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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핵가족 이민자의 '미니' 대가족
    카테고리 없음 2023. 2. 21. 17:17



    친척이란 참 소중한 존재이다. 일 년에 한두 번 명절에만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밥을 먹는 관계든, 자주 교류하면서 친하게 지내든, 함부로 끊을 수 없는 친척이라는 운명적 관계가 참으로 소중한 것임을 나는 핵가족 이민자로 살면서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남편과 나는 결혼하자마자 멀리 떨어져사는 벨기에-한국 식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우리는 매년 번갈아가면서 벨기에-한국을 번갈아가면 방문했고, 양가 부모님들은 매년 미국에 오셔서 적어도 한 달씩은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하셨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우리가 벨기에/한국을 방문하는 것보다 양가 부모님들이 미국 여행을 오시는 게 그들에게 더 즐거운 일이다 싶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한국 여행, 벨기에 여행 횟수가 줄어들었다.


    특히 나의 경우, 친척들과의 긴밀한 관계가 최근들어 어려워졌다. 미국의 타주에 언니 가족이 살고, 사촌 가족도 있으나, 워낙 거리가 멀다 보니 자주 왕래하지 못한다. 한국의 친척들과는 가끔 안부를 주고받지만 본 적이 오래다. 아이들이 청소년기에 한국 여행을 할 계획이었는데 2013 년 오빠가 돌아가신 뒤 아이들과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을 할 처지가 되지 않았고, 2015 년 부모님이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된 뒤로는 아이들과 한국에 갈 계기가 없어졌다. 장성한 아이들은 어렸을 때 본 한국의 친척의 얼굴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한다.


    나와 달리 남편은 벨기에에 부모님은 물론 누나, 형, 동생 등 직계 가족이 있다. 부모님 부양 문제로 벨기에 식구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고 있고, 조카들이 우리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인데다, 아이들이 성장한 뒤 벨기에를 몇 차례 방문했기에 아이들은 고모,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수많은 사촌들과 꽤 우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벨기에의 친척들의 위기 상황이라던가 비극적 사건에도 아이들이 큰 충격을 받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우리가 친척들과의 운명공동체적 공감대에서 얼마나 유리되어 있는가를 깨닫고 있다.


    한 예로 남편의 형이 몇 년 전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였다. 충격을 받은 남편은 즉시 벨기에로 갔고, 나는 남편을 도와주려고 일주일 후 벨기에로 갔다. 깊은 시름에 빠진 벨기에 식구들은 똘똘 뭉쳐서 시간을 정해 문병을 하고, 서로를 위로하고 독려하면서 힘든 시간을 이겨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큰아버지 소식을 전해주려고 문자를 했을 때 나는 아이들의 '감정의 온도'가 너무도 차가워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평소에 건강하던 큰아버지가 사경을 헤맨다는 사실에 놀라고 걱정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벨기에 식구들이 느끼던 슬픔과 근심과는 거리가 한참 먼 미지근한 감정이었다.


    2 년 전, 쟈닌 이모할머님이 안락사를 택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미국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안락사로 이모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기에는 그들은 쟈닌 할머니에게서 아무런 감정적인 연결 고리가 없었다.


    아이들의 삶/의식에 '친척'이란 존재가 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게 첨예한 문제로 느껴진 것은 최근 시어머님의 병세가 악화된 이후다. 시부모님은 아이들과 매년 정기적으로 만났기에 나는 아이들에게 시부모님의 자리가 삼촌이나 쟈닌 할머니보다는 더 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작년 11 월 남편과 내가 시부모님을 뵈러 급히 벨기에에 가기로 했을 때였다. 거동이 불편하신 시아버님을 암환자인 어머니가 돌볼 수 없어서 급기 assisted living 시설에 옮기신 뒤, 온 식구가 급격히 변하는 상황에 약간 패닉 상태였다. 서둘러 비행기 표를 찾으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친할머니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태야. 아빠가 먼저 벨기에 가고, 엄마가 나중에 따라갈 거야"라고 문자를 보냈을 때 아이들의 반응은, '오, 정말?! 너무 안타까워요' '할머니가 떠나시면 할아버지는 어떻게 해요?' '아빠, 힘내세요'였다. 그들의 문자는 분명 '다정했지만' 벨기에 식구들이 느끼고 있는 패닉, 안타까움, 슬픔은 없었다.


    나는 의아했다. 아이들이 외조부모에 대한 태도와 너무도 달라서였다. 몇 년 전, 외할아버지가 위독하셨을 때 첫째아이는 전화로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아무 말 못 하고 가만히 있다가 간신히 '금방 올라갈게요'라고 하며 전화를 서둘러 끊었다. 그런데 전화기가 끊어지기 전에 그가 눈물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둘째 아이는 당시 워싱턴디씨에서 인턴을 하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고는 버스/지하철 타고 출근하는 중 엉엉 울어서 주위 사람들이 어쩔 줄 몰랐다고 한다. 그날 오후 비행기를 타고 와서 곧장 할아버지 병실에 와서 할아버지 손을 잡고 오래오래 앉아 있던 딸.... 그 후 추모식을 할 때도 슬픔을 이기지 못해 오열을 했던 아이들...


    그런 걸 보면 아이들이 매정하거나 차가운 스타일은 아닌데, 왜 벨기에 할머니의 소식에 충격을 받거나 슬픔을 느끼지 않는 걸까? 어려서부터 거의 매년 같이 여행을 하고 시간을 보낸 조부모인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벨기에 방문한지 얼마 안 되어 자연스럽게 찾게 되었다.
    브러셀에 도착한 당일, 시부모님이 계시는 요양원에 가 회포를 풀고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시동생의 아들 앙뚜완이 불쑥 방에 들어섰다. 22 살의 대학생. 훤칠한 키에 긴 재킷을 입은 멋쟁이 조카의 예고 없는 방문! 우리는 모두 "앙뚜완!" 하고 외치며 반색했다. 앙뚜완은 마치 유명 영화배우가 팬들의 환호에 대답하듯이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눈웃음과 키스를 날릴 뒤에 한 사람 한 사람 따뜻한 허그를 해주었다. 그리고는 수다.
    "오늘 시험 끝났어요. 잘 본 것같아요.....좀 피곤해요. 며칠 일이 많았어요.... 아, 팜펨, 나 어떤 아르바이트하는지 모르지요? 한번 알아맞혀 봐요.... 정육점에서 고기 잘라요. 그 일 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 쉽게 일을 찾았고 보수도 좋아요. 새벽 5 시에 가서 일을 해야 해요. 그러나 내가 자른 고기들이 오늘 브러셀의 식당들에 배달되어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요."
    생글거리면서 수다를 떠는 조카가 사랑스러웠다. 저녁 시간이 되어가는데 배가 고프지 않냐고 물었더니, 또 와다다다 수다로 대답한다.
    "이미 먹고 왔어요. 여기 오기 전에는 꼭 먹고 와요. 식사 시간에 와도 밥을 주지 않으니까요. 방문객은 미리 예약을 해야해요. 지난번에는 점심시간에 들렀는데, 예약을 해두지 않아서 저는 할머니 할아버지 식사하시는 옆에서 구경하다가 너무 배가 고파져서 뛰어나가 샌드위치를 사 와 먹었더랬어요."
    오... 그럼 오늘만 온 게 아니라 자주 들리는구나.
    앙뚜완은 항암치료로 머리가 다 빠져서 스카프를 쓰고 있는 시어머니께 "할머니, 그 스카프 잘 어울려요"라고 하고, 귀가 잘 안 들리는 할아버지께는 크고 천천히 "오늘도 아르바이트했어요" "시험 잘 봤어요"라고 이야기했다. 시어머니도, 시아버님도 하하 웃으신다. 우울하던 시부모님을 저렇게 소리를 내어 웃으시게 할 수 있는 것은 손자의 기적이다. 푸릇푸릇 싱싱한 젊은 에너지가 무겁고 어두웠던 방의 분위기를 한순간에 밝고 활기차게 만들어주었다.
    앙뚜완과 시부모님의 대화를 바라보면서 우리 아이들이 생각났다. 우리 아이들은 지나가다가 '할머니 할아버지 생각이 나 들렀어요' 라고 방문을 할 수 있을까? 자발적으로? 책임감으로 방문할지는 모르지만 '그냥 보고 싶어서...'의 이유로 방문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건 확실하다.
    우리 아이들은 분명 자기들도 친조부모를 '사랑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아주 포괄적인 개념이다. 앙뚜완처럼 일상적으로 친조부모님을 보고 자라지 않았고, 그날의 일상을 시시콜콜 이야기한 적도 없으며, 시부모님이 힘드실 때 자기들이 뭔가 하려고 희생해 본 적도 없으니, 그들의 '사랑'은 테스트된 적도 없고, 증명된 적도 없는 추상적 감정일 따름이다. 사랑이 추상적이니 슬픔도 추상적일 수밖에...

    추상적 친척 사랑, 모호한 감정.... 그게 핵가족 이민자인 우리 가족이 친척과 맺고 있는 관계의 현실이었다. 우리 가족은 자연스러운 일상 속에서 자라는 친척과의 친밀하고 끈끈한 관계에서 소외되어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기껏해야 1 년에 한 번, 한달 미만의 짧은 친척 방문, 식사 몇 번을 하는 게 전부인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자주 만나거나 반복적으로 만나 삶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맺는 촘촘하고 단단한 인간관계에 끼어들 수 있겠는가. 우리가 방문하는 동안 친척들이 우리를 배려해 주고 매사에 포함시켜 주려고 노력을 함에도 한계가 있다. 나는 불어로 이야기하는 게 좀 수월해 원어민들과 비슷한 박자로 수다를 떨 수 있다지만, 불어를 잘 못하는 아이들은 재빨리 진행되는 원어민들의 수다에 까어들기는커녕, 알아듣지도 못하는 때가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보니 나의 아이들은 친척이라면 다 공유하고 있는 조상님 이야기, 가족의 역사, 개개인의 성격,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잊지 못할 사건, 식구들만이 아는 농담 등등, 친척을 가족으로 엮어주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놓치고 있다. 잘 모르는 주제, 이해하기 힘든 주제에는 저절로 관심도 없어지기 마련이었다.

    벨기에 여행이 끝나고 미국에 돌아온 뒤 아이들은 다른 휴양지를 다녀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치 몇가지 잊지 못할 추억만을 간직한 채 자기들의 바쁜 삶으로 돌아가곤 한다. 벨기에 친척들과의 경험은 일시적이고, 기억은 단편적이다. 나와 남편을 통해서 벨기에 사는 친척, 타주에 사는 친척들의 소식을 가끔 듣는 아이들에게 친척 이야기는 먼 나라 뉴스와 다를 바 없다. 인스타그램이니 페이스북으로 사촌들끼리 대화를 주고받곤 하지만, 그것도 일상적인 일은 아니며 자기 또래가 아닌 삼촌, 고모, 조부모와는 대화를 주고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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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벨기에에서 돌아온 뒤 3 주 후, 시어머니는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었다. 화상채팅을 할 때마다 남편과 나는 충격을 받았다. 하루가 다르게 어머니 건강이 퇴락하는 게 보였다. 머리는 완전히 빠지시고, 음식을 섭취할 수 없이 간신히 요구르트 한 팩, 쥬스 등으로 연명하고 계셨다. 대화를 하려고 해도 기운이 없으셔서 제대로 인사도 나눌 수조차 없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이들에게 문자를 했다. "벨기에의 할머니께서 지금 항암치료가 효과가 없어서 중지하고 호스피스 케어를 받으실 예정이야. 그럼 얼마 사시지 못할 것같아. 우리 다 마음의 준비를 하자."

    그런데 '준비를 하자'라는 말이 필요가 없었다. 아이들은 이미 할머니가 언제고돌아가실지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듯했다. 당장 그들에게서 온 문자가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오, I'm so sorry to hear that!'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괜찮으시더니 그렇게 빨리 악화되셨어?' '아빠는 괜찮은 거야?' '엄마, 이 힘든 시간에 사랑을 보내요' 등등, 그들은 나와 남편을 챙겨주었지만 정작 할머니와의 사별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덤덤했다. 아이들은 할머니의 죽음을 슬픔을 이기려고 노력해서 마음의 준비하는 게 아니라 감정적인 거리 때문에 저절로 준비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할머니가 편찮으실 때 웅원의 문자를 보내드려라. 너희들 얼굴을 보지 못하는 할머니께는 큰 격려가 될 거야."라고 당부했다. 며칠이 지나 확인해 보니 아이들은 할머니께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아이들이 갓난아기때부터, 볼 때마다 열심히 사랑으로 돌봐주셨던 친할머니인데, 죽음 직전에 계시는 분인데도 이렇게 무심할 수가 있다니... 놀라웠다.1 년에 한번 만나는 것으로는 충분히 사랑을 쌓을 수가 없었던 건가.

    생각해 보니 아이들과 시부모님과의 관계는 언제나 약간은 ’ 손님‘과 ’ 주인‘의 관계의 반복이었다. 호감이 있으나 거리가 있는 관계. 시부모님이 우리 집에 오실 때 아이들은 '손님'인 부모님께 잘해드렸고, 우리가 시부모님 댁에 갈 때는 시부모님이 '손님'인 아이들에게 많이 베풀어주셨으니 호감의 관계였다. 사랑에 가득 찬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시는 시부모님의 시선은 이미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둔 미소였다. 대화에도 한계가 있었다. 일상적인 안부, 그 이상으로 대화가 진행된 적이 없다. 즉, 아이들은 한 번도 자기들의 친구 이야기를 조잘거리거나, 자기가 뭘로 당혹하고, 뭘로 기쁜지를 할머니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벨기에 조카들이 시부모님과 맺는 관계와는 너무도 달랐다. 시부모님과 벨기에 조카들이 그 자연스럽고 편안함, 인간대 인간으로서 소소한 디테일까지 다 나누는 대화, 우리 아이들은 경험하지 못했다.
    얘들은 친할머니의 죽음보다 바로 옆집에 사는 강아지, 매일 마주치는 길고양이, 혹은 인스타로 매일 만나는 유명 가수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애도할지도 모르겠구나... 라는 생각에 착잡해졌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었다. 아이들 책임도 아니고,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닌 이민자의 상황…
    아이들에게 조부모에 대한 사랑과 슬픔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놓치는 것은 크다 싶었다. 인생에서 정기적으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많지 않은 사람들 중의 하나인 조부모의 사랑을 그만큼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조부모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그들과의 사별을 두려워하고, 세상을 떠나신 뒤 온전히 아파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주고받은 사랑이 컸음을 의미한다. 아픔을 통해서 확인되는 사랑의 크기가 있지 않은가…

    며칠 후, 시어머니와 화상채팅을 하였다. 수척하고 쾡한 얼굴, 어지러워서 눈을 감고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운명하신 뒤의 모습 같아서 섬뜩했다.


    남편과 나는 화상 채팅을 할 때마다 사진을 찍는데 그날도 사진을 찍었다. 찍으면서 마음이 안좋았다. 나중에 이 사진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미리 상상이 되었다. 나중에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든 생각...'우리 아이들과 달리 벨기에 조카들은 할머니의 이런 모습을 직접 보고 있구나....'


    조카들이 각각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연민, 슬픔, 감사, 삶의 무상함, 인간의 무력함 등등 중 뭔가 한 가지 생각을 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또한 죽음에 맞닥뜨린 할머니의 모습은 아이들 각자 이겨내야 하는 충격임은 분명하다. 암투병을 하고 있는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조카들에게 할머니를 통해서 세워진 가족이란 공동체의 관계와 그 안에서의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게 해 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그런 공동체적 경험에서 소외되어 있는 것이고.

    나는 화상채팅 때 찍은 시어머니의 사진을 아이들에게 보냈다.
    "지금 할머니는 이렇게 고생하고 계셔. 지난 달과 너무 달라. 얼마 남지 않으셨을 테니 너희들이 할머니께 사랑 표현을 해라."

    사진의 효과는 직접적이었다. 이전에 내가 보냈던 문자-- '할머니가 암으로 고통받으신다, 죽음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와는 다른 임팩트가 있었다. 아이들은 즉시 할머니께 문자를 보내고 나에게 할머니께 문자를 보냈다고 연락했다. (아이들이 즉시 반응하는 것을 보고 나는 벨기에 조카들이 시어머님을 실제로 뵐 때의 임팩트는 얼마나 클지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다음 날 시어머니와 대화를 나눴다. 어머니는 "룰루와 랄라한테서 문자가 왔다. 그 무엇보다도 나를 행복하게 해줬다" 라고 하셨다.
    그 이후 나는 아이들에게 친할머니께 문자를 보내라고 정기적으로 잔소리를 하고 있다. 시어머니께 큰 용기를 주는 문자임을 알고 있어서이다. 또한 그게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아이들은 세상살이를 거친 먼 훗날, 진실한 사랑을 주고받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 날이 올 것이다. 철이 들고 현명해져서 자기들이 보답할 수 없는 많은 사랑을 주신 할머니 할아버지께 감사함을 느끼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그런 때가 온다면, 아이들이 자기들의 문자 몇 개로 마지막 순간의 할머니께 기쁨을 드릴 수 있었음을 다행이라고 생각할 것임을 알기에 나는 문자 잔소리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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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과 나는 여러 일을 겪으면서 핵가족 이민자인 우리가 한국의 부모님을 모셔와 대가족을 이루고 살 수 있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새로이 깨달았다. 이제보니 친정아버지가 한국에서 사시던 중 돌아가시고 친정어머니가 한국에서 암투병을 하셨더라면 우리 아이들은 깊은 슬픔을 느끼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외조부모와 어려서부터 쌓은 정이 있으니 할아버지의 부고에 아이들은 분명 슬퍼했겠으나 그것은 아마도 잠깐 스치고 사라지는 슬픔이었을 것이고, 자신의 한 일부가 떼어져 나가는 듯한 아픔은 아니었을 것이다.


    외할아버지의 죽음이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한 부분이 떼어져나가는 아픔이고 슬픔이 된 이유는 우리가 잠시나마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를 함께 살 수 있게 만들어준 아버지의 사고는 축복이었다. 사고 때문에 졸지에 우리 집은 ‘이민자 핵가족‘이 아닌 ’ 삼 대가 같이 사는 집‘으로 변했다. 노년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크고 작은 건강 문제를 겪을 때 (노년에는 건강 문제가 일상이다) 아이들은 그것을 일상으로 함께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미소와 칭찬과 찬사와 감탄으로 아이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베풀었고 아이들은 엄마 아빠와는 '결'과 '질'과 '양'이 다른 조부모의 사랑을 만끽했다. 동시에 아이들은 대가족의 구조 안에서 자기들의 역할을 배웠다. 틴에이저로서, young adult 로서 자기들의 욕구와 필요가 있지만 그것을 묻는 법도 배웠고 가족을 위해 희생을 하는 법도 배웠다. 그렇게 힘든, 즐거운 시간을 함께 했다.


    자주 보면서 매일매일의 서로의 일상이 촘촘히 엮여져 아이들의 삶이라는 태피스트리에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실이 영롱한 색깔로 선명히 빛나게 되었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순식간에 실이 빠져버리고 아이들의 태피스트리는 망가져버렸다. 이후 온 가족은 슬픔과 그리움으로 할아버지가 없는 태피스트리로 새로이 짜나아가 야했다. 할아버지 상실은 많은 아픔을 주었고, 그 아픔을 통해서 당연히 여기고, 자연스럽게 누리고 살던 사랑의 엄청난 크기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에게 느끼는 감정은 추상적이지 않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도, 떠나신 뒤에도, 고마움, 사랑, 슬픔, 그리움, 다 리얼하고 절절했다. 아이들은 아픔이란 감정이 사랑이란 감정의 여러 색깔 중의 하나라는 귀중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은 우리는 여섯 명이라는 단촐한 숫자의 '미니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고, 이제 아이들이 집을 떠났으니 우리 집은 엄마, 남편, 나, 세 사람이 살고 있다. 더할 나위 없이 작은 숫자이지만 엄마가 살아계시는 한, 그리고 엄마가 우리 집에 함께 사시기에 우리 가족은 여전히 '미니 대가족'을 이루고 살고 있다. 엄마가 소중하다. 가족의 중심을 잡아주시고, 아이들께 무조건적 사랑에 가장 가까운 사랑을 경험하게 해 주시고 열렬한 기도로 우리 가족을 지원해 주시는 엄마께 감사할 따름. 어머니가 암을 잘 이겨내셔서 건강히 오래오래 미니대가족의 ‘짱’의 위치를 지켜주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이 글을 쓰면서 사진을 찾다가 옛날에 쓴 글을 다시 읽게 되었다. 우리가 대가족을 이룰 때까지의 과정이 그려진 듯해서 이 글에 함께 올린다.
    미국 손자 손녀의 조부모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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