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친척: 짐정리와 성찬
    카테고리 없음 2023. 3. 7. 06:16

     
     
    남편이 작년 11 월, 급히 벨기에로 떠났다.
    시댁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식구들은 저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여 부모님을 돕고 있었지만 그래도 할 일이 많았다. 뭐라도 도움이 되려면 직접 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님의 암이 온몸에 전이가 되어서 치료가 가능하지 않다는 진단이 나온 뒤 온 가족은 이제까지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즉, 어머님이 아버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상황--에 직면했다. 어머님은 당신이 떠나신 뒤에 아버님의 케어를 고려해 요양원에 들어가시겠다고 하고 당신이 살아계시는 동안 집을 처분하고 싶다고 하셨다.  시누이, 조카 두 명(시누이의 두 딸), 그리고 시동생은 각자, 그리고 어떨 때는 함께,  요양원들을 방문해서 부모님께 맞는 시설을 찾고 어머님을 모시고 가서 확인하는 작업을 담당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많이 자주 돌봐주었던 조카들은 20 년 전, 틴에이저 때 나에게 "할머니는 우리에게 제2의 엄마예요. 나중에 우리가 돌봐드릴 거예요" 했었던 성숙하고 다정한 아이들이다. 어머님이 항암 치료를 받을 때 번갈아가면서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기다렸다가 집에 모시고 오는 일을 자처했다. 자신들의 아이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브러셀에 자주 오기가 힘든데도 정기적으로 와서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고 있다. 평소에 말이 없으시고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차단하다시피 하고 사는 아버님도 조카들을 보면 미소지었다.  조카들은 방문하는 요양원들의 이모저모를 동영상을 찍어서 단톡방에 올려 다른 식구들도 볼 수 있게 해줬다. 밝은 스타카토 목소리,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농담,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리는 동영상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환하게 해주었다.

    부모님 집 근처의 시설이 준수한 요양원을 찾았고, 어느 주말, 시동생과 그의 자녀들, 큰아주버님의 아들, 큰 누이 부부, 조카 등 여러 사람이 부모님 짐을 옮겼다. 아버님 안락의자를 포함, 무거운 가구들이 있었는데 식구들끼리 알아서 옮겼다. 

    남편과 나는 식구들이 합동해서 일을 하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서 감탄하였고, 감사했다. 나의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서양 사람들도 그렇게 가족적인 사람들이 있구나" 라며 새삼스럽게 놀라셨고 "너의 시부모님은 좋으시겠다. 자녀들이 많아서 함께 다 일을 해드리니... 나는 너한테 온 짐을 지우고 있어서 너무 미안해." 라면서 눈물을 훔치셨다. 나는 나의 시부모님이 다복하시다는 말씀은 맞지만, 내가 엄마를 모시는 게 '짐'이라고 느끼지 않기 때문에 엄마의 생각이 옳지 않다고 말씀드렸다. 

    시부모님이 요양원에 옮기자마자 어머님의 원대로 가능한 한 빨리 집을 부동산 마켓에 내놓기 위해 식구들은 짐정리를 시작했다. 침대, 옷장, 냉장고 등 큰 가구들은 나누기가 쉬웠지만 70 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쌓인고 쌓인 수많은 물건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처분하는가는 큰 골칫거리였다. 거기에 더해서 게다가 요양원으로  옮기신 부모님을 위한 서류처리, 작은 가구 구입, 병원 방문은 물론이고 매일 지속적으로 옆에서 도와드려야 할 일들이 적지 않았다. 

    남편의 큰 형과 누나는 개인 사정으로 일주일에 한 번 부모님을 문병 오는 것 말고는 딱히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조카들을 포함 여러 사람들이 와서 시부모님을 돌봐드리고 있으나 지속적으로 매일 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부모님 케어의 총책임자인 시동생이 부모님의 모든 일을 다 주관하고, 매일 들러 안부를 확인하고는 있지만 그 역시  직장일로 바쁘기에 어머님은 시동생에게 부탁하는 것을 꺼려하셨다. 약국에서  '기침용 사탕' 구입, '새 양말 구입' 등 그날그날 필요한 것들을 가게와 약국이 여는 시간에 임박해 나타나는 아들에게 부탁하기가 미안한 게 당연했다.

    전화로 형제들과 여러 문제를 논의하고 시부모님과 자주 화상채팅을 해오면서 상황 파악을 해온 남편은 자기가 가서 도와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떠났다.

    브러셀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은 온라인으로 직장 일을 하면서 시부모님을 돌보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부모님에게 가서 하루를 보내고, 부모님을 방문하는 친척들과 만나고, 오후부터 캘리포니아 시간에 맞춰 직장 일을 시작해 늦게까지 일을 하니 그의 하루는 아주 길었다.

    시어머님이 나에게 수차례  "에릭이 온 게 큰 힘이 된다. 내게 필요한 일들을 에릭이 하나하나 다 해결해주고 있다"라고 하셨다. 약간 우울증 증상이 있으시던 아버님이 에릭이 온 뒤에 밝아지셨다고도 했다.   그 말에 에릭도 나도 보람을 느꼈다.
    ----
     
    남편은 원래는 부모님 집에 머물 계획이었으나 이틀 만에 호텔로 옮겼다. 부모님 집이 너무 썰렁하고 어수선해서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고 했다. 호텔 음식이 좋고, 방도 아주 쾌적하지만, 그는 전체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잔다고 했다. 

    공감할 수 있었다. 나도 2016 년, 한국의 부모님 집 정리를 하러 갔을 때 도저히 부모님 집에 머물 수 없어서 호텔에 머물렀었다. 부모님 집 근처 인덕원의 호텔에 투숙했었는데, 이제까지 지나가기만 했지 건물에서 내려다본 적이 없던 인덕원의 거리를 하염없이 내려다보던 기억이 있다. 새로운 광경이었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항상 마음의 고향으로 든든했던 '친정'이 곧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잠을 못 이루고 창밖을 오래오래 내뎌라보고 있었던 나에게 미국, 우리 동네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쉴 새 없는 자동차들의 물결, 반짝임, 간판,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로 붐비는 밤거리--가 벗이 되어주었다. 아침 일찍, 커피 한잔 마시고는 택시를 타고 부모님 집으로 가서 문을 열었을 때 거실, 방, 부엌, 공간을 다 물건들이 채우고 있음에도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부모님이 없는 친정집은....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남편은 "당신이 겪은 일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나는 상상도 못 했어. 당신은 항상 cheerful 하게 '모든 일이 다 잘 진행되고 있다'라고 해서..."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남편에게 당시 나의 마음을 이야기한 적은 없었던 것같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나 스스로도 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해야할 일들이 내가 느끼는 감정보다 훨씬 더 중요했으므로….부모님 짐정리에 대해서도 오래 이야기를 했다. 그는 매일 부모님 집에 들러 조금씩 짐정리를 하려고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짐이 너무 많아서 아무리 정리를 하고 쓰레기를 버려도 자리가 안 난다고 했다. 나는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했다.

    "집정리는 한 번에 해야 하는 것 같아. 찔끔찔끔하다가는 5 년도 걸릴 수 있더라고.“  (실제로 내 친구, 프리씰라는 부모님이 2017 년에 돌아가셨는데 아직도 부모님 짐정리를 못 끝내고 있다.) 

    남편이 유난히 밝은 목소리로 전화한 날은 브러셀에서 떨어진 곳에 사는 형이 기차를 타고 와서 남편의 머물던 에어비엔비 숙소에 이틀 묵었을 때였다.

    ”형하고 집에 가서 같이 일하고 나서 집으로 가는 대신 내 숙소에 와서 잤어. 둘이 저녁 해먹었어. 형하고 단둘이 오래 이야기를 나눈 적은 지난 30 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야. 한집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니까 좋네."라고 했다.

    며칠 후에 또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이번에는 브러셀  근교에 사는 누이와 매형이 와서 종일 함께 짐정리를 했다고 했다. 짐이 워낙 많아 하루 종일 일을 해도 그 결과가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남편은 혼자 일 할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결혼이니 직장이니 바빠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가 누나랑 옛날 이야기 하면서 짐정리를 하니 덜 적적하기도 하고, 서로 위로도 되었음이 분명하다.

    어느 주말에 온 형제가 다 모여서 같이 대대적인 짐정리를 할 계획이 세워졌다. 남편은  "그날 버릴 수 있는 데까지 버려서 집을 텅 비게 만들 거야"라고 결의를 다지더니만 나에게 물었다.

    "팜펨, 당신, 옛날에 당신 오빠의 유품 정리랑 어머니 아버지 집의 짐 빼고, 집 팔고 하는 일, 어떻게 혼자 했어? 이거 해보니까 보통 일이 아니네..."라고 했다.

    나는 "내가 혼자 하지 않았어. 친구들 도움이 있었지"라고 했다.

    오빠의 유품 정리만 내가 혼자 했지 부모님 집을 내놓기 위해서 짐 정리할 때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집을 부동산 마켓에 내놓기 위해 짐정리를 하러 한국에 들어갔을 때는 한 나절, 친구 두 명이 와서 도와주었고, 집을 팔고 짐을 다 빼기 가지의 모든 과정에는 친구 J 가 있었다.  부모님의 은행 잔고 정리와 부동산 매매는 친구 J의 도움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며칠 후 토요일, 남편에게서 사진이 왔다. 짐정리를 위해서 모인 식구들의 일부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찍은 사진이었다. 형, 누나, 매형, 시동생, 남편, 이모님, 그리고 조카.... 다섯 명이 부모님 부엌의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편안한 표정이거나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동네에서 가장 잘하는 이태리 식당에서 피자를 주문할 것이라고 하더니만 다들 각기 다른 피자 한 판씩을 앞에 놓은 채, 와인잔을 높게 들고 건배를 하는 모습은 시부모님의 짐정리가 유품정리와 다를 바없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그저 어떤 가정의 행복하 식탁으로 보였을 사진…

    그 사진은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이제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을 보는 순간 느껴지는 놀라움.

    '부모의 집정리를 저런 식으로 할 수도 있는 거구나 형제자매가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면서, 추억을 되살리면서, 현재를 즐기면서.... 저게 가능한 거였구나!' 

    나의 삶은 물론이고 내 또래 친구들의 부모님 유품 정리 이야기 중,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내가 부모님 집 정리할 때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 당시의 일들은 다 특별한 경험이어서 언제나 기억이 생생한데, 사진의 영향으로 그 기억이 소환되는 순간 이제까지 내 가슴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던 여러 감정들이 휘저어졌고 내가 ‘씩씩하게' '척척' 일을 해치우는 과정에 무의식적으로 묻어두었던 그 감정들이 갑자기 솟구쳐 올랐다.  눈물이 났다.

    나는 남편의 사진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팜펨, 너, 울어도 돼. 울어도 돼. 울어야 해. 이렇게 우는 게 필요했었어...“ 라면서 나 스스로를 다독였다.

    --

    부모님이 살아계시든, 돌아가셨든, 부모님의 집 정리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을 떠난 지 30 년이 되어가던 나에게는 부모님의 집정리는 '친정'의 상실이었고 그것은 내가 세상 어디에 있든 간에 나를 한국에 단단히 엮어주고 있던 고리가 부러지는 것을 의미했다. 친정은 내가  '한국에 가고 싶은' '한국에 가야 하는' 가장 큰 이유였으니까.. 나는 그 상실을 적절히 애도하지 않았었다.  

    나만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자신이 감정이 풍부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 상황에서는 나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자기의 풍부한 감정의 표현을 허락했다간 감정의 홍수에 익사할 수 있으니까…..그랬다간 더 큰 일이 벌어지니까….

    앞서 말했듯이 두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짐정리와 집매매 과정에서 나는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강 씨 가족 구성원으로서는 나 혼자 부모님 짐 정리를 했다. 우리 가족의 독특한 상황 때문에 나와 함께 집/짐 정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오빠가 몇 해전에 돌아가셨고, 언니는 미국 타주에 살고, 부모님은 미국 우리 집에서 살게 되셨고, 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하셔서 엄마와 나의 수발을 받으셔야 하는 상황이어서 나 혼자 한국에 가 짐정리, 집처분을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일주일 내로 모든 일을 끝내고 미국에 가서 아버지 수발을 들어야 했다. 한국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일들을 처리하면서 나는 어떠한 감정이든 '감정'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해치워야 할 일들만 있었다. 그래서 나는 ‘친정의 상실’ 나를 돌봐주는 부모의 상실’ ‘부모의 보호자로서의 책임’ 등등의 변화가 불러일으키는 여러 감정들, 나의 emotional need를 무시해 버렸다. 

    감정의 억제는 꽤 성공적이었다. 부모님 집의 물건들을 꺼내어 바닥에 내려놓는 큰 작업을 도와준 뒤 혼자 짐정리를 해야했을 때였다. 이틀 후에 출국인데 이 짐들을 어떻게 하나 잠시 아득했지만 나는 재빨리 내가 해야할 일을 정했다. 내가 버릴 수 있는 한 버리고, 쓸만한 것들을 사촌들이 가져가게 하거나 재활용센터에 갖다 두자!

    거실, 방 세 개, 부엌, 심지어 화장실까지 발 디딜 팀 없이 짐들은 쌓이고 깔려 있었는데 그 와중에 함부로 물건을 버리면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생길까 봐 나는 물건들의 심리적 가치를 하나하나 매겨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물건들의 역사를 생각하다 보면 여러 추억들이 떠오르기 마련. 그러나 그 추억은 어떤 '감정'도 유발하면 안 되었다. 내가 무너지면 안 되니까... 그래서 나는 감정 없는 로봇처럼 데이터를 분석하고, 그 가치를 정의했다. 

    "이건 엄마의 공부 기록, 미국행. 아버지 옛날 안경은 미국행.  엄마가 태능에서부터 갖고 온 드레스는 유행이 너무 지났으니 버림. 엄마가 언니 결혼식 때 사용한 뷔페 그릇은 버림. 식기들은 사촌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옆에 보관. 컴퓨터 의자는 또 다른 사촌이 쓸지 모르므로 보관. 아버지의 40 년간 쓰신 책받침은 무조건 미국......

    보관, 처분, 보관, 처분.... 기계적인 분류 작업에 감정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고 그 어떤 물건도 나를 센티멘탈하게 만들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고, 아쉬움도 없었고, 그저 나는 이 일을 빨리, 잘 끝내고 돌아가 아버지 수발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뿐이 없었다. 

    재활용 가치가 있는 물건들을  아파트 지하의 재활용품장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층의 부모님 집에서 지하까지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품에 한가득 짐을 안은 채 내려가야 했다. 자정부터 새벽 3 시까지 잠시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새벽 다섯 시경 경비원 아저씨가 나타났다. 

    지하실 불이 자꾸 켜졌다 꺼졌다 해서 이상해서 왔다고 하더니 우리 집 거실의 물건들을 보더니 입이 떡 벌어졌다. 그는 내 처지가 안되었는지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했다. 한 사람이 더 있으니 일이 빨라졌다. 물건이 많이 나갔고, 재활용장에 보내기 전 아버지 옷 중 마음에 드는 모자, 재킷, 바지 등등을 가지 가시라고 하니 아저씨가 좋아하며 본인을 위해서, 지인들을 위해서 물건들을 따로 챙기셨다. 나는 아저씨의 경비 업무에 지장이 있을까 봐 6 시경, 아저씨께 돈봉투로 감사를 표시하고 재활용 물건 처리 작업은 중지했다. 한 시간 동안에 아저씨가 도와준 덕에 거실이 많이 비워졌다. 얼마나 감사하던지...

    일하는 내내 나는 유쾌했고, 밝았고, 즐거웠다. 엄마한테도 씩씩하게 전화했다. 일이 척척 잘 진행되고 있다고...
    내가 감정에 압도된 것은 단 한 번, 몇 개월 후 다시 한국에 들어가 집을 매도하고 완전히 집을 비우는 작업을 할 때였다.

    이번에는 미국에 부칠 것과 처분할 것들을 분류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다시금 '물건들의 정서적 가치'를 매기는 작업을 치렀다.  나는 유경험자답게 척척 짐들을 분류해서 이삿짐 센터에서 짐 포장하기가 편하게끔 해두었다.  

    포장이사 날이었다. 친구 J가 직장에서 휴가를 내어 나를 도와주러 왔다. 일꾼들은 역시 기계적으로 척척 일을 참 잘했고 나는 만족스러웠다. 인부들이 엄마 아버지의 낡은 자개 밥상을 그들이 포장하는 순간이었다. 칠도 약간 벗겨지고, 나사도 빠져서 미국에 가서 쓸 수 없고 목수를 불러 손을 봐야 하는 그런 낡은 밥상인데, 짐꾼들은 고급 가구도 아니고, 쉽게 깨지는 물건이 아니니까 밥상을 거칠게 다루었다. 그들도 나도 '척척' 일을 하고 있었지만 짐에 대한 우리의 마음 가짐이 얼마나 다른가를 실감한 순간이었다. '저렇게 하는 게 당연하지.... 아저씨들한테는 그냥 버려도 될 물건으로 보일 테니까...'라고 생각하며 지나쳤다.

    그런데 그들이 안방의 옷장을 망치와 도끼를 사용해서 거침없이 부술 때는 달랐다.  내가 4 살 때 태능에서부터 여러 집을 전전하면서 항상 안방을 차지해 왔던 옷장을 쾅쾅 내려치고, 나무가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마치 누가 나를 강하게 후려치기라도 한 듯 나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재빨리 상황 판단을 한 친구 J 가 '언니, 나가자!'라고 나를 이끌어주어 우리는 동네 카페에 갔고 거기서 나는 마음을 진정했다. 끔찍한 현장에서 나를 구해준 친구에게 너무도 고마웠다.

    경비 아저씨가 와서 도와준 이야기, 장을 부술 때 내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는 이야기를 나는 생생하게 부모님께 다 해드렸다. 온갖 디테일까지 넣어서, 유머까지 넣어서, 이미 다 잘 지나간 일로 포장을 해서….

    ”엄마, 생각해 봐. 경비 아저씨가 우리집 문이 열리는 순간, 짐더미 속에 머리 풀어헤친 내가 나타났으니, 그게 귀신이지!" 부모님은 하하하 같이 웃으셨다.
    내가 기억하는 감정도 상세히 묘사했다. ”옷장 부서질 때는 너무 놀라서 바닥에 주저앉았어요.  덜덜 떨렸어요. J 가 카페에 데리고 가 줘서 그 상황에서 벗어났어요.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라는 식으로...

    그 모든 게 할만한 일이었고 당연한 일이었으며 , 다 지나간 과거였고, 그 때 느꼈던 감정들도 이미 다 정리가 되어 과거 시제로 분류가 되었었다.
    슬픔, 아픔? 그런 건 안 느껴졌다.

    그런데 그렇게 잘 정리되어 보관되어 있던 과거의 사건들이 왜 갑자기 나를 뒤 흔드는가? 
    마치 죽은 새의 피와 내장을 제거하고 만든 새의 박제에 갑자기 피가 돌아 새가 날개를 퍼덕이는 것같이 놀랍고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애초에 나의 기억은 ‘박제품‘이었다. 나는 과거의 일들을 생생하고 리얼하게, 온갖 디테일까지 다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복잡한 감정이나 사고를 다 제거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객관화 함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내장을 빼고 골격에 보정물을 넣어 생생하게 살아있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그러나 죽어있는 박제 동물처럼....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 때문에 내 감정의 박제는 수월했다.  노년에 원치 않는 이민을 하여 병시중을 받게 된 아버지와 그 모든 상황을 너무도 괴로워하시던 부모님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나는 어떤 감정도 강하게 느끼면 안 되었다. 나의 신앙심이 바탕이 된 들장미 소녀 캔디, 함경도 또순이의 긍정성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부모님 집 정리를 하고 미국에 돌아온 뒤 나의 삶은 바빴고, 나는 그런 거려니... 잘 이겨냈네... 하고 지나갔던 것이다.

    적절히 돌보아지지 않고 치유되지 않은 심리적 상처는 언제든지 다시 돌아오는 법.

    남편의 사진을 보는 순간, 억제하고 제거했던 감정들이 다 살아나 눈물을 훔치면서 나는 오빠와 언니를 그리워했다.. 오빠가 살아 있었더라면... 언니랑 내가 한국에서 살았더라면, 언니와 내가 미국에서 멀리 떨어져 살지 않았더라면, 부모님과 우리가 한국에서 살았더라면... 등등 전혀 가능하지 않은, 내 아픔이 방지될 수 있었을 가상의 상황을 상상하였다. 부질없는 짓인지 알면서도...

    언니와 오빠는 짐정리를 하면서 '척척' 일을 하는 이삿짐 아저씨들과는 다르게 쓰레기로 보이는 물건에서 보석같이 찬란한 기억을 발견할 수 있고, 손 때가 묻은 물건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므로.... 내가 혼자서는 감히 할 수 없었던 추억 여행, 그것을 함께 할 수 있었을 테므로...오빠와 언니가 그리운 이유였다.

    남편의 사진 덕에 나는 눈물을 뽑았고, 며칠 많은 생각을 했고, 서서히 내 감정의 소용돌이가 가라앉았다. 나의 감정도, 생각도 정리되었다. 잠시 힘들었지만 내가 미처 몰랐던 단순한 사실, 그리고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된 것은 만족스러웠다.

    나의 생각을 정리해보면….

    부모가 생존했을 때라도 자식의 부모의 짐정리는 일종의 유품정리이고 그 부모가 이루어낸 한 가족의 삶의 종료를 의미하기도 한다.  작별이며, 상실이고, 일종의 죽음이다. 그래서  한 가족의 삶의 종료/죽음은 어떤 죽음과 마찬가지로 적절한 애도와 위로가 필요하다. 나는 부모님 짐 정리가 '일종의 유품정리라는 의식은 있었으나 그것을 수반하는 복합적인 감정들을 제대로 직면하고, 애도하고, 다스리지 않았었다.  그저 들장미소녀 캔디처럼, 밝게, 긍정적으로, 모든 일을 척척 처리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사진 속의 남편의 형제, 누이가 피자를 먹고, 와인을 마시면서 이게 '가족의 종말에 대한 애도'라고 생각할 리는 없다. 그러나 나의 눈에는 그들의 모습 '떡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는' 성찬과 같이 보인다. 기독교에서 성찬은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되살리고, 예수와 하나가 되는 의미와 함께 '성찬에 참여하는 이들이 하나가 되는' 상징을 담고 있다. 하나가 되는 기쁨, 나는 그것을 피자와 와인을 나누는 남편의 가족들의 모습에서 보았다. 가족 구성원으로서 함께 짐을 나누면서 슬픔이 덜어지기에 지을 수 있는 평안한 미소. 억척스럽게 혼자 거침없이 전진하던 나의 미소와는 사뭇 다른 평안한 미소...나는 사진 덕에 공동체로서의 가족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오빠와 언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내가 지난 7 년간 묻어두었던 감정들을 남편의 사진 덕에 다시 대면하고, 돌보게 된 것은 참 다행이다. 부모님의 수많은 짐들을 성공적으로 분류했듯이, 나의 여러 감정들도 제 자리에 분류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노령의 세 분의 어머니와 아버님의 노화와 죽음을 준비하는 지금 싯점에서 옛날의 슬픔들을 적절히 돌보아 치유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기에 더더욱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한 가지 숙제가 생겼다. 지난 해부터 나는 60 이 넘은 부모로서 죽음에 대한 생각과 준비는 당연한 책임이라고 믿고 열심히 짐정리를 해왔다. 그런데 이번의 일을 통해 이제 내가 열심히 짐정리를 해서 아이들이 짐정리를 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 말고도 아이들과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음을 깨달았다. 가까이 친척이 없이 단 둘인 나의 아이들이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남편과 나는 은퇴 후에 어디서 살게 될지 모른다. 아직 20 대인 아이들도 직장 때문에 어디서 살게 될지 모른다. 커다란 땅덩이 미국에서 온 가족이 멀리 떨어져 살게 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내가 태평양 건너가 부모님 집/짐 정리를 했듯이 나의 아이들도 멀리 떨어져 살다가 우리가 아주 많이 늙었을 때 간병 문제로 고민할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죽은 뒤 짐정리도 멀리서 살다 와서 해야 하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있다.

    가까이 사는 친척 없이 아이들 둘이 겪어내야 하는 부모의 죽음과 집정리. 지금으로서는 아주 먼 훗날의 일로 보이지만 아이들이 한 번은 생각해 두면  분명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보다는 나중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싶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할 작정이다.

    '엄마도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부모의 짐정리, 집정리도 일종의 죽음이더라. 언젠가 너희들도  '4 명의 핵가족이 이룬 공동체로서의 우리 가족의 생명의 종료를 맞이할 거야.  '부모의 집이 상징하는 고향의 상실'도 애도를 해야 할 거야. 슬픈 일이지만 떡을 떼고 와인을 나누면서 공동체 의식으로 함께 하면 슬픔이 덜해지고, 가족으로서의 연대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것 같더라.' 라고....

     

     
     
     
    (나도 12 월, 부모님을 뵈러 브러셀에 갔다. 요양원에 가는 길, 남편이 뭔가 픽업할 게 있다고 해서 부모님 집에 들렀다. 나는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남편이 의아해했다. '추운데 집에 들어와서 기다리면 안 돼?'라고 물었다. 나는 거절했다.  털모자를 푹 눌러쓴 채, 호주머니에 손을 꼳고, 발이 얼지 않게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밖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큰 짐을 다 뺀 뒤에도 아직도 남아 있는 짐들이 엄청 많은 상태라고 들었고, 어지럽혀진 부모님의 집을 볼 엄두가 안 나서였다. 박제되었던 한국의  기억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깨달았다. 감정의 트라우마는 어떤 식으로든 남아 있다가 불쑥불쑥 나타나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는 사실을... 그러나 사흘 뒤 부모님 집에 들어가 3 층 건물을 천천히 순례하면서 어머니가 나에게 남겨주신 물건들을 소중히 품에 안고 나왔으니 all is well! )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