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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 분의 어머니와의 작별 준비
    카테고리 없음 2023. 1. 27. 08:48



    나는 지금 집에서 30 분 거리에 있는 beach town에 와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사흘 간의 휴가.

    엄마의 권고와 축복으로 왔다.
    엄마는 내가 맘 편히 여행을 갈 수 있도록 나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내가 잘할 테니까 내 걱정 말고 며칠이라도 너랑 에릭이랑 시간을 갖고 와라.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말고 그저 너만을 생각해라."

    나는 엄마를 믿기로 했다. '요즘 엄마는 기침도 안 하시고, 피곤해하지도 않으시고 드물게 건강하신 편이다. 집에서 20 분 거리에 가는 거니까 필요하면 언제든 집에 올 수 있으니 괜찮을 거다. 해외가 아니고 시간대가 같으니 내가 수시로 연락을 할 수 있다, 엄마 방에 설치해 놓은 nanny cam으로 엄마의 안녕을 관찰할 수 있다...'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면서 집을 떠났다.
    해변의 숙소에 도착해 간단한 짐을 풀고 산책을 다녀왔다. 신발을 벗고 차가운 모래와 바닷물에 발을 적시었다.
    손발이 꽁꽁 얼어 집에 돌아오니 에릭이 커피를 끓여줬다.
    엄마가 만들어주신 부드럽고 고소한 하얀 빵에 크림치즈를 듬뿍 발라서 맛있게 먹었다.

    힐링의 시작이 되는 여행일 것이다~라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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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8 월 이후로 나는 마음 고생이 많았다.

    브러셀의 시어머님 암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시아버님은 청력과 시력이 악화되어 소통이 어려워졌다. 10 월-11월, 암이 전이되었고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이 내려졌고 어머님이 먼저 떠나실 경우에 홀로 남으실 아버님의 케어를 위해 식구들은 두 분을 급히 assisted living으로 옮겼다.
    이스라엘의 어머니, 오프라도 작년에는 다른 해와 달리 잔병치레를 많이 하셔서 매주 안식일마다 하는 줌 채팅이 캔슬되는 일이 잦아졌다. 연말에는 응급실로 실려가시는 일도 일어났다. 항생제 복용 후 기운을 회복하시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그동안 어머니는 본래의 활기찬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병약한 모습이었다.
    나와 한집에서 사는 친정 어머니도 1 년 전 받은 간암 치료 후 정기 검진 결과 새로운 종양이 발견되어 2 월 초에 다시 치료를 받으셔야 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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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년 전, 나는 또 한 분의 어머니를 잃었다. 재일교포 '오바짱.'
    오바짱은 쓰러지신 뒤 거동을 못하시고 오래 병상에 누워계셨는데, 어리석게도 나는 '오바짱은 언젠가는 일어나실 거야'라는 허황된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만큼 오바짱이 이 세상에 안 계실 것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던 거이다. 오바짱이 세상을 떠나신 뒤 나는 제어하기 힘든 슬픔에 빠졌다. 아주 오랫 동안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뒤 문을 잠그고, 커튼을 치고, 침대에 누워 혼자 울었다.
    언제고 작별을 앞둔 80 대 후반의 세 어머니를 둔 내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다. 노인들은 전혀 예견하지 못한 방법으로 건강이 악화되고 사망할 수 있기에 나는 현재 그들이 마치 죽음이라는 독사들이 득실거리는 풀밭을 헤매는 것같이 위기의식을 느끼곤 한다. 당장 시어머님은 살 날이 얼마 안 남으셨고, 오프라와 친정 어머니는 아직은 정정하시지만 암과 노환에서 '완전한 '회복'이란 기대할 수 없다. 죽음을 빨리 맞이하는가, 서서히 맞이하는가의 차이일 따름이다.
    어머니들의 건강의 필연적인 악화의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참 고통스럽다. 마음이 꽤 단단하고 정신력이 강한 나이지만 세 분의 어머니들이 동시에 삶의 마침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모습을 보자면 가끔씩 슬픔의 감정에 압도되곤 한다. 정기적으로 어머님들과 줌/채팅을 하고, 암투병을 하시는 어머니와 일상을 같이 하면서 나의 뇌리는 '노환' '악화' '쇠퇴' '투병' '짐정리' '이별 준비' 등의 사고로 가득 차있다.

    마음이 스산하니 글을 쓸 수 없었다. 일기조차. 하루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고, 어쩌다 뭔가 끄적여보려고 하는 날조차 몇 문장 조차 쓸 수 없었다. 생각이 복잡하고 마음이 갑갑한데 표현이 안되었다. 아니면 나의 뇌리를 지배하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대면하고 싶지 않아서 글쓰기를 스스로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혼자 끄적이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었다. 글쓰기가 심리치료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로 표현하기에는 사고들이 너무 무겁고 힘들고, 글을 못 쓰니까 삶이 더 힘들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우울증까지는 안 갔지만 내 마음은 joylessness 자체였다. 나는 컴퓨터를 켜는 일이 점점 줄었고 아이패드도, 심지어 핸드폰도 며칠에 한 번씩 열어보게 되었다.
    카톡, 메신저, 왓쓰앱 등의 소통 수단도 바탕화면이 아닌 뒷면으로 옮겨놓아 내가 찾아들어가야만 볼 수 있게 해 두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엄마로서, 부인으로서, 이웃으로서, 친구로서의 역할은 충실히 수행했고 그저 나 혼자 내 감정을 다스리려고 했다.
    그러나 60 년간 나를 알아온 엄마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엄마는 내가 글을 못 쓰는 것이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을 알고 계셨다. 내가 글을 써야만 밝아질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다.
    엄마는 가끔 나에게 말씀하셨다.
    "팜펨아, 요즘 너를 위한 기도는 '팜펨이 다시 글을 써서 마음의 평화를 회복하고, 요즘 그리는 그림을 통해서 기쁨을 회복하게 해 주세요' 야. 어서 네가 기쁨과 활력을 찾았으면 좋겠다."
    엄마가 나와 에릭이 며칠 여행을 떠나라고 하신 이유도 내가 단 몇 자라도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라셔서였다. 내가 여행을 떠날 수 있게끔 엄마는 본인의 건강을 지키려고 다른 때보다 더 많이 노력하셨다. 그리고 엄마는 우리가 해변의 도시로 떠나는 날, 마치 본인이 고대하던 여행을 떠나시는 듯이 기뻐하셨다.
    "날 믿지? 걱정하지 마. 나는 해야 할 일이 많아 바빠. 너 없는 동안 밀린 노트 정리할 것도 있고, 공부도 해야 하고, 옷도 고쳐야 하고, 미수도 만들어야 해. 할 일이 아주 많아.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아. 재밌게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까 나한테 전화도 하지 말고, 너와 에릭만의 시간을 즐겨라."
    암환자인 엄마는 그렇게 나를 챙겨주셨다.
    한번 엄마, 영원한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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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올 때 짐꾸러미 속에 몇 권의 책 중, 내가 쓴 2002 년의 책을 넣었다.
    내가 다시 읽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어서였다.
    네 분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나는 포근한 침대에 편안히 누워 이스라엘 어머니, 디둠, 오바짱, 나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시 읽었다.
    젊은 날 나에게 많은 가르침과 사랑을 베풀어주고, 내가 중요한 삶의 결정을 내리는데 기반이 된 '가치관'을 만들어주신 어머니들.
    나는 책 속에서 젊은 내가 영감을 얻고 지혜를 구하고 사랑을 받았던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어머니들을 다시 만났다. 동시에, 나는 20년 뒤 그들의 죽음의 준비를 하리라는 상상을 못 한 채 열심히 글수다를 떠는 젊었던 나를 다시 만났다. 당시의 '나'는 참 어렸었다. 인생의 '진짜 슬픈 맛'을 하나도 모르는 철부지였다.
    글을 읽다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각기 다른 방법으로 열심히 살았던 어머니들은 현재 각기 다른 상황에서 죽음을 대면하고 있는데, 현재 그들이 노환, 질병, 죽음에 대한 태도는 옛날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그들의 각기 다른 삶에 대한 태도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고, 여전히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여전히 그들은 지극히 독립적이다. 여전히 그들은 용기 있게, 창의적으로 자신들의 삶의 스토리를 써나가고 있었다.
    시어머님은 3 주 전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기 직전까지 모든 것을 진두지휘 하셨다. 예전부터 내가 친정 부모님을 모시는 것을 적극 지지해 주셨던 시어머님은 본인이 살 날이 며칠 안 남았다는 선고를 받은 즈음에 우리와 통화 중, 나에게 '어머님은 안녕하시니?' 하고 안부를 물으셨다. "사위와 딸에게 미안하다 생각지 말고 본인의 건강에만 집중하셔서 어서 회복되시기 바란다"는 인사를 하셨다. 본인의 운명은 담담히 받아들이시고, 그 와중에 남을 챙겨주시는 배려의 시어머니는 '이런 시어머님이라면 그 아들을 믿어도 되겠다' 싶어 결혼을 결정하게끔 만들어주셨던 30 년 전 그대로이신 것이다.
    암투병을 하시는 친정어머니도 암환자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건강해 보이시는데 그런 건강 유지를 위해서 엄마는 철저하게 식사/운동을 하시고 하루의 일분일초를 하나도 허투르게 쓰지 않고 열심히 사신다. 평생 자식과 남편을 위해서 헌신하는 홈메이커였지만 원하던 공부를 계속하시고, 단 하루도 무엇이던 공부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셨던 엄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 가지이시다.
    오프라는 균형에 문제가 있고, 자주 병을 앓으시지만 어떤 형식이니 고정관념이니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모습은 여전하다. 은퇴식 날 엄숙한 분위기에 모인 회중들에게 프랑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를 틀어주었던 그녀는 걸음걸이가 불편하니까 온 집안과 정원에 발레 바 (ballet barre) 같은 손잡이 바를 설치해서 잡고 다니신다. 죽는 날까지 일을 할 거라고 하시면서 아직도 줌으로 국제적 세미나를 하시고, 책 출판을 하고, 수십 명의 심리학자를 training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시다.
    의연하게 암투병을 하고, 마지막 정리를 하시고, 치열히, 또는 겸손히 사는 어머니들은 여전히 나에게 영감의 대상이고 삶의 본을 제공해주고 계시고 계시다. 돌이켜보니 어머니들이 사실은 지난 20-30 년간 나에게 지속적으로 멘토링을 해주고 계셔 왔다. 항상 나보다 몇 발자국 앞서 가시는 어머니들 덕에 나는 '노년' '노년의 대안적 삶'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에 대해 숙고하고, 자극받고, 영감을 얻고 생각의 지경을 넓힐 수 있어왔으므로. 젊어서는 사는 방법을 배웠고, 늙어가면서는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는가를 배워주시는 어머님들...
    한번 어머니, 영원한 어머니.
    나는 책을 덮으면서 '감사합니다'라고 어머니들께 마음으로 인사했다.
    어머니들의 소중함을 다시금 인정하고 감사를 드리면서 나는 이상한 자유가 느껴졌다. 정확히 그게 무슨 자유인지 모르겠는데 마음이 편해졌다. 뭐랄까.... 아파할 자신감이 주는 자유라고나 할까.
    나는 언젠가 어머니들과의 작별이 나에게 엄청난 슬픔을 줄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음을 사리지 않고 원 없이 아파하고 슬퍼할 것이다. 왜? 그 아픔과 슬픔이 너무도 당연하므로. 받은 사랑이 컸으니 상실도 큰 거고, 상실이 크니 아픔도 큰 거 아니겠나. 아파해도 된다. 마음껏 아파하고 슬퍼하자.
    내게 남은 일은 그저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들께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을 다 표현하고, 그들의 마지막 여정이 외롭지 않게 해 드리려 노력하면 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이제 내가 어머니들로부터 배운 대로, 받은 대로 나도 그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포근한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면 된다.
    나는 깨끗한 마음으로 책상에 가서 아이패드를 열었다.
    몇 자 써봤다.

    몇 줄 더 썼다.
    그렇게 한 시간 글을 썼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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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 나는 짐을 꾸려 집으로 돌아간다.
    joylessness 상태는 치유되었다.
    마음이 한결 산뜻하고 기쁘다.
    건강한 마음으로 세 분의 어머니들께 많은 사랑을 드릴 자신이 생겼다.
    집으로 가자!!!!!!

    엄마가 계시는 집으로!!!

    cf. 혜지 언니, 고마워요. 언니랑 작년 12 월 벨기에에서 두 시간 반 만난 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몰라요. 언니가 베풀어준 굳건한 자매애와 무조건적 사랑이 모성애같이 느껴졌어요. 치유의 시작은 그때부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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