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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러셀 일지 4: 아버님과의 대화
    카테고리 없음 2023. 3. 25. 18:41



    (03-18-2023)

    사흘째 잠을 푹 자고 아침 8 시에 기상했다.
    호텔 조식.

    어제 인사를 나눈 셰프, 앙드레가 나를 위해 조식에는 포함되지 않은 달걀 요리 (에그 베네딕트)를 만들어주었다.
    아침 먹고 나서 컴퓨터 실에서 글 쓰고 공부하는데 또 다른 친절한 직원이 카페올레를, 그리고 한 시간 후에는 카푸치노를 갖다 주었다.

    시차로 인한 피로를 풀려고 아침 식사를 하면서 녹차와 커피를 마셨는데 거기에 더해 커피 두 잔을 더 마셨으니 카페인 파티를 한 셈.
    그러나 정신적/육체적으로 소모적인 요양원 방문을 앞두고 카페인 충전은 필수,
    기운도 나고, 머리도 맑아져 가벼운 마음으로 요양원까지 걸어갔다.

    어머님 방에 들어섰는데 공기가 심상치 않다.
    드시는 게 없으니 뼈만 남은 어머니가 무서울 정도로 수척했다.  
    틀니를 빼고 계셔서 하관이 홀쭉하니 더 수척해 보이는 것도 있었으나, 표정을 보니 뭔가 힘드신 게 역력했다.

    “팜펨이니? 봉쥬르! “
    쟈클린 이모가 화장실에서 뭔가 달그락달그락 씻으시면서 나에게 인사했다.

    어머님은 아무 말씀 없이 눈으로 인사하셨다.
    기력이 완전히 다 빠지신 이유가 있었다.
    어젯밤 내내 토하셨단다.
    저녁에 단백질 음료 반 통을 드셨고, 환타 몇 모금 마셨는데 구역질이 나서 토하셨다는데, 빈 속에 토하시려니 고통이었다.

    힘이 다 빠져 그런 설명을 하시던 어머니가 급히 침대 옆에 놓여있던 작은 플라스틱 대야를 잡으셨다.
    또 구역질이 난 것이다.
    자클린 이모가 재빨리 티슈를 끊어 어머님 손에 들려드렸다.
    어머님은 몇 차례,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구역질을 하신 뒤 ‘어지럽다, 세상이 빙빙 돈다’라고 호소하시곤 눈을 감으셨다.
    ‘눈을 감고 있어도 어지럽다’라고 하셨다.

    간호사를 불렀다.  환자들의 약을 총괄하는 수간호사가 약을 들고 왔다.
    어머님이 약을 드시는 동안 옆에 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간호사 덕에 어머니도, 어머니를 염려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나도 안심을 했다.

    나는 미국에 있을 때부터 남편과 궁금했던 것을 간호사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아버님이 무슨 약을 드시고 계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요즘 너무 많이 주무시는데, 그게 건강의 악화인지, 어떤 약의 영향인지 궁금해서요. “

    이제까지 경험으로 의료진들은 환자 가족의 질문에 방어적으로 되곤 하는 것을 알기에 질문이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기꺼이,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아버님은 현재 진통제 두 종류와 항생제를 복용하고 계시는데 진통제 중 하나가 아주 강한 약이라서 잠을 많이 주무시는 것이라고 했다.
    첫날 아버님이 끼고 계시던 산소 호흡기에 대해서도 물었더니 산소 튜브는 내내 하셔야 하지만 산소 호흡기는 아버님 가슴이 막혀서 호흡이 곤란할 때 부착해 드리는 것이며 20 분 정도 후에는 떼어드린다고 했다.
    (아, 그러니까 며칠 전, 아버님이 산소 호흡기를 필요 이상 오래 부착하고 계셨던 것이 맞는구나..)

    간호사는 약 이름과 양을 적어주면서, “저의 이름은 ‘안느’에요. 궁금하시면 전화해서 안느를 찾으세요. 시차 때문에 시간 맞추는 게 좀 불편하시겠지만 걱정하는 것보다 전화해서 마음 편해지는 게 낫지요”라고 했다. 그녀는 자기 이름과 함께 요양병원의 주치의 이름까지 적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안느!“

    그녀가 병실을 나갈 때 우리는 가볍게 허그를 주고받았다.
    내가 요양원에서 이름을 아는 직원은 처음이었다. 이제까지 내가 요양원에서 느끼던 그런 막연한 불편함이 좀 가셔졌다.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그랬잖아. 여기 사람들 다 이렇게 친절해.”

    그렇구나. 그걸 나만 몰랐구나. 어머님이 많이 말씀했는데 내가 믿지 않았던 거구나.

    어머니와 아버님의 방을 수시로 드나드는 도우미/보호사는 다 합해 열 명이 넘는데 나는 그 어느 누구의 이름도 몰랐다.
    나도 그들도 서로를 총칭적 타이틀, ‘마담’으로 부른다.

    일이 바빠서이기도 하고, 얼굴들이 매번 바뀌니까 그랬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들’만 계속 만나는 요양원, 요양원은 참 차가운 공간이었다.

    비밀번호를 입력해서 들어가야 하고, 방문객이든, 직원이든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마주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부모님의 방으로 가려면 복도에 열려 있는 문으로 보이는 꼼짝 않고 누워있거나, 텅 빈 시선으로 앉아 있는 처량한, 이름 모를 환자들을 지나쳐야 한다.  

    작년 12 월에 부모님을 찾아뵈러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부모님이 요양원에 계시는 것을 가엾게 보았었다.  특히 지금은 시부모님이 따로 떨어져 방에 각자 죽음을 기다리고 계시고, 자식들 그 누구도 부모님을 버린 게 아니건만, 집이 아닌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부모님이 마치 버려지기라도 한 듯이 가엾었고, 그래서 요양원은 나에게 우리가 잃어버린 것 (부모님과 함께 하던 집), 우리가 잃어버릴 것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삶)을 상기시켜 주는 그런 상실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안느‘와의 만남이 의미가 있었다. 내가 안느라는 한 개인을 알게 되어서라기보다는 내가 갖고 있던 요양원에 대한 불편한 감정과 태도를 다소나마 수정할 수 있게 되어서이다.
    professional 하면서도 다정한 간호사 안느랑 아주 만족스러운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부모님은 이 여성의 도움을 매일 받고 수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부모님은 내가 갖고 있는 요양원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느낌을 ’나만큼‘은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어머님은 수차례 ‘여기 너무 좋아. 사람들이 참 친절하고, 편하게 해 준다’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어머님의 말을 새겨듣지 않았었다. ‘안느‘ 만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예의와 다정함과 배려로서 시부모님을 돌보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요양원은 ‘못 살 곳’ ‘슬픈 곳’이라는 사실 하나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 온 지 사흘 밖에 안되었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이미 요양보호사들이 부모님을 자신의 부모인양 가족들이 부르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만이 아니라 식사를 못하시면 염려하고, 통증을 느끼시면 안쓰러워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느긋한 성격의 일부 요양보호사가 일관성 있게 다정한 예의로서 어머님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약자인 노령의 부모에게 독단적으로 따지거나 명령하는 자식들보다 저런 사람이 더 편할 수도 있겠다’라는 혼자 생각까지 했었다. 간호사, 요양보호사, 의사들은 아침저녁으로 부모님을 돌보고, 부르면 뛰어와서 도와주고, 약을 먹여주고, 기저귀 갈아주고, 목욕시켜주고, 음식 먹여주고 수시로 들어와 필요한 거 없냐고 확인하면서 멀리 있는 자식들이 해드릴 수 없는 케어를 제공하고 있었다. 오늘 그래서 나는 부모님께는 요양원이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척박한 황무지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성심성의껏 부모님을 돌보는 이들에게 그저 감사하자 마음먹었다.


    ————

    어머님이 안정을 취하시는 동안 아버님 병실로 갔다.

    오늘은 아버님이 세 개의 베개에 의존해서 옆으로 누워 계셨다.
    상체는 얇은 셔츠 두 장을 겹쳐 입으시고, 머리 수면 모자도 안 쓰신 채, 입을 벌리고 고통스레 신음하고 계셨다.
    아버님 옆에 앉아 손을 잡으니, 덜덜 떨리는 팔의 진동이 손까지 전해졌다.
    추우신가 보다 싶어 담요를 찾아 덮어드렸다.
    그러나 아버님의 몸은 계속 떨렸고, 몸살 앓을 때의 신음소리를 내셨다.
    손과 팔을 비비면서 마사지를 하여 체온을 올려드리려고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아버님 내의 속으로 손을 넣어 등과 어깨를 마찰해서 따뜻하게 해 드리려고 노력했다.
    20 분 정도 지나니 아버님의 몸 떨림이 가라앉았다.

    어제보다도 대화를 하기에 더 어려운 상태셨다.
    아버님 옆에 앉아 가끔 아버님이 큰 소리로 고통을 호소하실 때 위로해 드리고 기도해 드리는 중 요양 보호사가 저녁을 갖고 왔다.

    처음 보는 요양 보호사.
    듬직한 덩치에 몸이 열이 많은지 반팔을 입고 있었다.

    이제까지 아버님 식사를 담당하는 요양보호사를 나는 세 명을 만난 셈이다.
    그들은 항상 똑같은 음식을 들고 왔지만 미세하게나마 일을 하는 속도와 방법이 달랐다.
    특히 오늘 요양보호사는 이제까지의 두 명과 확실히 차별화되는 특성이 있었다.

    매 동작이 각이 잡혀 절도가 있고, 상급 군인이 졸병에게 호령하는 것과 비슷하게 환자에게 자신만만하게 명령하는 ‘군인 스타일.’

    그녀는 능숙하게 아버님의 목에 앞가리개를 두르더니 구석의 탁자에서 약을 뭔가로 탁탁 내리쳐 부수더니만, 휘휘 약을 죽에 섞어와 아버님 옆에 섰다.
    그녀의 덩치가 어찌나 큰지, 들고 있는 아버님 저녁 식사 그릇이 마치 찻잔같이 작게 보였다.

    그녀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빠삐!” 하고 아버님을 불렀다.

    날카롭고 우렁찬 그녀의 목소리에 아버님의 눈이 움찔하더니만, 그 길로 아버님이 두 눈을 뜨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오늘 내가 한 시간 동안 아버님 옆에서 이루지 못한 일—-아버님 눈 뜨게 하는 일—-을 ‘군인’ 요양 보호사는 단 한마디로 해냈다!

    그녀는 절도 있게 척! 하니 아버님 입에 숟갈을 갖다 대었고, 숟가락이 입술에 닿는 순간 아버님을 입을 크게 열고 죽을 받아 드셨다.
    평소 천천히 식사하시는 아버님을 아는 나로서는 너무 빠르다 싶을 정도로 그녀는 아버님께 음식을 드렸고, 아버님은 허겁지겁 음식을 받아 드셨다.
    많은 감정이 동시에 느껴졌다.
    아버님이 죽을 잡수셔서 기뻤고, 자신이 먹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하면서 입을 열어 받아 드시는 그 모습이 안쓰러웠으며, 능숙하게 아버님을 다루는 요양보호사의 능력에 안심이 되었다.

    한번 아버님이 잠시 죽을 삼키지 않고 가만히 계셨다.

    요양보호사는 큰 소리로 호령을 했다.

    ”빠삐~~~~ 삼켜야 해요! 삼켜요! “

    그 순간, 아버님은  다시금 놀란 듯 눈을 번쩍 뜨셨다가 감으시더니만 죽을 꿀떡 삼키셨다.

    그때 알았다. 그녀의 목소리의 톤과 크기가—카랑카랑, 째랑째랑, 우렁찬 목소리—가 난청인 아버님의 귀의 먹먹함을 뚫는 소리라는 것을/.

    나는 나도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하리라 마음먹었고 그녀의 목소리와 핏치 등을 관찰했다.
    식사를 마치고 그녀가 나가자마자  나는 심호흡을 하고, 목청을 가다듬어 내 목소리보다 가늘고, 날카롭고, 높게 만들어 작게 ’ 빠삐, 빠삐‘ 연습을 한 뒤, 실전에 돌입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목소리로 외쳤다.

    ”빠아아— 삐이이——-!!“

    아니나 다를까,  아버님의 눈이 떠졌다.
    그걸 바라고 한 일이었지만 정작 아버님의 눈이 열리는 순간 난 너무도 놀라서 움찔했다.
    마법을 푸는 주문을 찾은 듯, 안 열리는 문의 암호를 풀기라도 한 듯한 희열을 느꼈다.

    아버님은 자신의 얼굴 앞에 디디 밀은 나의 얼굴을 보시더니 물으셨다.

    “너 여기서 뭐 하고 있니? “라고 물었다. (‘Qu'est-ce que tu fais ici?’)

    그 또렷한 발음, 명확한 시선에, 나는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평소에는 입 주위의 근육이 녹아버리기라도 한 듯이 발음이 어눌하셨는데…
    근데 지금… 아버님이 나에게 말씀을 하시는 건가? 그냥 나온 말인가? 뭐라 대답해야 하지?

    나의 그 혼돈스러움은 3 초도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아버님의 눈이 다시 감기어졌다.

    나는 다시 째랑째랑한 목소리로 아버님께 외쳤다.

    ”아버님, 에릭이 아버님 그리워해요. 에릭이 아버님 사랑한대요!”

    그랬더니 아버님이 다시 눈을 뜨시곤, 내 말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아닐지언정, 완전히 또렷한 발음으로

    “Ca va, toi?” (넌 괜찮아?)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역시나 내 대답을 듣기 전에 아버님의 눈이 감겼고, 아버님은 약간 거친 호흡 속에 혼잣말을 하셨다.

    아버님 귀에 대고 기도를 한 뒤에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다.

    아버님이 알아들으실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열심히 기도한 뒤, 아버님께  ”아버님 우리 나중에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 “라고 했다.

    아버님이 눈을 감은채 큰 소리로 ‘where?” 하셨다.

    ”하늘나라요! 파라다이스요! “

    역시나 아버님은 내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으셨다. 나는 아버님의 이마와 뺨에 뽀뽀를 하고, 기도할 때는 귀에 가까이 대고 기도했다.

    고통에서 구해주소서.
    안식을 주시옵소서.
    평화를 주시옵소서.
    그저 주님만 의지하여 담대하게 이 시간을 겪어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가 끝나고 나서 아버님의 손을 잡고 있는데 아버님이 ’디둠….디둠….디둠…..‘ 하고 어머니 이름을 부르셨다.
    아버님이 아무리 발음이 흐트러지고, 환각 상태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하실 때도 항상 정확하게 들리는 단어는 ’디둠‘이었다.
    24 시간 내내 수시로 어머니 이름을 부르신다.
    고통 속에서, 혼잣말처럼, 수시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하나님‘ ’부처님‘을 찾는 것과 비슷하게 아버님은  ‘디둠, 디둠!’ 외치신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부터 식구들은 아버님이 어머님 이름을 노상 부르신다고 해서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실제로 아버님이 환각 상태에서, 얼굴을 찡그린 상태에서 ‘디딤…디둠…’ 부르시며 찾는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어제도, 그제도, 나는 그런 아버님을 보면서 마음 아팠었다. 내가  ‘아버님, 어머님 만나고 왔어요. 어머님 잘 지내고 계셔요. 어머님은 아버님 걱정해요. 아버님, 어머님이 아버님 사랑한대요’라고 했지만 아버님은 내 말에 반응하지 않으시고 그저 어머님 이름을 부르셨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아버님이 어머님의 이름을 부르며 신음하실 때 내가 요양보호사의 째랑째랑 하고 큰 목소리로

    “어머님은 잘 지내고 계셔요! 아주 잘 지내고 계셔요!“ 라고 했더니만 아버님의 눈썹이 움찔 움직였다. 아버님이 눈을 감으신 채 물으셨다.

    ”디둠이잘 지내고 있다고? “

    나는 감격했다. 아버님과 내가 주고받은 ’대화‘ 중에서 오늘의 대화는 —-아버님이 ’디둠‘을 부르셨고, 내가 ’디둠은 안녕하세요‘ 라고 말했고, 거기에 아버님이 ’디둠이 안녕하다고?‘ 라는 이 삼단계 대화—이제까지 우리가 주고받은 대화 중에서 가장 숨이 긴 대화였다. (이제까지 아버님과 나의 대화는 아버님이 뭐라 하시면 내가 대답하고는 끝!  혹은 내가 뭐라고 하면 아버님이 반응하시곤 끝! 다 2 단계에서 멈췄었다.)

    나는 반색하면서 ”네에에~~~ 아버님, 어머님은 안녕하세요!“라 외쳤다.
    그러나, 아버님의 눈은 이미 감겨 있었다.

    아버님과 정상적인 대화가 안 될 때마다 나는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나와 이야기를 하시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곤 하는데, 오늘은 좀 다른 관점이 생겼다.

    이제까지는 내 입장에서 아버님이 내 말을 못 알아들이시는 것을 안타까워했는데, 반대의 상황도 가능했다.
    내가 아버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상황.
    아버님이 혼잣소리처럼 하는 그 모든 말들이, 내가 무슨 말을 했을 때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이 내뱉는 그 모든 ‘소리’들이 어쩌면 아버님의 간절한 대화의 시도일 수 있었다. 아버님은 자신이 열심히 이야기했는데 내가 못 알아듣고 딴소리를 해서 당혹스러우실지도 모르며, 아니면 청력이 상실되었기에 내가 하는 소리가 아버님 귀에는—-지금 내 귀에 아버님의 발음들이 어눌하게 들리듯이—-뭉뚱그려져 들릴지도 모른다.

    나는 이 시나리오가 아주 가능한 시나리오라 생각이 들었고 ’계속 아버님과 말을 나누려고 노력해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

    빠삐의 숨이 고르게 된 뒤 나와 어머님 방으로 갔더니, 쟈클린 이모는 이미 떠났고, 어머님이 주무시고 계셨다.
    어머니가 깨실까 조심스럽게 코트를 챙겨 입고, 배낭을 메다가 작은 선반 위에 놓인 사진에 내 시선이 멎었다.

    70 년 전의 부모님 사진.

    볼살이 채 빠지지 않았던 청초하고 새침한 미모의 어머니,
    남성미를 보여주려고 근육운동으로 열심히 키운 팔뚝을 자랑스레 내놓고는 쿨~ 한 무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님,

    부모님은 서로에게 첫사랑이었다. 10 대에 만나 20 대에 결혼했고 그 후 단 한 번의 흔들림도 없이, 70 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한 영혼의 짝꿍이다.





    그 사진 옆의 사진 또 하나.



    공부를 위해 2 년간 떨어져 살다가 그들은 20 대 초반 결혼하기 위해서 브러셀에서 다시 만났을 때의 사진.
    이곳은 브러셀의 어느 거리일까?
    비가 내린 뒤에 땅이 젖어서 반짝거리네..
    사랑 하나로 모든 것을 다 정복할 준비가 되어 있던 행복했던 젊은 어머니와 아버님의 밝은 미소가 거의 천진하다 싶기까지 했다.
    그 후 이들은 4 명의 아이들을 낳고 키워 손자 손녀, 증손자 증손녀를 둔 다복한 가족의 주인이 되었고…

    과거의 사진 속의 껴안고, 팔짱 끼고 미소 짓는 과거의 부모님의 모습과 지금 각기 다른 층, 다른 방에서, 곤한 잠에 빠져있는 두 분의 얼굴은 너무도 큰 대조였다.
    각자 떨어져 죽음을 기다리는 그들의 현실이 한층 더 아프게 다가왔다.
    사람은 누구나 다 혼자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지만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는 일..
    ——- 7 시 반, 요양원 원은 방문객들은 다 떠나고, 병실들도 다 닫혀 있었다. 요양보호사들도 안 보였다.
    내가 5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통해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올 때까지 아무도 없었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때문에 식당/카페의 테라스가 텅텅 비어 있고, 길에는 보행자가 거의 없었다.
    호텔까지 쭉 이어지는 직선의 길이 있지만, 샛길, 모르는 작은 골목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혼자 있는 호텔방까지 갖고 가고 싶지 않은 생각들, 감정들을 다 길에다 내려놓으려 노력했다. 호텔에 도착하니 바지가 다 젖어 있었다.

    호텔 로비에서 야간 근무 직원이 생긋 웃으면서 반겨주었다. 지친 얼굴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나를 쫓아와서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곤 기다리는 동안 불어 악센트가 심한 영어로
    ‘타월이 필요하세요? 커피나 차, 더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뭐든 필요한 것 있으면 말을 하세요! 오늘 일정은 어떠셨나요? 브러셀을 즐기고 계신가요?’
    두서없이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였다.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에 대답을 하는데 무겁던 내 마음이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 친구, 20 대 중반이겠구나.
    내 아들 또래겠네.
    참 열정적으로 일을 하는구나.
    첫 직장인가 봐? (맞단다. 호텔 경영학과 졸업하고 인턴쉽을 하는 중이란다.)

    즐겁게, 감사하게 수다를 떨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이 닫히는 순간 ‘good night!’ 하고 인사를 하는 직원.
    그의 깨끗한 피부, 선이 굵은 귀여운 얼굴이 사라지면서 갑자기 내 아들 생각이 났다.
    지금 이 친구처럼 열심히 일을 하며 인생을 배우고 있는 내 아들,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게 언제였지?
    Fitness trainer로 일하면서 자기 ’근육‘도 꾸준히 관리하고 있던데…
    몹시 그리웠다.
    그런데 갑자기 아들의 얼굴에 요양원을 떠날 때 본 ‘무표정한, 쿨한 젊은이’ 였던 아버님의 얼굴이 겹쳐졌다.
    팔뚝 근육을 자랑스럽게 내놓았던 젊은 아버님…

    나의 의식의 흐름은 끝이 없었다.
    저 활기찬 청년도, 나의 아들도, 60 년의 세월이 금방 흐르겠고, 그들도 아버님과 같은 노년을 맞이하는 하겠지.
    이 슬픈 경험을 다들 하고 마는 거야..
    남편이랑 나는 이미 노년의 바다에 첨벙 뛰어들었고…
    그와 나는 어떻게 작별을 하게 될까…

    휙휙 스치고 지나가는 많은 생각들을 잡으려 하지 않은 채, 생각에 빠져 외투를 벗고, 신발을 벗고, 손을 씻고, 찻물을 내렸다.
    담담했다.
    외롭지도 않았다.
    신기했다.
    오늘 하루도 쉽지 않은 하루였는데,  나는 내내 혼자였고,  요양원의 부모님을 뵙는 것이 정서적으로 아주 힘든 일인데 내가 왜 이리 차분하지?

    차를 마시면서 곰곰 하루를 되새김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혼자 많은 관찰을 하면서 보낸 하루였지만, 그게 그저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사변적이거나 감정적인 여행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사람들 덕이라 싶었다.
    일시적이고 스치는 만남이었지만 나의 하루는 수많은 타인들과의 interaction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별 달걀 요리를 만들어준 앙드레아, 카페올레, 카푸치노를 만들어준 종업원, 수간호원 ‘안느,’ 아버님의 ‘군인’ 요양보호사, 어머님을 돌봐준 친절한 두 명의 요양보호사들, 수다스러운 호텔 직원—-그들의 배려, 다정함, 유쾌함은 지금 나의 상황에서 아주 필요한 ‘기분 전환’과 ‘사고의 분산’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오늘 나는 혼자였으나 혼자가 아니었다. 평소 내가 혼자가 아님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존재들은 나의 든든한 지지자인 남편, 아이들, 친한 친구들이었는데, 이렇게 완전히 혼자 남은 상황에서, 시차로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떨어져 있던 하루, 나를 알게 모르게 지탱해 준 것은 나와 깊은 관계가 없는, 따뜻한 배려심을 베푸는 이웃들이었다.  그들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나는 그들의 따뜻함의 수혜자였고, 그것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으며, 그래서 감사했다. 사람을 통해서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나도 스쳐가는 사람들에게 그런 향기로운, 위로를 주는 존재가 되어야겠다는 다짐 하면서 나는 힘든 하루를 보내고 호텔 방에 혼자 있을 때 찾아들 수 있는 외로움을 아주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글을 쓰고 잠을 청했다.
    (아래는 제가 부모님 사진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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