 쓰레기통. '한국에서는 분리수거를 참 철저히 한다'고 자랑스러워하면서 쓰레기 버릴 때마다 조심스럽게 분리했는데...어느날 오후 직원이 찬장같은 쓰레기 통을 열고 쓰레기 봉지를 비울 때 경악했다.  위로는 구멍이 두 개가 있어서 분리수거처럼 보이게 되어 있었으나, 그 두 구멍으로 들어가는 쓰레기들은 전부 엄청 큰, 하나의 쓰레기 봉지에 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 '아니, 저 쓰레기통, 뭐야?' 라고 하니 친구가 '그냥 그런 거지 뭐' 해서 하하하하 웃었지.


    그 의사...참 나빠.  그가 오빠가 뇌사 상태라는 통고를 한 것은  중환자실 복/도/에서였어. 우리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오빠가 살아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그는 마치 지나치는 이웃에게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하듯이, 예의나 따뜻함이 없이 '뇌사이십니다' 라고 간단히 이야기하고는 세 명의 다른 젊은 의사들과 휭~ 하니 사라져버렸지. '안타깝게도' 란 말 한마디를 형식적으로라도 넣어줬더라면 얼마나 좋아? 오빠의 죽음 자체만큼 나를 경악시켰던 그의 무례함과 매정함. 의사로서의 직업의식의 결여, 그게 한국에서는 정상인가? 아니면 그 의사만 그런 건가? 그날 엘리베이터를 타니 벽에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사진과 그가 환자들과 소통하는 훌륭한 의사라는 거짓말 '찌라시'가 붙어 있었어. 그거 정말 찢고 싶더라....찢었으면 내가 좀 속이 시원해졌을까? 


    내가 잠을 못 이루면서 뒤척이는데 여명에 에릭의 얼굴의 씰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뜨고 있었다.


    "안 자?"


    그도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던지 뜬금없이 대답했다.


    "신주, 말대로 부모님 앞에서 울지 않았어근데 너랑 같이 있을 울지도 몰라."


    "울어~~ 울어~~! 당신 울라고 내가 온 거야!"



    다음 날 병원에 갔다. 그해 서울의 6 월처럼, 날씨가 아름다웠다. 에릭과 나 슬픈 미션이랑 아랑곳없이 하늘이 푸르렀고, 초록 내음이 짙었다. 푸르른 들판에서 평온하게 풀을 뜯고 있는 , , 을 보면서 한참 달려 병원에 도착했다. 그렇게 목가적인 전원 속에 큰 병원이 존재한다는 게 생소했다.


    티에리의 부인, 도미니크가 우리를 맞이했다. 수척한 얼굴이지만 우리를 보고 무척 반가워했다.


    티에리는 눈을 감은채, 이름모른 여러 튜브에 감겨서 거친 숨을 쉬고 있었다. 하얀 면 시트는 그의 건장한 어깨와 커다란 발을 다 가리지 못했다. 퉁퉁 부은 그의 손을 만지면서 갑자기 중환자실에서 오빠의 손을 어루만지던 생각이 났다. 나는 잠시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중환자실의 오빠의 기억과 싸웠다.  그리고 퇴치했다. 


    테리에게 집중했다.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을 부드럽게 만지면서 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에릭이 어지럽다고 했다. 돌아보니 얼굴이 새하얗다. 쓰러질 것같다고 해서 얼른 의자에 앉혔다.


    "에릭, 나가 있어. 괜찮아. 나가도 돼."


    형의 침대에 머리를 묻은 채 에릭이 고개를 젖는다. 같이 있겠단다.


    나는 티에리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했다. 병실을 내리 누르고 있는 침묵, 그리고 이름모를 기계들의 아우성과 싸우기 위해서라도 뭔가 이야기를 해야했다. 불어로 이야기해야하는 게 힘겨웠다. 한번도 이런 상황에서 불어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티에리, 많이 힘들지? 많이 놀랐지? 그럴 거야. 그러나 당신은 지금 아주 잘하고 있어.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지금처럼 당신이 하는 일에만 집중해. 


    티에리, 당신이 나에게는 항상 큰오빠야. 한국 오빠처럼. 항상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오빠. 우리한테 내내 잘해줘서 고마워.  당신이 해준 치킨 스프랑 시금치 파스타는 정말 맛있었어. 우리가 올 때마다 당신 집에서 머물게 해줘서 고마워. 매번 너무도 아름다운 기억이 남아 있어.


    나랑 친구들이랑 당신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어. 하나님을 믿건 안 믿건 중요하지 않아. 우리는 그냥 당신을 위해 기도할 따름이야. 캘리포니아에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팬클럽이 있다는 거 아시고 기운 내서 싸워요.


    티에리, 에릭이 형제 중에서 당신만 미국에 온 적이 없다면서 울었었어. 그러니까 약속해줘야. 어서 나아서 우리집에 놀러오기로. 당신은 용감한 군인이었잖아요? 이제 당신을 위해서 싸워요. 당신은 용사야. 싸워요! 우리가 응원할께요."


    나는 미리 써두었던 카드를 티에리에게 남겨놓았다. 언젠가 깨어나서 읽기를 바라면서 쓴 편지였다. 내가 한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이었다.  감사한다는 말과, 우리 모두가 응원하니 잘 이겨내시라는 말, 그리고 어서 빨리 나아서 캘리포니아에 와서 형을 모시지 못했다고 슬퍼하는 에릭의 한을 풀어달라는 말로 마무리 지었다.


    에릭은 그날 밤에도 울었고, 다음날 밤에도 울었다많이. 그도 오빠 생각을 했는지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오빠를 떠나보낼 때 얼마나 힘들었겠어. 중환자실의 신열의 모습 보면서 얼마나 힘들었겠어. 당신이 서울서 장례를 혼자 치루고 오게 해서 미안해."


    "무슨 소리야. 나는 당신이 그때 아이들 지켜준 것만해도 너무 고마워. 내가 오빠 가시는 길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줬잖아. 고마워."


    에릭을 남겨두고 먼저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벨기에에서 일정이 너무도 빡빡하고 잠을 제대로 못자서 캘리포니아에 돌아와서 시차 적응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마음의 적응은 필요했다. 새로운 애도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오빠의 기억.  이제까지 아픈 기억들을 조심스레 주어 담아서 예쁘게 보관해왔던 마음속의 도자기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깨져버렸다. 부서진 파편들이, 2013 년 6 월의 그 잔인한 경험의 기억의 편린이  마음을 찢었다. 아버지 병수발을 들자니 내색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았다.


    몇 주 후, 티에리가 살아났다.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온 식구들이 기뻐했다


    바로 그 며칠 전에 전화로 '나는 네가 얼마나 힘든지 알겠다. 너도 같은 경험을 했잖아.." 했던 시어머니가 기쁨에 차서 "티에리가 눈을 떴어. 말을 했어. 마치 잠을 깨고 난 뒤에 이야기하듯이!  오, 정말 나는 너무 기뻐!" 라고 했다. 같이 기뻐하면서 동시에 갑자기 외로움이 느껴졌다. 이제까지 동병상련하던 어머니를 잃어버린 것같아서였다. 


    '우리 오빠는 영영 안 돌아오는데....'


    동시에 나는 티에리가 살아돌아온 게 너무도 기뻤다. 부모님께 그 소식을 전하니 두 분이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 


    "와, 다행이구나!! 다행이다! 티에리가 일어났구나!"


    그리고 엄마는 나와 같은 소리를 했다.


    "아, 정말부럽구나. 우리 신열이도 티에리처럼 살아났다면.....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의 마음이 내 마음이었다. 나는 티에리가 살아나서 너무 기뻤다. 단지 기뻐하면서도 내 마음 한쪽이 아팠다. 엄마는 죽은 자신의 아들을 그리워했다. 나도 거들었다. 그러나 그런데 엄마의 다음 말이 또한 나의 마음이었다.


    "너의 시어머니는 정말 행복하시겠구나. 아들이 죽냐마냐하는 상황에 놓여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힘든지 알지. 그런데 아들이 살아났다니. 너희 어머니는 앞으로 매사에 감사하면서 살게 되실 거야. 아유...생각해봐. 사경을 헤매던 아들이 살아왔으니...얼마나 좋을까. 정말 다행이다."


    엄마는 자신의 아픔의 기억이 생생하지만 시어머니의 기쁨을 같이 하고 있었다. 바로 내가 그러했듯이.


    그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오지 못한 나의 오빠의 기억에 생생하여 내 마음이 아팠으나, 그 아픔은 티에리가 깨어난 것에 대한 나의 기쁨을 압도하거나 방해하지 않았다. 아니, 상실의 슬픔을 알기에 그 누군가가 나와 같은 아픔에서 면제된다는 사실이 더 크게 보이고 더 감사하게 느껴졌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신열이도 티에리처럼 살아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부러워하지만 자신의 아들의 

    죽음에 연연하면서 남의 아들의 기사회생을 질투하기보다는, 자신의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는 다른 엄마를 축하하는 마음이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아픔과 기쁨이라는 두 가지의 상반된 감정이, 하나가 다른 한쪽을 지배하거나, 영향을 주지 않고 편안하게 병존하는 이상한 마음... 그 모순이 내가 앞으로 평생 가지고 마음의 상태라는 것을.  아마도 나는 남의 기쁜 일---특히 생명의 탄생이나 큰 병에서의 회복--에  진심으로  축하하지만,  동시에 나는  마음 구석에 항상 꺼지지 않는 불처럼 존재하는 아픔을 의식할 것이다. 그러나---이게 어쩌면 가장 큰 자각일지도 모르겠는데---그럼에도 나는 남을 위해서 더 많이 기뻐할 수 있으리라. 아픔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기에 나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을 위해 축하할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런 모순이 가능한지 나는 모르겠다. 나의 고통의 경험 덕에 내 마음이 한뼘 더 넓어진건가? 


    어제 (4월 22일)  티에리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헬로우, 신주, 에릭,


    이제 나는 너희들한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어.  


    내가 몽-고딘 병원의 재활치료 센터에서 치료를 받은 지 4 주가 되었네. 물리치료사들과 작업훈련사들의 노력과 지지 덕에 나는 점차적으로 자율성을 되찾아가고 있어. 나는 아주 기초적인 행위들--예를 들어 걷는 것과 양치, 세수, 목욕--을 다시 배우고 있지. 그러나 의사들과 도우미들은 우리가 함께 이룬 진전에 대해 아주 긍정적이며 내가 '올바른 길을 잘 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만장일치의 견해야. 


    나의 재활치료는 아주 오래 걸릴 것이지만 매주 의료진이 내리는 평가는 아주 긍정적이란다. 나는 이번 주 일요일 오전 10 시부터 저녁 7 시까지 집에 가서 지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어. 물론 조심을 해야하고. 이런 식의 외출은 내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야.


    나에게 일어난 이 위험하고 설명할 수 없는 사고--이것은 우리 가족의 엄청난 연대의식을 보여줬어. 에릭과 신주, 너희 둘이 당장 로스엔젤레스에서부터 날아옸다는 사실에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어. 나는 나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너희들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한단다. 도미니크 (티에리의 부인)과 나는 또한 너희들이 준 카드와 보조에 대해서도 깊이 감사해. 그래, 언젠가 내가 완쾌되면 캘리포니아를 방문할께.


    지금까지 손자 손녀들, 부모님, 형제 자매와 배우자들, 이모님들과 조카들의 연대와 도움은 나를 지탱해주고 있어. 이렇게 사랑이 많은 가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 손녀 샤를롯, 손자 띠두완과 레오나르가 그려준 그림은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아르뛰르가 나를 위해 만들어주는 샌드위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샌드위치야. 아, 이제 그만해야지. 내가 나의 이 새로운 모험의 이야기를 하자면 책 한 권도 쓸 것같구나. 


    신주, 너의 부모님께 나와 도미니크의 인사를 전해다오. 부모님이 건강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너의 부모님은 받으실 자격이 있는 분들이셔. 에릭과 함께 잘 모셔드리려무나.


    에밀과꼴렛에게도 우리의 키스를 전해주렴. 

    모든 일들이 다 잘 되가기를 기원하면서...


    티에리"



    나는 마치 돌아가신 신열이 오빠로부터 편지를 받은 듯이 흥분했다. 에릭에게


     '에릭, 여기 와봐! 이거 봐, 이거 봐! 테리가 쓴 거야!' 라고 외쳤고, 읽고 또 읽었다. 너무도 반가웠다. 


    그런데 편지를 읽고 나서 갑자기 신열이 오빠 생각이 났다. 그리웠다. 눈을 뜨고 튜브와 기계들에서 벗어나 걷기 시작한 티에리의 기적에 경이로운데, 나의 오빠는 그 기계들 속에서 고요히 눈을 감지 않았는가...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눈물도 났다. 그러다가 바로 한 달 전에 죽냐마냐했던 티에리가 살아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다니, 새삼 감사했다. 내 오빠가 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자 손녀의 그림과 샌드위치를 감사하고 가족들의 사랑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감사하는 티에리가 참 곱다는 생각을 했다. 한달 전에 가쁜 숨을 쉬던 그가 일상으로 돌아가 삶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왔다. 기뻤다.  


    이러한 모순적 감정이 편안하게 들쑥날쑥, 오르락내리락, 왔다갔다한다.  

    죽음에서 살아난 티에리를 축하하고, 죽음으로 사라진 오빠를 그리워하는 내 마음의 모순을 인정하니 내 마음은 편하다.




    (20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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