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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슴도치 엄마의 그림 그리기
    카테고리 없음 2023. 7. 31. 08:47

     
     
    여행을 잘 마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번은 틈틈이 그림을 그려서 더 특별했던 여행. 휴대하기 쉬운 펜과 작은 수채화 팔레트를 들고 가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을 그리거나, 그림을 그릴 수 없이 바쁠 때도 그림을 그리는 마음으로 주변을 관찰하였던, 그런 '그림 여행'이었습니다.

    문구류를 무척 좋아하는 저에게는 꼭 그림을 그리지 않더라도 펜과 종이가 항상 옆에 있어 끄적거릴 수 있다는 것이 든든하고 유쾌했습니다. 질감, 촉감, 색깔이 미세하게 다른 종이들을 손으로 만지고, 삭-삭- 팬소리를 들으며 그림을 그리고, 그림 공책을 품에 안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고, 그림을 그린 뒤에 찬찬히 살펴보며 쓰다듬고... 그렇게 종이와 펜과 붓과 맺은 '육체적 관계'가 행복했습니다. 

    그리면서 '왜 내가 원하는 색이 안 나올까?' '어떻게 하면 선이 자연스럽게 될까?' '아, 좀 공부하고 시작할걸...' 등등의 생각도 들었지만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새로운 시도가 주는 설렘, 몰입, 정적이 주는 만족감이 여타 부정적 생각을 압도했기 때문이지요.

    돌아와서 대략 한 달간 그린 그림들을 시간적 순서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림의 시작은 6 월 마지막 주에 그린 독일의 마을 정경. 독일의 혜지언니가 자전거 여행 하면서 보내준 사진 중 한 마을 사진의 아름다움에 감동받아 그렸어요. 일주일 뒤 여행을 떠났고, 몬트리올에서 그린 첫 그림이 7 월 3 일, 여행 끝나고 돌아와 집에서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들이 7 월 28 일. 한 달여 동안 총 18 장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여행 기간 동안 찍은 수많은 사진들에 비하면 정말 몇 개 안 되는 그림들. 그러나 집중해서 그렸고, 스토리들이 있기에, 그 많은 사진들을 다 합한 것보다 더 강렬한 기억의 보고들이지요.

    이미 대부분 블로그에 올렸지만 시간적 순서로 그림을 모아보면:

     
    위 그림들에 독일 마을 풍경과 여행 끝나고 나서 그린 두 개의 그림을 합하면 도합 18 개.

     
    그림들을 한데 모아보니까 초기에 그린 그림들과 비교해 마지막 날 그린 두 장의 그림의 차이가 확연했어요.  6 월 말의 첫 펜화 (독일의 한 마을 정경)과 7 월 28 일에 그린 펜화 (몬트리올의 꽃가게)를 한번 같이 놓아볼게요.
     

     

     
     
    첫 그림은 '덜덜 떨면서' 그린 게 드러나지요?  구도, 원근법. 디테일 살리기, 전체적으로 다 실패하고 포기한 그림이었어요. 사진을 보면서 그리다가 잘 안 돼서 모르겠다~ 하고 어떤 건물들은 삭제해 버리고, 간신히 골격만 끝마친 뒤 녹색 마커로 찍찍 그어서 색깔 넣었어요.

    그러나 이 그림 끝마치고 나서 참 별 볼 일 없는 그림인지를 알면서도 저는 아주 만족했고 마음이 그림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찼습니다. 잘 그렸냐, 못 그렸냐의 가치 기준이 아니라, '그렸다!'라는 사실에서 오는 만족감. 또한 이 그림을 보면 언니로부터 들었던 자전거 여행 이야기---어디를 갔고, 뭘 먹었고, 어디서 비를 피했고, 밤에는 무슨 책을 읽었고, 형부가 어떻게 커피를 내렸고....---가 다 떠오른답니다. 사진 수십 장에 담겨있던 이야기와 기억이 이 누추한 그림 한 장에 다 집약되어 있는 거지요. 그래서 고슴도치 엄마가 고슴도치 딸을 사랑하듯이 펜화로서 첫 아이인 이 아기를 낳자마자 사랑에 빠졌고 아직도 사랑합니다.

    바로 밑의 그림은 한 달 후 그린 몬트리올의 꽃집이에요. 실제의 꽃집의 아름다움에서는 동떨어진 그림이고, 여전히 선이 불안정하고, 그리는 내내 약간의 회의감이 들었지만, 종이와 펜과의 육체적 관계가 주는 즐거움이 너무도 컸고, 가끔씩 펜을 놀리고 색을 넣을 때 이제까지는 좀 과감해진 스스로를 발견했어요.  또한 유난히 날씨가 좋았던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 햇살을 받으며 꽃집을 열 채비에 분주한 아줌마와 화초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던 그 짧은 순간을 사진으로 담았던 건데 그림을 그리는 내내 그 순간을 연장해서 즐길 수 있음이 행복했어요. 얘 또한 스토리가 있는 소중한 자식. 고슴도치에게는 첫 딸이나 막내딸이다 다 사랑스러운 법, 얘도 전 사랑해요.
     
     
    수채화 두 장을 보여드릴게요.  

    둘 중, 위의 그림은  7 월 5 일,  퀘백시 맞은편의 Levis 시에 머물 때 쌩로랑 강 건너의 붸백시를 바라보면서 그렸던 거예요. 아주 못그린 그림이지요. 그리면서 아우...왜 이리 안되냐..... 혼잣소리를 했었어요.  그러나 아침 햇살을 즐기며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 주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했고 결과야 어떻든  뭔가 그렸다는 성취감이 컸어요. 그날 아침 제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남편이 자신을 찍었는데, 사진 마다 제가 배시시 웃고 있어요. 또 고슴도치 엄마의 행복 스토리. 

    그 밑의 그림은 7 월 28 일 그린 퀘벡 시 야경. 위의 첫 수채화를 그렸던 장소에서 밤에 찍은 사진을 보고 그린 거예요. 남편과 저와 딸은 매일 밤 저녁 식사 후에 베란다에 앉아 생로랭 강 너머에 반짝반짝 빛나는 퀘백시를 바라보며 감탄했었어요. 저는 속으로 '아... 이 야경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할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갑자기 한번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는 내내 붓이 '독립만세!' 외치면서 자기 멋대로 놀고, 원하는 색이 안 나와서 붓으로 칠했다가 깜짝 놀라서 티슈로 닦아내는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느긋한 마음으로 여유 있게 그렸어요. 이제까지 경험으로 제가 아는 게 있어서예요. 다시 그릴 수 있으니까... 또 그리면 되니까.... 그릴 건 많으니까..... 그리고 뭘 그리든, 그걸 사랑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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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이번에 그림을 그리면서 얻은 게 무엇인가 생각하면 '해방감'인 것 같아요. 아크릴화를 처음 시도하면서도 느꼈던 건데, 이번에 펜화/수채화라는 새로운 시도를 통해서 다시금 경험하게 되었어요. 

    초반에 그림을 그릴 때는 의식의 한 구석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큼직한 두 덩어리의 감정---"이거... 비슷하게 그려야 한다. 어떻게 하면 비슷하게 그리지?"라는 강박관념과 "잘 그리고 싶다. 보기 좋게 그리고 싶다"라는 욕심이 있었고 저의 실력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기대와 어쭙잖은 완벽주의가 그림 그리기를 온전히 즐기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의식이 압도적이기는커녕, 과연 존재하나 싶을 정도예요. 강박관념과 욕망에서 해방되어 그리는 순간에 몰입하기 때문이지요.  어떤 경치의 기억,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감흥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려고 노력하고, 기억을 즐기고, 그리는 시간을 즐기다 보니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아요.  

    또한 부족하고 모자라는 게 눈으로 뻔히 보이는데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각자의 스토리를 갖고 있는 제 고슴도치 베이비들을 계속 만나게 되면서 깨달았어요. 내가  그림을 어떻게 그려내던지 나는 만족하고, 내 베이비들이 어떤 형색이든 나는 사랑하는구나... 그러니 저절로 느긋해지는 것 같아요. 

    그 여유, 스스로에 넉넉한 마음이 이번 그림 그리기 여행의 가장 큰 소득이에요. 저는 저에게도 '고슴도치 엄마'가 되어버렸네요. 부족한 스스로를 계속 대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으니까. 

    그림 그리기에서 배운 대로 앞으로도 넉넉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좀 '봐주면서' 살아야겠다 마음먹습니다. 소중한 하루하루, 뭔가 항상 배우려고 노력할 테지만 목표, 결과에 연연하는 투쟁적 태도는 버리려고요. (이건 60 년대에 태어난 유신 세대의 고질병인데, 그게 '열정'과 혼돈이 되어 저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때가 있어요. 남편이 저를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곤 하지요.)

    삶도 그림 그리기처럼 살아보려고요. 과정이 행복이고 결과가 사랑인 그림 그리기처럼... 사랑과 행복을 뛰어넘을 만큼 큰 삶의 의미가 어디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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