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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러셀 일지 5: 그랑쁠라스와 임종 준비
    카테고리 없음 2023. 3. 28. 09:00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내가 벨기에 온 지 나흘 째 날, 일요일 저녁 6 시 20 분 경.
    시누이와 내가 아버님 곁을 지켰다.

    일주일이 지나서 나는 그날에 대해서 글로 쓴다.
    그날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떠나시던 순간까지를 시간적 순서로 기억하고 정리해보려고 한다.
    일주일 나의 뇌리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고 있는 충격적 순간을 담담히 대면하는 것이 나에겐 아주 필요한 일이다.
    아버님의 장례식 전에 아버님의 죽음의 이야기를 곱게 정리하고, 장례식 날,  투명하고 밝은 마음으로 아버님을 보내드리련다.

    —————————————

    일요일 아침, 날씨가 맑았다. 비가 내릴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 한번 걸어볼까?’ 욕심이 났다.

    걷고 싶었다. 브러셀에 도착하자마자 요양원에 찾아갔고, 시동생에게  ‘내가 여기 있는 동안은 매일 출근해서 돌볼 테니 마음 놓으라’고 호언장담한 뒤 요양원 출근을 했더니 사흘 지나고 나서는 시차가 느껴졌다. 친척들과 미리 계획한 대로 이번에는 부모님에게만 집중하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침, 점심, 저녁을 다 혼자 먹고 요양원만 드나드니까 기운이 빠졌다. 충전이 필요했다.

    몇 시간 만이라도 원 없이, 정처 없이 걷고 싶었다.

    아침기도를 마치고 든든한 식사를 했다. 오트밀에 사과, 연어, 토스트, 과일 샐러드 등 배부르게 먹고 호텔을 나섰다.
    아브뉴 루이즈의 긴 길을 따라 걸어 사블롱 광장을 향해 내려가 꼬불꼬불 골목길을 통해 그랑쁠라스로 갔다.
    작년 12 월, 혜지 언니가 나를 보러 왔을 때도 같이 걸었던 골목들처럼 아기자기하고 예쁜 골목길들…


    언니를 만난 날 만큼 햇빛이 찬란하지는 않았고 좀 더 쌀쌀했지만, 골목길을 걷노라니 옛 기억이 생생해지고, 나는 마치 언니와 팔짱을 끼고 걷는 듯한 그런 행복감을 느꼈다.
    당시 세 분의 어머님의 병환에 대한 걱정, 앞으로 그들이 돌아가신 뒤에 내가 느낄 상실에 대한 슬픔을 이미 맛보고 있던 나에게 언니의 사랑은 마치 어머니의 사랑처럼 치유적 힘이 있었지….

    그랑쁠라스에 도착하니 광장에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기쁨의 심호흡 크게 하면서 휘~~ 둘러보았다.
    30 년 전, 프랑스 유학 시절, 처음 방문한 이후로 지금까지 수십 번 방문해서 친근한 그랑쁠라스.
    광장 한 중간에서 하늘에 쵸콜렛을 던지고 그것을 줒기 위해 뛰어다니던 어렸던 룰루와 랄라의 웃음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님과 룰루가 함께 맥주를 마셨던 기억도, 혜지 언니와 창문이 작은 식당의 2 층에서 광장을 내려다보며 버섯 토스트를 먹었던 것도….다 생생하다.

    나는 사진 몇 장을 찍은 뒤 그랑쁠라스를 떠났다.
    최근에 하고 있는 셀프 그림 치료 덕인가, 도시 여기저기 보이는 낙서들이 다 새롭게 보였다.
    이렇게 잘 그릴 수 있으면 좋겠다…부러운 마음으로 감상했다.


    길을 걷다 보니 발이 저절로 마그리트 미술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그리트 미술관도 내가 브러셀 올 때마다 꼭 방문하는 곳인데, 오늘 나에겐 시간이 없었고, 이후로도 박물관을 방문할 시간이 없을 것이었다. 잠깐이라도 들어가 볼까 망설이는데 박물관이 닫혀 있었다. 공사 중이란다.

    마그리트 미술관에서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벨기에 문화 예술의 전당인 ‘보자르 (BOZAR)로 갔다. 나는 부모님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마그리트 미술관을 갔다가 보자르에 들렀다가 버스를 타고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가는 하루 일정을 즐기곤 했었다. 문화 강연, 음악회, 전시회, 공연 등의 행사가 열리는 보자르는 세계적 클래식 경연대회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결선이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2019 년, 실족해서 거동이 불편한 아버님을 뵈러 왔을 때 아버님을 부축해서 클래식 연주 공연을 관람했던 곳. 그날 새로 사드린 쟈켓을 입고 ’ 옷이 따뜻하고 가볍다 ‘ ‘내가 이렇게 멀리까지 올 수 있네 ‘ 하고 좋아하셨던 아버님. 그 후 아버님은 걷지 못하게 되셨고, 그래서 ’ 보자르‘는 아버님이 집에서 가장 멀리 한 외출의 마지막 장소로 남아 있다.

    나는 보자르 건물 안에까지 들어가 망설이다가 시간 계산을 해보곤 도로 나왔다.

    나중에 또 오면 되니까… 이렇게 걸어 다니는 것만 해도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

    부모님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섰다가 마음을 바꿨다.  
    예측 불가한 브러셀의 날씨, 내일 비가 쏟아질지 모르니까 이렇게 날씨가 좋은 오늘  많이 걷자.

    꽤 먼 거리였지만 걸어서 부모님 집으로 갔다. 아침 식사를 든든하게 먹어서인지, 아니면 기분이 좋아서인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부모님 집 앞에 도착했다. 굳게 닫힌 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문은 낡을 대로 낡았고, 부모님의 이름도 하도 오래되어 희미하게 보였다. 세월의 흔적은 돌계단에서도 보였다. 사람들의 발을 디디는 돌계단의 중간이  닳아 약간 파여 있었다.


    1995 년, 결혼하러 브러셀에 혼자 왔을 때 생각이 났다. 이 집에 짐을 풀면서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결혼을 하는 거라고? 저 남자랑? 이 식구들이 내 시댁이라고? 라며 얼떨떨했던 때.
    어질고 선한 시부모님을 보면서 ’이런 가정에서 이런 부모님을 둔 남자랑은 결혼해도 되는 거야 ‘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었다.
    결혼식이 끝난 뒤에 부모님 집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었다. 내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다음번에 브러셀에 올 때에 이 집은 팔렸을 것이다. 부모님이 세상에 안 계실 가능성도 크다. 그럼 나는 ‘시댁’이 사라지는 것이리. 한국의 친정이 사라졌듯이…

    뭐.. 어떻게 하겠어. 담담히 받아들여야지..‘

    부모님의 빈 집에서 추억 여행에 잠겨 있는데 집 맞은편에서 한 경찰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의심의 눈초리라기보다는 호기심의 시선이었다.
    나는 집의 ‘이름을 (주소—“38 rue du xxxx!”)  를 부르고 ‘고마워! 안녕!’ 하고 소리 내어 인사를 한 뒤 떠났다. 내가 이후로 집에 대한 여러 센티멘탈한 사고와 감정들에서 한층 더 자유스러울 것이라는 자신감이 들었다.

    요양원은 부모님 집에서 10 분 정도 쭉 내리막 길을 따라가면 나온다.
    아침 10 시부터 오후 2 시까지 계속 걸은 뒤 내리막길을 걸으니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워지던지…
    몸이 피곤하지 않았다. 마음도 맑았고, 생각이 또렷했다.
    나의 감정적/ 영적 건강은 100 점 만점의 상태,
    요양원 근처에서 샌드위치와 스무디로 기운을 충전한 뒤 요양원의 비밀 부호를 눌렀다.


    ————————————————————-
    요양원에 들어가면 대개 나는 어머님 방에 먼저 들러 한 시간 정도 있다가 아버님 방으로 간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아버님 방을 먼저 가고 싶어서 3 층으로 갔다.

    아버님의 방은 평소와 다르게 닫혀 있었다.
    그것이 긍정적인 신호로 보였다.
    몸이 편찮으실 때는 문을 열어두고 간호사와 요양보호사들이 수시로 체크를 하기 때문이다.
    지난 이틀간은 아버님 방문이 열려 있었다.

    방에 들어서니 조용했다.
    이것도 긍정적인 신호. 아버님은 지난 사흘간 상체가 들썩들썩 움직이는 가운데 거칠게 호흡하시고, 고통스러운 혼잣말을 많이 하셨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숨이 고르고 편안히 주무시고 계셨다.
    흰색 내의에 좀 두터운 베이지색 내의를 입으시고, 하늘색 수면 모자를 쓰신 채, 옆으로 누워 편히 주무시는 아버님은 10 년 전, 건강하셨을 때 주무시는 모습과 한 가지였다.
    남편에게 건강해보이는 아버님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사진을 찍은 뒤 인사를 했다.

    “아버님, 저 왔어요! 팜펨이요!”

    한 손으로는 아버님의 손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아버님의 뺨을 가볍게 쓸어드렸다.

    그때 아버님이 눈을 감은 채, 이불 밑에 덮여 있던 한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셨다.
    마치 심해의 해초가 움직이는 것마냥 천천히, 느리게 아버님의 손이 움직였다.

    아버님이 깨신 건가, 나의 목소리를 알아 들으신 건가 생각하며 아버님을 주의 깊게 내려다보는데 아버님이 아주 천천히 당신의 손을 나의 손 위에 포개 놓으셨다.
    아버님이 나의 손을 잡으시는 건지, 그냥 손이 움직인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작년 12 월, 아버님이 바로 비슷하게, 즉 심해의 해초같은 동작으로 내 손을 잡았던 일이 떠오르면서 어쩌면 아버님이 나의 손을의식하고 잡으신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12 월, 요양원으로 옮기신 부모님을 응원해 드리기 위해서 일주일간 짧은 일정으로 왔을 때였다. 매일 부모님을 만나뵙다보니 금방 일주일이 지났다. 출국일 전 날, 부모님께  인사를 갔다.
    아버님은 우리가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셨다.
    점점 시간관념이 없어져 날짜도 요일도 모르고 하루를 보내시던 아버님은 우리가 언제 떠나는지를 전혀 모르고 계셨기 때문이다. “내일 간다고?”

    “네, 아버님. “

    ”하…“ ”아버님. 근데 또 올게요. 미국이랑 벨기에는 가까워요. 보세요. 여름에 뵀는데 또 왔잖아요. 그러니까 아버님, 건강하게만 지내세요. 우리 곧 다시 만날 거예요. “

    밝은 목소리로 아버님의 마음을 바꾸려 했다.
    슬픈 표정을 짓고 계시던 아버님이 갑자기 앙상한 팔을 들어 올리셨다. 천천히 움직이는 아버님의 팔과 손을 보며 심해의 해초를 연상했던 게 그 때가 처음이었다.

    아버님은 들어올린 양손을 뻗어 나의 손을 잡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아버님이 나의 손을 먼저 잡으신 적이 그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 나는 아버님의 손, 발, 머리, 등 고루고루 마사지를 자주 해드려서 아버님의 몸에 ’ 손을 대는 것‘에 익숙했고, 아버님 손을 잡은 건 다 나였다.)

    아버님은 여전히 느린 동작으로 당신의 손에 담긴 나의 손을 당신의 가슴 가까이로 가져가시더니만 가슴에 품으셨다. 그리고 가만히 계셨다. 아무런 말이 필요 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과 별리의 아픔이 나의 손을 잡은 아버님의 손을 통해서 전해졌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나 다시 찾아온 나에게 아버님은 반갑다고 미소 짓기는커녕,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말도 제대로 못 하신다.

    그러나 아버님이 나의 손을 먼저 잡았든 아니든 중요치 않았다. 우리가 손을 잡고 았으면 되었다.

    내가 브러셀을 떠날 때 아버님이 할 수 있었던 게 내 손을 가슴에 품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듯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버님의 손을 쓰다듬는 것 말고는 없다.

    아버님이 나의 손을 잡은 행위가 백만 마디 말보다 더 감동적인 사랑의 표현으로 느껴졌듯이 내가 아버님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게 나의 사랑과 위로의 표현으로 아버님께 전달되기 바라며 아버님의 손을 계속 한참 쓰다듬었다.

    편하게, 새근새근 주무시는 아버님의 얼굴이 아가 얼굴처럼 보였다.
    그 예쁜 모습을 남편에게 보여주려고 나는 조심스레 손을 풀고 일어나 사진을 찍었다.
    아버님의 이마에 뽀뽀를 한 뒤 어머님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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