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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러셀 일지 8: 며느리의 자리
    카테고리 없음 2023. 4. 4. 21:45

     
    구석에서 시댁 식구들의 논의 과정을 바라보고 있는데 서서히 일말의 소외감이 느껴졌다.  시댁 식구들의 책임은 아니었다. 그들이 내 감정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앞서 서술한 실용주의적 사고로 감정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었기에...

    그러나 나의 소외감은 단순히 시댁 식구 들과 감정의 코드, 문화 코드가 달라서 느껴지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것은 며느리의 소외감이었다.

    사실  '며느리로서의 소외감’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시댁 식구들과 나의 관계는 좋다. 시댁 식구들은 내내 나를 인정해 주고, 아껴주었으며 한 번도 나를 의식적으로 배척하거나 제외하지는 않았다. 장례 절차를 논의하는 그 순간에도  그들이 딱히 뭔가 잘못한 것은 없다. 되려 내가 한 식구라는 의식이 있으므로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일처리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게 정확하다. 게다가 외국에 살다가 잠시 방문한 외국인 며느리인 내가 시아버님의 장례 절차 논의에 포함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느낀 며느리로서의 소외감은 혼외자가 친자들 사이에서 느끼는 감정과 유사했다. 친부의 사랑을 받았으나 친부의 사망 뒤 법적/사회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혼외자가 애도하는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었으니까.

    나와 아버님은 아주 친했다. 그러나 시동생과 시누이를 비롯, 모든 시댁 식구들은 나와 아버님이 가깝다는 것은 알지만 얼/만/큼 가까운지는 모른다. 아마 나와 남편이 시부모님이 캘리포니아에 오시면 잘 모셔드린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것이다. 아버님과 나는 '스킨십'이 편한, 말이 잘 통하는 사람들이다. 스킨십이라 하면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아버님을 이발, 면도, 안마해 드리는 것이지만.. 아버님이 건강하실 때 우리 집에 놀러 오시면 이발과 두피 마사지를 해드리는 것으로 자연스레 시작한 스킨십은 아버님이 거동이 불편해지신 뒤로는 아버님을 뵐 때마다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아버님의 머리, 어깨, 팔, 손, 다리, 발을 마사지 몇 시간 동안 해드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 마사지 시간은 아버님과의 소중한 대화의 시간이었다. 평소 '귀가 안 들린다, 말을 못 알아듣겠다, 사람들이 많으면 소란해서 귀가 아프다...' 라며 사람들과 대화의 담을 쌓고 계시던 아버님은 나와 이야기를 할 때는 수다의 봇물이 터져서 몇 시간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항상 웃음을 달고 사는 나를 보면 무뚝뚝한 아버님도 거울 효과인지 미소를 띠곤 하셨다.

    우리가 격렬하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남편은 '아버니 몸을 당신처럼 편하게 만지는 사람은 없어' '아버지는 당신과는 말을 저렇게 많이 하시네' '아버지는 아기 때 이후로 한 번도 그렇게 다정한 마사지를 받아본 적이 없을 거야' 라며 좋아했다. 감정 표현이 자연스러운 집에서 막내로 자란 덕에 내가 좋아하는 아버님을 살갑게 대하는 게 쉬웠고, 별 거 아닌 나의 애정 표현을 감사해하는 아버님 덕에 내가 되려 행복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몇 주 전에 나를 찾으신 것이나, 내가 그러자마자 즉시 아버님께 온 것이나 다 이전에 우리가 쌓아둔 우정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아버님이 돌아가신 순간, 나와 아버님의 깊은 우정과 사랑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어버렸다. 며느리인 나는 구석에 앉아, 맘대로 눈물을 흘리지도 못하면서  시누이와 시동생의 주고받는 말을 듣기만 해야 했다. 애도 문화의 차이로 슬픔을 표현하지 않는 시댁 식구들임을 이해하면서도, 며느리로서 나의 위치는 바로 그 구석자리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당장 그 순간, 나의 눈물이, 나의 슬픔이 떳떳하게 표현될 수 없다는 사실이 내가 혼외자인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친부와의 내밀한, 깊은 사랑에도 불구하고 친부의 죽음의 순간부터는 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 사랑을 인정받지 못하고, 죽음에 대한 슬픔을 제대로 위로받지 못하는 혼외자..

    어떤 면에서는 나와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비슷하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랑이라는 면에서.

    어머니와 나는 우호적인 관계를 뛰어넘는 끈적끈적한 사랑의 관계를 누려왔다.  말없는 아들보다 수다스러운 며느리가 더 편했던 어머님은 나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안전한 금고 같은 나에게 깊은 속얘기를 다 하셨다. 내가 어머니와 친하다는 것을 시댁 식구들은 다 알고 있지만 어느 정도로 친한지는 모른다. 그것은 어머님이 평소에 형제의 우애를 위해서, 편애의 오해를 방지하고 자식과 며느리의 험담도, 칭찬도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어머님은 손자 손녀 칭찬도 안 하신다.)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챙겨드리는 게 내가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좋아서 한 일이므로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냐 마냐는 내 관심 밖이었다. 어머니가 나를 많이 아끼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작년 12 월 요양원 방문했을 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어머님은 항암 치료를 받으시면서도 기력이 있으셔서 식당에 내려가 식사를 하셨는데, 평소 손을 잡거나 포옹하는 것도 싫어하시는 어머님이 나의 손을 꼭 잡고 다니시면서 간호사, 요양보호사, 직원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얘가 나의 며느리예요. 우리를 위해서 특별히 캘리포니아에서부터 왔어요. 얘는 작가예요. 우리는 정말 이렇게 좋은 며느리를 두어서 행운이랍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깜짝 놀랐다.

    내가 '작가'라고? 어머니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옛날에는 '책 써봤자 돈이 안 되는 거 아니냐'라고 하셨던 어머니인데...

    어머니가 능동적으로 내 손을 잡으신 것도 처음이었다. '우리를 위해서 특별히 와줬다'라는 말도, 어머니가 우리의 마음을 인정해 주시는 듯해서 감동이었다. 그러나 평형성을 굳게 믿고 실천하는 어머님을 알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나쳤다.

    요양원의 부모님 방은 침대 두 개에 작은 가구 몇 개의 단출한 살림이다. 어머님은 모든 짐을 다 나눠주고 포기하시면서 그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소유하고 싶으신 중요한 사진들과 그림들 몇 점을 요양원에 갖고 오셨다. 벽에는 조상님들 사진과 가족사진들이 걸려있었다. 그런데 어머니 침대 옆에는 나와 남편의 사진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내가 만들어드린 사진첩이 있었다. (나와 남편의 사진 뒤에 조카가 그린 그림 액자가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우리를 정말 많이 아끼시는구나 싶어 감동을 느꼈으나 여전히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머님이 얼마나 자식들을 공평하게 대해오신 것을 알기 때문에 그걸 존중하기 위해서... 혹시라도 내가 어머니께 '어머님한테는 우리가 최고인가봐!'라고 생각한다는 인상을 드릴까 봐.

    그러나 '편애'를 인정한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님은 나와 남편의 사진을 가리키며  '내가 사진만 옆에 둔다고 질투할까 봐 벽에 사진들을 많이 걸었어."라고 하셨다. '000은 질투가 많아서, 걔 가족사진은 냉장고 위에 두고, 내가 깨어 있을 때 제일 많이 보는 사진이라고 했어.'라고도 하셨다.

    어머니의 그런 솔직한 애정 표현에 나는 많이 놀랐지만 동시에 그만큼 어머니가 나를 신뢰하시는구나 싶었다. 내가 결혼 이후 지금까지 '며느리로서의 자리 매김'을 꽤 정확히 해왔기에 이제까지의 나의 행동거지를 보아 내가 가족들에게 위화감을 일으키지 않을 것임을 알고 계셨기에 평소에 하지 않으시는 편파적 애정 표현을 하시는 것이리라.

    며느리의 자리매김....

    나는 처음부터 나는 내가 부모님의 며느리이지 친자식이 아니며 남편과 그의 혈족들이 돈독한 가족의 연을 맺고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어왔다.  며느리로서의 나의 자리매김은 그런 '혈족의 연'의 존중에 기초하고 있었다. 나야 딸이 부모를 섬기듯이 시부모님을 대했지만 그건 내가 좋아서 한 것일 따름,  부모님의 첫사랑인 자기 자식들과의 관계가 우선이니까.

    그래서 며느리로서의 내 역할은 항상 물밑작업이었다. 결혼 후 지금까지  부모님의 부양에 관한 모든 결정과 경제적 지원은 평소 부모님과 대화를 많이 나누는 내가 상황을 파악해서 남편에게 제의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20 년 전부터 나는 부모님께 많은 질문을 했고, 연금이 얼마며, 생활비가 어느 정도 들고, 저금을 얼마 해두었고, 어떤 걱정거리를 갖고 계시는지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은퇴 후 불안함에 빠져있던 아버님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 해도 마음이 가벼워지셨다. 가까이 사는 자식처럼 자주 찾아뵈면서 부모님을 돌봐드릴 수 없는 우리는 정기적인 경제적 보조, 여행 지원 등등 부모님께 필요한 것, 부모님께 즐거운 것을 챙겨드리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부모님께 해드리는 게 그 무엇이든 시댁에서는 그게 다 '아들' '남동생''형''삼촌'인 남편의 공로로  여겨졌다.  '흠... 어디나 가부장제도는 면면히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을 따름, 애초에 내가 인정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문제 삼지를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며느리가 알아서 자리를 매기는 것'과 '며느리의 자리가 지정되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  최근 들어 나는 '며느리로서의 지정석'을 찾아 앉는 일이 잦았다.

    한 예로, 1 년 전, 부모님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자손들이 단톡방을 만들었을 때였다. (나의 아이디어였다.) 남편이 단톡방을 만들었지만, 실제로 부모님을 가까이서 돌보는 형제, 누이가 단톡방에 소식을 올리는 식이었고, 시누이가 단톡방을 주도했다. 얼마 지나서 시누이는 자신의 두 딸을 단톡방에 포함시켰다. 사위와 며느리는 제외한 혈족들의 단톡방이었다.

    단톡방에서 뉴스를 받을 때마다 나에게 전송해 주거나 말로 전해주어야 했던 남편은  '당신이 자식들 그 누구 못지않게 부모님과 친한데, 이렇게 단톡방에서 제외되어서 미안하다'라고 했다. 그러나 며느리로서의 자리매김을 확실하게 하고 있던 나는  남편에게 '어느 가족이든 직계들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 돈독한 관계가 우선이고 거기에 며느리니 사위가 포함되는 것이니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라고 안심시켰다.

    이번에 남편 없이 벨기에에 온 뒤에도 나의 태도는 일관성 있게 ‘직계 가족의 존중’이었다. 어머님의 병실에 시누이나 시동생이 나타나면 침대 옆자리를 그들에게 양보했고, 아버님을 방문했을 때 아버님 옆자리는 당연히 시누이가 앉게 하고, 그렇게 나는 며느리로서의 나의 자리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는 시부모님을 사랑하는 며느리일 따름, 그거면 되었다. 그렇게 내가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러나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시댁 식구들과 한 방에 있으면서 내가 스스로 구석 자리를 찾아 앉았지만 그곳은 평소 내가 잘 알아서 찾아가는 '며느리의 자리'가 아니었다. 선택권이 없이 선택한 자리였다. 그 자리 말고는 아무 곳도 없기에.  

    내가 친아버지를 모시듯이 사랑하고 부양한 시아버님은 결국은 '시댁'의 아버지였다. 우리가 나눈 감정이 얼마나 깊고 아름다웠나는 영원히 묻혔다. 우리의 감정은 '진짜'였지만 나는 아버님의 '진짜' 딸이 아니었다. 쉽게 삼켜지지 않는 묵직하고 딱딱한 기분, 소외감.  며느리의 구석자리는 외로웠다.

    남편이 내 옆에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남편이 내 옆에 있어도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며느리이니까... 물밑 작업에 익숙한 며느리니까.... 부모님과 나의 관계에서 나의 위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밀한 사랑의 관계였으니까...

    뭐가 뭔지 혼돈스러웠다. 아버님의 죽음 직후 쇼크의 여진은 계속되고 있었고 나는 여기저기 흐트러져있는 슬픔의 파편 속에서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님을 제대로, 내 원대로 애도하여 그 파편들을 수습할 수 없었다.  문화의 차이, 며느리의 신분, 그 두 가지가 합해져서 나의 슬픔은 표현은커녕, 나의 애도의 방식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꿈도 꿀 수 없었다. 눈물을 흘릴 수도 없이 가슴으로 울고 있는 상황이 애통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댁 식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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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문객들이 허용되지 않는 늦은 시간이어서 엘리베이터에서 건물 밖까지 나오는 동안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다.
    문들이 닫힌 텅 빈 복도를 걸으면서 마치 공상과학 영화의 주인공 같은 기분이 들었다.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비밀부호를 입력해 요양원 문을 열고 나갔다. 

    이슬비가 살짝 내렸는지 물을 먹은 길이 반짝거렸다. 공기가 축축하고 차가웠다. 심호흡을 크게 하면서 나는 아버님이 안 계시는 세상으로 발을 내디뎠다.

    호텔까지의 직선거리의 큰길은 카페, 가게, 인파로 북적거린다. 나는 인적이 드문 샛길을 택했다.  연이어 붙어있는 건물의 문들은 굳게 닫혀있고, 커튼 뒤로 희미하게 비치는 불빛이 비칠 따름, 작은 골목들은 텅 비어있었다.  그 골목길을 정처 없이 오래 걸으면서 나는 아버님의 없는 세상에 적응하려 애썼다.

    다행히 걷는 동안 많은 생각이 정리되었다. 아버님의 죽음은 결혼 후 처음으로 큰 문화 충격을 주었다.  애도의 방법의 차이, 며느리로서의 소외감은 내가 이제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내가 능숙하게 대처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식구가 죽으면 가족이 함께 울며 애도한다'라는 단순한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상황에 던져지면서 나는 1986 년 한국을 떠난 뒤, 여행을 많이 하고, 세 가지 언어로, 세 나라에서 살아보면서 내가  어느 정도 문화의 다양성과 차이를 해석하고 적응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던 게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아버님의 죽음은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문화 충격을 가져왔다. 이전에 오빠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킨 적이 있기에 나는 죽음이 낯선 경험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이제까지의 내가 쌓아온 모든 능력이 다 사라지고 갑자기 나는 '원점'에 놓여서 마치 사전 지식 없이, 가이드 북도 없이, 언어도 모르는 채, 새로운 땅에 던져졌다. 

    길을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남편 생각을 했고, 아이들이 그리웠다. 그리고 내가 지켰던 오빠와 아버지의 임종을 다시 떠올렸다. 그들의 죽음에  엄마를 중심으로 우리 가족이 어떻게 대처했던가가 생각났다. 오빠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와 엄마가 얼마나 슬프게 애도했던가... 그들의 애도 방식은 약간 달랐지만 그 애도의 기본은 엄청난 사랑이었다. 애통함, 죽음 후의 영성에 대한 이해, 천국에 대한 소망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애도하던 우리 가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언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와 언니와 내가 한 마음으로 아파하고, 한 생각으로 장례를 추진하고,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독려했었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면서 나는  대서양을 건너 멀리 있는 엄마와 언니가 바로 옆에 존재하는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고, 그들의 생각 자체가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엄마는 지금 내 마음을 알 거야.' '언니는 내가 말하면 무슨 말인지 금방 알 거야...' '그게 우리 집 문화였어. 그게 나에게 익숙한 언어였어.'

    같은 방법으로 슬퍼하고, 같은 이유로 같이 웃고, 같은 가치관을 갖고 살아온 엄마, 아버지, 오빠, 언니를 기억하면서 나는 덜 외로워졌다. 새로운 힘이 났다.  이제까지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배워왔고, 내가 속해있고, 나를 지탱해 준 우리 가족의 문화와 사고방식들을 돌이키면서 나는 내가 누구인가, 내가 믿는 게 무엇이며,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를 다시금 확인했다. 사막에서 길을 잃은 듯한 막막함이 사라지 뭔가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다. 나의 가족--아버지, 엄마, 오빠 언니--와의 기억은 여전히 나에게 언제고 찾아갈 수 있는 따뜻한 정서적 고향이었고, 앞으로도 내가 가는 길을 인도해 줄 지도였다.

    마음이 좀 넉넉해지는 것같았다. 사람들은 다 각기 다른 방법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니, 시댁 식구들의 방식을 그대로 존중하리라. 며느리의 구석자리에서 나는 내 방식대로 사랑하는 아버님을 원없이 애도할 것이며 한없이 그리워하리라.  당장 혼자 있기에 달래어지지 않는 나의 슬픔은 나중에 엄마와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나누리라...

    늦은 시간, 호텔에 도착했다. 수위가 "봉수아~~" 하며 밝게 인사를 했다. 둘째 날 만났던 '‘아일랜드 부인을 크레테 섬에서 만났다고 하는 독일계 그리스인’ 아저씨였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를 보내셨습니까?" 하는 그의 일상적인 질문에 나는 차마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네. 브러셀은 여전히 예쁘네요. 오늘은 이 골목 저 골목  많이 걸었답니다.”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내 마음의 100 분의 1의 진실을 이야기한 셈이다. 나는 진짜 골목길 마니아니까. 그러나 나머지 99는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다.  아버님이 몇 시간 전에 돌아가셨고, 나는 애도의 문화차를 절감하고 있으며, 나의 애도의 방식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외로웠으며... 등등의 말을 저 순진하고 해맑은 표정의 아저씨에게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그와 미소를 주고받은 뒤, 내 방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아버님 죽음 직후 무표정, 무감정으로 대응했던  어머님 생각이 났다.

    내가 호텔 수위에게 어떤 말로도 위로받을 수 없음을 알기에, 그리고 그에게 감정적인 부담을 줄 수가 없음을 알기에 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듯이, 어쩌면 어머님도 그런 것이 아닐까?  온 가족의 중심으로서, 집안의 정신/정서 세계의 기둥으로서 어머님은 식구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내놓고 위로받는 것을 상상도 못 하실 수도 있겠구나.  그러므로 홀로 꾹꾹 삭이고 다스리시는 거 아닐까..

    어머님의 무반응에 적지 않게 놀랐고, 그런 반응을 나에게  강요하신다 싶어서 상처를 받았던 나는 더 이상 이 문제를 두고 생각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내가 어머니를 이해하니 더 이상 상처받을 이유가 없었다.  슬픔을 표현하지 못하는 어머님을 내가 모른 척하며 품어드리면 되는 것... 70 년지기 베스트 프렌드를 잃은 어머니의 상실을 감히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미국의 엄마와 통화했다. 엄마가 많이 우셨다. 함께 울어주는 엄마가 큰 위로가 되었다.  아이들에게도 연락을 했다.

    마지막으로 남편과 오래 통화를 했다. 아버님의 죽음의 소식을 들은 뒤 이후 여기 상황을 궁금해하던 그에게 오늘 아침부터 저녁 까지를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랑쁠라스, 부모님 집의 방문, 작별인사, 아버님의 고른 숨, 편안한 표정, 시누이, 아버님의 손, 구토, 간호사의 개입, 잠시 다시 살아나셨다가 두 번째 구토...... 애도 문화의 차이, 며느리 설움, 밤에 긴 산책....... 이런 긴 이야기를 다 했다.

    남편은 묵묵히 들어주었다. 나더러 수고했다고 감사하다고 했다.
    남편은 당장 벨기에에 오고 싶지만 친정어머니를 혼자 두고 떠나는 게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그러나 엄마는 본인 걱정을 절대 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하셨고 남편이 당장 티켓을 알아보기로 했다.

    남편이 오늘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푹 쉬라고 했다.
    멜라토닌을 먹고 누웠다. 자는 둥 마는 둥, 밤이 지났다.

    다음 날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호텔 조식도 생략, 냉장고 안에 있던 간단한 음식들을 먹고, 종일 침대 안에서 누워 지냈다. 호텔 방의 벽 한 면이 유리창인데 브러셀 시의 지붕들과 구름이 많이 낀 하늘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게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었다.
     

     

    (*정아야, 빨간 차가 멀리서 오는 거 보면서 그걸 기다렸다 찍었어. 너에게 보여주려고.)

     

    미국 시간으로 아침 시간이 되자마자 남편에게서 연락이 왔다. 티켓 정보를 알려주었고 나는 남편의 일정을 알려 드리려고  엄마께 전화했다.

    엄마는, "그래, 잘했다. 여긴 내가 잘 알아서 할게, 날 믿어줘. 거기 일에 집중해라. 어머님 잘 보살펴드려라."라고 하시더니 갑자기 눈물을 터뜨리셨다.

    "난 너의 시아버님 생각하면 눈물이 많이 나. 너무 슬퍼"라고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잠시 진정을 하시더니만 "시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시겠니. 정말 너무 가엾다" 하면서 흐느끼셨다. 셀폰의 작은 화면을 꽉 채우는 우는 엄마의 얼굴... 에 내 마음도 먹먹해졌다. 

    엄마는 "어제는 에릭이 가엾어서 에릭과 부둥켜안고 울었어. 에릭도 많이 울었어."

    '여기와는 완전히 반대 상황이었구나. 남편의 어머니는 나더러 울지 말라고 했는데, 엄마는 남편을 껴안고 함께 울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아리면서, 그렇게 남편에게 든든한 정서적 지원을 해준 엄마께 너무 감사했다. 

    "엄마, 고마워요. 고마워요. 그게 우리한테 필요해요."

    남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몇 가지 중요한 일들을 논의했다. 내가 에어비엔비를 구하고, 뭘 가져오고, 어디에 연락을 해야 하고 등등...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그가 잠시 망설이다가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나 어제 혼자 좀 울었어.".

    나는 남편에게 "에릭, 잘했어! 정말 잘했어!"라고 외쳤다. 내가 그의 마음을 이해함은 물론이었고, 그보다 그가 나의 북바치는 감정을 이해할 거라는 사실이 너무도 반가웠다. 대서양을 두고 떨어져 있는 그와 내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꼭 잡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느껴졌다. 

    28 년의 결혼 생활 뒤, 적어도 남편과 나 사이에는 애도의 코드가 같다는 사실의 확인이 참 고무적이었다. 그도, 나도 서로 다른 문화에서 왔고, 타고난 성격 때문에 감정 표현의 방법과 정도가 사뭇 다르다. 그러나 이번, 아버님의 죽음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공유하고 있던 '사랑, 슬픔을 표현하는 감정 문화'를 발견하게끔 해주었다. 내가 시댁에 혼자 와 있는 동안 남편이 속해있던 가족의 감정 코드와 애도 문화가 어떤지를 여실히 보았기 때문에,  남편과 내가 나누는 공감대가  한층 더 선명하게 보였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 후 일들이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깊은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었다. 언젠가 우리에게 좀 더 여유가 생길 때 나는 엄마와 에릭에게 내 생애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 아버님이 떠나신 날의 여러 이야기를 해주려 한다.  남편과 어머니가 껴안고 울었다는 말이, 남편이 혼자 울었다는 말이, 그리고 그가 아버지의 죽음에 울 수 있는 아들이라는 게, 나에게 같은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공동체가 있다는 게  소외감과 외로움에 젖어 브러셀의 골목길을 헤매고 다니던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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