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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 그까짓 거.
    부모님 이야기 2018. 11. 14. 05:44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나 나는

    죽음이 너무 자연스러워 충격을 받았다.

    숨을 들이쉬었다 내 쉬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한번 내신 숨이 그냥 멈춘 것이었다.

    삶에서 죽음으로의 전이가

    마치 얕은 시냇물에 사이가 멀지 않게 놓여진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인양 쉽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죽음과 삶이라는 엄청난 분리가 이렇게 간단하다니....


    며칠 후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나는 이전에 찍었던 엄마 아버지 사진을 보았다.

    잠시 멈칫했다.

    아바지가 돌아가신 뒤에 찍은 사진과 아주 비슷하여서이다.

    아버지의 죽음 전이나, 죽음 후나.

    엄마 아버지의 모습이 한결같았다.

    엄마의 옷과 아버지가 덮으신 담요 색깔만 달랐다.




    왼쪽은 1 년 전 겨울,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엄마가 아버지 옆에서 책을 읽어드릴 때 직은 사진이다.

    아버지가 편히 누워 계실 때 엄마는 아버지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뉴스를 읽어드리거나 책을 읽어 드렸다. 

    나에게 익숙한 광경이다.

     

    오른쪽 사진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2 시간 후 내가 간호사와 면담을 하던 중

    열려 있던 아버지 방의 문을 통해 엄마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찍은 것이다.

    이 익숙한 광경을 다시는 못보겠지 하면서...


    엄마는 평생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를 지켰다.

    그래서 아버지의 산소마스크, 아버지의 지팡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공부 말고는 모든 일에 서툰 아버지를 위해 엄마는 집안의 모든 일을 담당했고

    아버지가 당뇨를 얻으신 40 대 중반부터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시기까지

    매일 등산, 철저한 건강식, 정기 검진등을 하여 아버지 건강을 유지해드렸다.


     아버지가 몸이 불편해지신 뒤

    엄마는 지난 3 년간 아버지와 한 방에서 아버지를 지켰다.

    새벽 5 시 경 아버지 혈당검사를 시작으로 인슐린, 아침식사, 산책---으로 이어지는 매일매일의 일정을 감당했다.

    밤에 아버지가 심하게 기침하거나 어딘가 편찮으면 

    엄마는 잠에 취한 상태에서도 일어나 아버지를 돌봤다.

    (엄마가 현재 85 세의 연세임을 고려하면 쉽지 않은 일이다)

    아버지는 그게 미안해서 어떻게든 불편함을 참아보려고 애썼고,

    평생 이른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던 습관 덕에 이른 새벽에 눈이 떠져 정신이 말짱하나

    몸을 뒤척일 수조차 없는 아버지는 미안해서 차마 엄마를 깨우지 못하고

    깜깜한 방에서 외로움과 어두운 생각과 싸우다가

    너무 너무 힘들면 

    "여보..." 하고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즉각 일어나 아버지의 동무가 되어 드렸다.


    엄마는 내내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언제 죽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대건씨를 끝까지 돌볼 수 있게 해주세요."


    그 기도를 들을 때마다 아버지는 고마워하시고 마음을 놓으셨다.


    "당신 없으면 난 하루도 못살아."


    엄마는 밝게 말했다.


    "그래서 제가 열심히 기도하는 거에요.

    당신 뒤에 가게 해달라고.

    주님이 허락하시는 한, 제가 당신 지켜드릴께요."


    두 분은 자주 (이 딸 앞에서 염치도 없이!!)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이야기했다.

    엄마는 죽으면 5 년 전 먼저 간 아들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라 했고,

    아버지는 9 살 때 세상을 떠나신 당신의 어머니가 너무 보고싶다고 했다.

    그리고나선 할아버지, 남동생, 누나, 여동생, 언니,....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싶은 사람들---

    다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도 즐겁게, 오래오래 나눴다.


    엄마 아버지는 '죽고 싶어하는 사람들' '당장 죽을 준비가 된 사람들' 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현재의 삶에 아주 충실한 그런 긍정적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


    부모님의 긍정적인 태도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아버지가 우울함에 찌들어

    "이제 난 다 살았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

    책도 못읽고, 밥도 혼자 못먹고,

    기저귀를 남이 갈아줘야하는 이런 상태에서 더 살아서 뭐하냐..." 

    라고 하셨다면 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마가 우울함에 찌들어

    "이게 뭐냐. 고향에도 못가고. 언어가 안 통하는 미국에서 유배신세니.

    평생 아버지 모시느라 고생했는데 

    이젠 더 힘든 일만 남았구나." 

    라고 하셨다면 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부모님의 긍정적인 마인드 사소한 것에서 표현되었다.

    아버지의 경우,

     몸을 쓸 수 없이 굽은 팔을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릴 수 있는 아버지는

    '나비야, 나비야' 노래의 율동에 비슷한, 

    즉, 손 씻고 나서 묻은 물을 터는 것과 비슷한 동작의 운동을 했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동작이었고, 팔 힘이 없는 아버지께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손천장을 보고 누운 상태에서 조용히 열심히 그 운동을 하셨다.

    그래야 몸이 조금이라도 덜 퇴화돌 거라고.

    그래야 딸이 덜 힘들거라고...


    엄마도 마찬가지. 

    아무리 피곤한 날이라도 엄마는 매일 매일 런닝머신에서 20 분간 걸었다. 

    굳은 몸, 휘청이는 균형을 고치기 위해

    스트레칭 간단한 요가 동작을 열심히 했다. 

    너무 피곤하니 웬만한 사람이면 그냥 누워버릴텐데

    엄마는 운동을 하기 위해 머리를 매만지면서 일어나곤 했다.

    "내가 건강을 유지해야 신주를 도와줄 수 있지."

    라고 하시며.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영어 공부를 하고 단어를 외우는 것은 덤,

    엄마는 하루 매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했다.


    부모님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걱정 대신,

    불구가 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 대신에,

    불구가 된 남편을 24 시간 돌봐야하는 처지를 한탄하는 대신에,

    남아 있는 삶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잘 살기 위해 노력했다.

    죽음이란 괴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괴물을 순하게 길들여버렸다.

    그리곤 죽음 이후의 계획에 바빴다.

    당장 내일 죽어도 좋겠다, 그렇다,

    당신 먼저 죽고, 내가 죽자, 그러면 좋겠다,

    깨끗하게 죽어서 아이들에게 폐가 안되었으면 좋겠다, 

    죽으면 뭐가 제일 하고 싶냐...


    마치 기차타고 춘천가면 뭐 먼저 하고 싶은가 이야기 나누는 것같았다.


    바삐 부모님 방을 들낙날락하면서 일을 하던 나는

    엄마가 아버지 침대 옆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책을 읽어드리는 

    평화로운 모습에 안도감과 행복감을 느끼곤 했다.

    그 평화가 많은 노력 뒤에 얻어진 것이고

    침대 밑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이란 괴물이 언제 그 평화를 갈기갈기 찢어버릴지도 모르기에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부모님도 그걸 알고 계셨고,

    "이 순간이 그리울 거에요" 란 이야기까지 하면서

    두분만의 시간을 즐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엄마는 슬픔에 빠졌다.

    두분이 너무도 많이 상상하고 생각하고 마음으로 예행연습까지 했던 그런 죽음이 닥친 것이었다.


    엄마는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한대로,

    그리고 아버지께 약속한대로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를 지켰다.


    살아계셨을 때 이야기를 하고 책을 읽어드렸다면

    돌아가신 뒤에는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면서

    영혼이 떠난 아버지의 육체를 지켰고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영혼과 함께했다.

    죽음의 가상 시나리오를 수백번 쓰면서 연습을 한 부부에게

    죽음은 아프지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울면서 담담히,

    슬퍼하면서 평화롭게

    엄마는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나

    엄마와 아버지의 모습은 한결같았다.

    평화였다.


    죽음이 무너뜨리지 못한

    엄마와 아버지의 한결같은 평화의 모습을 보며

    나는 죽음과 삶의 경계가 아무 것도 아닌 것임을 확인한다.


    아버지는 죽음으로써, 

    어머니는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통해서 보여줬다.

    인간을 공포과 절망에 빠뜨리려하는 죽음이란 괴물이

    무너뜨리고 지배할 수 없는 내면의 평화와 확신,

    죽음 속에는 죽음이 파괴할 수 없는 생명이 있다.


    작은 징검다리 하나가 삶과 죽음을 나눌 따름,

    숨 한번이 죽음과 삶을 나누는 것일 따름,

    그렇게 간단한 것이고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임을

    나는 편안히 받아들인다.


    죽음, 

    그까짓 것..

    좀 있으면 

    우리도 다시 들이키지 않을 숨 한번 크게 내쉬고

    가볍게 뛰어 그 징검다리를 건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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