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브러셀 일지 3: 음식 수발 도우미
    카테고리 없음 2023. 3. 21. 07:01

    03-17-2023


    브러셀 비를 캘리포니아가 다 가져갔는지, 캘리포니아에서는 계속 비가 내린다던데 브러셀 날씨가 계속 좋다.


    아침 일찍 호텔 조식 뒤 글을 좀 쓰고 요즘 붙들고 있는 공부를 30 분 정도 하고 난 뒤 밖으로 나갔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요양원 방문을 하려면 기운이 넘쳐야 한다. 아직 시차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현지 사람들의 스케줄로 활동하려면 더더욱 충전을 잘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점심으로 샌드위치에 아주 큰 사이즈의 녹황색 채소 스무디를 마시고는 요양원으로 떠났다.

    요양원에 가는 길에 꽃집에 들렀다.
    큰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의 꽃집 아줌마가 예쁜 꽃다발을 만들어주었다.
    오늘 어머님은 상태가 아주 양호하셨다.
    화병에 꽃을 꽂아 창가에 놓은 뒤 잠시 어머니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버님 방으로 올라갔다.


    아버님은 어제와 달리 면도를 해서 얼굴이 깨끗했다.
    어제처럼 코에는 산소 튜브가 부착되어 있었고 팔에는 수액을 꽂고 계셨다.

    어제 잠시나마 나를 알아보셨던 아버님, 그래서 나는 오늘을 단 몇 초라도 더 아버님과 대화를 할 수 있을까 기대를 하고 있었으나 아버님은 눈을 뜨지 않으셨다. 호흡이 거칠었다.
    나는 아버님의 귀에 대고 크게 인사를 드린 뒤에 아버님 옆에 앉아 손을 잡았다.
    아버님의 손을 잡고 있는 내 손에 미약하게나마 아버님이 힘을 주시는 게 느껴졌다.
    한 순간, 아버님이 한 손으로 당신의 손을 잡고 있는 나의 손을 덮으셨는데, 아버님의 의식적인 행동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었다.

    눈을 감은 아버님은 내 손을 잡은 채 계속 누군가에게 말을 하셨다.
    잠꼬대와 같이 두서없는, 그리고 발음이 정확지 않은 아버님의 말을 혹시라도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바람으로 나는 귀를 아버님 입에 가까이 대고 집중해서 들었다.
    그러나 해독이 불가능했다.
    아버님은 가끔 얼굴을 찡그리시고 아아~ 아아~ 신음을 하셨다.

    아버님의 얼굴, 목, 손을 계속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생각이 났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2 시간과 현재 시아버님의 상태가 너무도 비슷했다.
    눈을 감은 채, 친정아버지는 고통을 호소했다. ‘아파, 아파, 어깨가 아파‘ 라고 하셔서 어깨를 주물러 드리면 금세 ’ 목이 아파, 아아. 목이 아파 ‘라고 하시고,
    나는 아버지가 아프다고 하는 부위를 옮겨가며 안마하며 ’ 여기요?‘ ’여긴가요?‘ ’이제 좀 괜찮으세요?‘라고 하며 어떻게든 아버지 고통을 덜어드리려고 노력했다.
    우리의 대화는 ‘소통’의 대화가 아니었다.  당시 아버지가 나에게 던진 말이 나를 존재를 인지하고 하신 말씀인지 , 아니면 그냥 한 인간의 말에 자동적으로 반응을 한 것인지, 그리고 아버지가 나의 말과 마사지에 위로를 받으셨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절대로 소통의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었고, 나는 끊임없이 아버지께 말을 했었다.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다.
    시아버님을 보면서 그가 아파, 아파!’ 하고 괴로움을 표현하시는데, 그 외에 나와 특별한 대화는 없으시지만 나는 아버님이 ‘환각 상태에서의 외침’만은 아닐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두고 계속 아버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또 있었다. 왜냐면 —-큰 의미를 두기에는 너무도 짧은 소통이라지만—-가끔 아버님이 내 말에 반응을 하고, 거기에 맞는 대답도 하셨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아버님의 손을 붙들고 귀에 대고

    ”아버님, 괜찮으세요?”라고 물으면서 나는 큰 소리로 신음하는 아버님으로부터 어떤 대답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아버님이  온 인상을 찡그리면서 대답했다.

    “아프다 (J’ai mal).” (I’m in pain)

    갑자기 명확한 발음! 깨끗한 문장! 나는 반색하면서 아버님과 뭔가 더 말을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안타깝게도 거기서 끝이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아버님의 모놀로그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아버님의 팔과 어깨를 주무르고 쓰다듬으면서 아버님과의 대화를 시도했고, 그러다가 보면 갑자기 아버님이 또 대답을 하실 때가 있었다.

    한 예로,

    “아버님, 어디가 편찮으신지 말씀해 주세요. 제가 안마해 드릴게요. “

    했더니 아버님은 내 말에 대답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흐트러진 발음으로 뭐라 뭐라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가 “아버님, 이해해요. 힘드시지요?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이해해요.”라고 했더니 아버님이 감은 눈을 찡그리며 말씀하셨다.

    “쉽지 않다. 쉽지 않다. (Pas facile, pas facile.)“

    그렇게 갑자기, 짧지만, 문맥에 맞고 의미가 확실한 대답이 튀어나오는 순간, 나는 감격했다.

    ”그렇지요! 아버님, 그렇지요? 알아요. 당연히 쉽지 않지요. 너무 힘드실 거예요!”라고 하는 순간,
    아버님은 다시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모놀로그를 하셨다.

    아버님과의 대화는 마치 물고기가 거의 없는 연못에 낚싯대를 던져 놓고 기다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물고기가 안 물릴 것을 알면서도 혹시라도, 단 한 마리라도 잡힐까 하는 바람으로 기다리는 낚시꾼처럼
    나는 아버님과의 대화가 가능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찰나의 소통을 위해서 계속 아버님께 말을 던지고 귀를 기울였다.

    오후 5 시 반 경, 요양보호사가 음식을 갖고 들어왔다.

    어제 “My God! My God! 음식을 잡수시네요!”라고 환호하던 요양보호사가 아니라 좀 지긋한 나이의 흑인 여성이었다.
    어제의 요양보호사와 마찬가지로 이 분 역시 친절하게, 참을성 있게 아버님께 음식을 먹여드렸고, 아버님이 음식을 드신다는 사실에 놀라고 기뻐했다.

    ”브라보, 빠삐! 브라보, 빠삐!“
    “빠삐~ 빠삐~~ 이렇게 잘 잡수면 건강이 회복되겠어요!“
    ”빠삐, 트레 비엥! 트레 비엥! “

    나도, 그녀도 함께 ‘으쌰 으쌰’ 아버님을 응원했다.

    그녀는 전 날의 요양보호사와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지난 열흘간 아버님이 음식을 거부하셔서 참 힘들었노라, 아버님이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고 계시다. 음식을 안 드시면 약도 못 드셔서 통증으로 괴로우실 것이라고 했다.

    식사를 마치신 아버지께 새 기저귀가 차였다
    나는 아버님의 산소 튜브와 보청기가 제대로 꽂아졌나 확인하고 수면모자를 씌워드린 뒤에 어머니 방으로 내려갔다.


    —————-

    눈을 감고 누워 계시던 어머님은 내가 들어가니 반가워하며 물으셨다.

    ”빠삐는 안녕하디?“

    아버님이 식사를 잘하셨고, 지금 주무신다고, 어제부터 식사를 잘하셔서 요양보호사들이 좋아한다고 전해드렸다.

    ”그런데, 어머니, 아버님이 지난 12 월과 너무 달라지셔서 놀랐어요. 아버님이 아무런 질병이 없으시고,
    90 이란 연세가 무색하게 기억력도 좋으셨고, 그저 거동만 편찮으셨던 건데 이렇게 몇 달 만에 지력도, 체력도 다 소진되시다니…”

    어머님은 아버님이 독방을 쓰시게 된 뒤부터 그렇게 되셨다고 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던 사실.

    어머님의 치료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독실은 아버님을 세상과 완전히 유리시켜버렸고, 아버님은 그저 억지로 죽 먹고, 기저귀 갈려진 뒤, 완전한 정적 속에서 가만히 있어야 했었다.
    미국의 남편과 나에게 식구들은  “빠삐는 독실에 간 뒤 기저귀가 오히려 더 깨끗하다. 자주 갈아줘서. 이 요양원은 일을 참 잘한다”라고 했었다.
    그러나 독방에 들어가신 뒤, 아버님의 인지 능력과 언어 능력은 급속히 감퇴되었고, 우리와 아버님의 화상채팅은 무력하고 시선이 흐릿한 아버님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끝나곤 했다.
    (그런 상태에서 아버님이 ‘팜펨 어디 있니?’ 하고 찾으셨고, 그래서 내가 브러셀에 날아온 것.)

    지난 12 월에 활기차게 이야기를 하셨던 아버님이 단 석 달 만에 ’돌봐져야 하는 하나의 몸뚱이‘ 로 되어버린 것은 큰 쇼크이다.
    물론 ‘돌보아져야 하는 하나의 몸뚱이’ 도 소중한 존재이지만, 아버님의 경우는 아버님이 정신적/지적인 능력이 상실하여 하나의 ’ 몸뚱이‘로 되어버린 게 아니라, 아버님의 지적/영적/정신적 필요가 무시되면서 거의 순식간에 그저 하나의 ‘몸뚱이’로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친정아버지의 경험을 통해서 영적/지적/정서적인 자극과 돌봄이 육체의 건강에 끼치는 건강이 지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아버님의 수발에서 그런 형이상학적 차원에서의 돌봄은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그러나 내가 몰랐던 것은, 한 인간의 영적/지적/정서적 need에 대한 무지와 무시가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얼마나 빨리 신속한 육체적/정신적/지적인 악화로 치달을 수 있는가였다. 마치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기라도 한 듯, 아버님은 거의 순식간에 모든 능력을 상실하셨다. 남편과 내가 가까이 살았더라면 뭐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한이 남는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다.


    어머님과 오붓하게 오래 대화를 나누었다. 어머님이 속내를 다 털어놓으셨다.

    “나는 집에서 죽고 싶었어.
    그런데 그게 가능하지 않게 되었어.”

    “나는 내가 빠삐보다 먼저 죽을 지모르는 상황에 이를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어.”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경우는 좀 더 그랬다. 본인의 계획대로 모든 것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고, 어머님의 ‘계획’으로는 아버님이 먼저 가셔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님은 모든 게 인간의 의지로 가능하다고 믿으시는 분이다. 평소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바로 그런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어머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셨고, 본인보다 2 세 연상인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잘 돌봐드리고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계획“을 하고 계셨다.
    그래서 우리가 노후를 대비해서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으로 옮기시자고 했을 때 한마디로 거절하시며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집에서 혼자 사시다가 본인이 거동이 불편하게 되면 그때는 양로원으로 가겠다고 하셨다.
    아버님이 사고를 당하신 뒤 거동을 못하시게 되었을 때, 우리가 지금이라도 어서 집을 옮겨서 아버님이 휠체어로 산책을 하실 수 있게끔 하고, 어머니도 좀 편하시자고 했지만 그때도 어머님은 본인의 계획이 있었기에 우리의 제안을 거부하셨다. 어머님의 계획에 의하면 아버님은 오래 살지 못하실 것이었기에…(이미 2016 년,  캘리포니아 여행을 오셨을 때, 빠삐가 아주 건강하셨음에도 ”한 2 년 정도 후에 빠삐가 돌아가시면, 나는 양로원에 들어가도 돼”라고 하셨다.)

    그러나 모든 계획은 망그러졌고, 현재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계시는 어머님은 아버님을 돌봐드리지 못하는 게 큰 마음의 고통이었다.

    “내가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빠삐를 돌볼 텐데…. 나 혼자 뒤집어 눕는 것조차 못할 상황이니.
    나는 어떻게든 내가 빠삐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돌봐주고 싶었는데…“

    “어머님, 어머님 치료가 우선이지요” 라며 어머니를 위로했다.

    어머님은 ‘죽음’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삶이 이렇게 끝난다는 게 너무 허무해.  우리는 아주 행복하게 잘 살았는데, 우리의 삶은 아주 아름다웠는데…
    결국 죽음이 이렇게 만들어버렸네. “

    나는 ‘삶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세금’도 비싼 것이 아니겠느냐, 아름다왔던 것만큼 별리의 슬픔도 큰 것 같다’ 고 하며 어머니를 위로했다.

    나는 어머니께 남편과 주고받았던 말을 전해드렸다.

    ”어머니, 저희가 같은 나라에 살았더라면 저희는 분명 부모님을 모셨을 거예요.
    저의 친정 부모님 모셨듯이… 어머님과 아버님이 본마망을 100 세까지 모셨듯이…“

    그저 듣기 좋은 말로 들릴 수도 있는 말, 그러나 어머님가 우리의 진심을 믿어주고 있음이 느껴졌다.

    ”고맙다. “

    ”멀리 떨어져 살아서 아버님과 어머님이 가장 힘든 시간에 제대로 도와드릴 수 없어서 죄송해요”라는 나의 말에 어머님이 펄쩍 뛰셨다.

    “무슨 말이야, 팜펨.  그렇게 생각지 말아라. 오히려 너희가 멀리 살아서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어. 브러셀에 가까이 사는 자식들  집에는 가서 자는 일도 없고, 여행을 같이 할 기회도 없으니까.
    너랑 에릭이 우리에게 미안해하지 말기를 바라. 우린 고마워하고 있어. “

    “어머니, 감사해요.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우리가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요양보호사가 어머니 기저귀, 약 등을 챙겨드리기 위해 들어왔다.
    나는 어머니의 틀니를 칫솔로 닦아드리고, 충전된 핸드폰, 안경등을 어머니 손이 닿는 곳에 놓아드리고 나왔다.

    호텔까지 버스를 탈 수 있었지만 걸었다.
    생각하면서 걸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심심하기 그지없는 미국의 우리 동네와 달리 걸을 맛이 나는 브러셀 거리.
    나는 골목골목 천천히 걸으면서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호텔방에 돌아와 신발을 신은 채 소파에 누웠다.
    많은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엄마가 싸주신 건강 죽을 끓였다.
    달달한 죽의 향기가 호텔 방을 채웠고, 뜨거운 죽을 삼키면서 몸도 마음도 따뜻해졌다.

    잠이 안와서 창가의 의자에 앉아서 오랫동안 브러셀의 밤풍경을 감상했다.


    차를 마시고, 멜라토닌을 먹고 잠을 청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