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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겁쟁이' 아버지가 그립구나
    부모님 이야기 2018. 11. 16. 11:35



    아버지가 가시고 수발이 임무가 끝났다.

    새로운 시작이다.



    엄마와 집을 떠나 단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처음 며칠은 나에게 갑자기 주어진 많은 시간이 익숙지않았다.

    특히 내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게 너무도 큰 호사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며칠 후 서서히 나의 특기, 버릇, 고질병인 멍때리기가  시작되었다.


    뜬금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내가 아버지께 반항했던 십대 때 생각을 한다.


    난 아버지랑 1 년간 말을 안했다.

    완전 투명인간처럼 무시했다.

    엄마도 아버지도 그런 나를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당시 아버지는 50 대 초반.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였다.


    그 후 거의 40 년간 아버지랑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아버지란 사람이 얼마나 섬세하고 감정 표현에 얼마나 서투른지 알게 되었고

    당시 틴에이저인 내가 차갑고 모질다 여겼던 아버지의 표정은

    아버지가 힘에 겨워한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책임,

    삶에 대한 막연하거나 구체적인 공포를

    애써 감추느라 굳은 얼굴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평생 삶에 대해 어쩔줄 모르면서 사신 분이었다. 그저 공부 뿐이 몰랐으니..

    사춘기 때의 나는 그런  아버지가 무능력하고  이기적이라고 느꼈고 

    내가 그런 그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대화거부로 보여준 것이다.


    지금 당시 아버지 나이를 넘어 50 대 후반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나에게 푸대접을 받던 50 대 초반의 아버지가 어린 나이였음이 보인다.

    그리고 당시의 아버지가  뱃짱도, 자신감도 없었다는 것이 나의 손바닥처럼 훤히 보인다..

     뱃짱이 두둑, 자신감도 팽팽했던 딸과 너무도 달랐던 겁쟁이 아버지.


    폭력적이지 않은 부모와 싸우는 아이는 항상 승리하기 마련이다.

    그저 부모에게 상처만 주면 되니까.

     그리고 아이가 부모 상처주기는 쉬운 죽먹기.

    겁쟁이 아버지는 굳은 표정으로 조용히 나의 박대를 감수했고

     그렇게 그는 매일매일 나에게 지고 살았다..  

    내 맘이 풀릴 때까지 아버지를 괴롭히고

    내 마음이 스스로 누그러워진 어느날 일방적인 냉전을 끝냈다.


    아버지는 어땠을까?

    그리도 예뻐하던 막내가 그렇게 모질게 굴었으니.

    딸이 자기를 인간취급하지 않는 식탁에서 밥을 드시면서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를 투명인간 대접하는 막내의 무시를 알면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의 기분은 어땠을까?

    가만히 생각한다.


    어리고 어리석었던 나.

    당시 나의 큰 뱃짱과 자신감이

    바로 아버지가 어려서부터 나를 사랑해주고 보호해준 결과임을 모르고

    자신의 두려움을 꾹꾹 누르고 치열히 살았던 

    겁쟁이 아버지한테 모질게한 것이다.


    그러나 부질없는 상념은 접자.

    아버지는 과거에 연연하는 사고방식을 거부하셨다. 

    내가 옛날 감정들의 조그만 파편을 자세히 살피면서 혼자 아파하고 미안해하는 것을

    아버지가 원하지 않으실 것이 분명하다.


    "신주야, 왜 그런 생각을 하니!"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냉전이 끝난 후 아버지는 그후 내내 나를 격려해주셨고 사랑해주셨고,

    나는 나대로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잘 알게 된 겁쟁이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 상처는 주고받았지만, 

    어쩌면 그렇게 상처 주고받는 게 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냉전기는

    겁쟁이 아버지와 당돌한 막내딸이 서로를 인정하고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었으니까.

    아버지도 나도 서로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더 좋은 친구가 되는 과정이었으니까.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좋은 친구가 되었으니까

    아버지 수발 드는 것이 쉬웠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편안히 침대에 누워

    아무 무늬도 없는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하릴없이 발을 꼼지락 거리며 

    겁쟁이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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