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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엽서와 라이터
    카테고리 없음 2023. 1. 30. 01:36


    작년 내내 많은 짐정리를 했다. 옷, 책, 부엌용품, 가구...
    한국에서 부모님 집을 처분하면서 갖고 온 나의 옛날 편지들도 정리 대상.

    유학을 떠난 뒤 7 년간, 그 후 결혼, 출산, 육아의 과정을 2002 년 정도까지 편지 또는 팩스로 보냈으니 편지들이 엄청 많았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편지만 왕창 썼던 듯...

    새로운 세상을 설레임으로 경험하면서 나는 그런 경험을 가능하게 나를 믿고 보내준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컸다. 결혼 적령기의 딸이 이스라엘에 간다는데 아무 소리 안 하고 격려해 주셨던 부모님, 그들 덕에 나는 '시집가야지!' '하필이면 이스라엘이냐!'라는 여러 사람들의 참견과 잔소리에 상처받거나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마음 편히 내 길을 갈 수 있었다. 나를 믿어준 부모님께 내 앞에 펼쳐지는 멋진 신세계를 보여드리기 위해서 편지를 썼다.

    어떤 서양 사람들은 내가 부모님게 편지를 열심히 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나의 지도교수님과 남편이 초대해 그들과 함께 프랑스 남부 여행을 같이 하던 중, 내가 매일 포스트카드와 편지를 쓰니까 의미심장한 소리를 했다. "팜펨은 아직 탯줄을 끊지 못했구나."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들이 왜 나의 정신적 독립을 의심하는지 알 것같았다. 서양 기준으로는 너무도 끈끈한 한국의 부모 자식 관계, 거기에 더해 부모님과 나의 각별한 '우정'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내가 부모님을 사랑하고 자주 편지를 쓰는 것을 '심리적 의존'으로 보였던 것..

    그러나 지도교수 부부도 파리를 방문한 나의 부모님을 만난 뒤에는 생각을 바꾸었다.  나더러 "너의 부모는 자식을 존중하고, 자식에게 자유를 주는 겸손한 분들이더라. 너에게 참 좋은 친구인데, 그냥 친구가 아니라 현명한 친구, 그래서 우린 네가 왜 그렇게 열심히 편지를 쓰는지 알 것 같다."라고 했다.

    몇 개의 박스에 담겨 있던 방바닥에 편지를 펼쳐 놓으고 어떻게 정리를 해야할지 고민했다. 한번 모든 편지를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가 회의가 들었다. 정리하겠다는 일념으로 막 버렸다가는 후회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러웠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이들에게는 물려줄 필요가 없었다. 한국어를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이 편지들은 해독불가 암호로 쓰인 것이나 다름없다.  내 선상에서 처분해 주는 게 아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리라.

    잠시 고민 후, 나는 당장 버리지는 않고 보관하리라 결정을 내렸다. 미래에 내가 다시 읽을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혹시라도 재미삼아 읽고 싶을 경우에 대비해서 그냥 두기로 했다. 읽지 못하고 죽을 경우, 아이들은 열어볼 필요 없이 그대로 버릴 수 있게끔  박스 위에 "버릴 물건"이라고 큼직하게 써 붙이고 편지들을 차곡차곡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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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달간에 걸친 대대적인 짐정리는 참 재미있는 추억 여행이 되었다. 차고의 박스에 걸터앉아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의 그림, 글등을 감상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가끔은 전화기로 사진을 찍어서 가족 단톡방에 공유했다. 식구들은 웃으며 코멘트를 하고, 각자의 기억을 나누었다. 그 덕에 단톡방이 활성화되고 화기애애하게 되었다.

    그즈음, 아들아이가 집에 다니러 왔다. 저녁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던 중 나에게 물었다.

    "엄마, 짐정리할 때 혹시 옛날에 엄마가 쓰던 라이터 나왔어?"

    그걸 왜 묻지? 의아했다. 아들이 "엄마, 라이터 찾으면 나한테 줘" 라 당부했다.

    나의 라이터.

    나는 유학시절 내내, 그리고 결혼 직후까지 담배를 피웠다. 결혼 직후 마음에 변화가 왔고 한 순간에 담배 피우고 싶은 욕구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 후로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1995 년 결혼하러 벨기에 갔을 때. 몇 안되는 흡연 사진 중 하나.

    아이들이 초등학교 5-6 학년 때였나, 중학교 진학하기 전에 ‘마약의 위험’의 주제로 경찰이 와서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는 나 스스로를 본보기로 과거 나의 흡연 사실을 털어놓으며 ‘너희들은 백해무익인 담배를 피우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아이들은 왜 그 나쁜 걸 했냐면서, 당연히 자기들은 담배를 안 피울 거라고 장담했다. 틴에이저가 되어서도 아이들은 담배를 질색했다. 담배의 유혹에 넘어가기는커녕, '담배를 피우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담배 냄새 너무 싫어’ ‘엄마는 왜 이런 담배를 피웠을까?’라고 했다. 나는 내심 안심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라이터를 설합에 넣어두고 지냈는데 아들은 그 라이터를 기억한 것이다.

    근데 왜 그 라이터를 달라고 하지?

    "너 담배 피우니?"라고 물으니 아들은 선뜻 '응!' 하고 대답한다. (아들은 거짓말을 안한다. 거짓말을 해서 얻을 게 없고, 진실을 이야기해서 잃을 게 없으니 그냥 그대로 이야기한다.)

    "너 담배 싫다면서? 왜 담배를 피워?"

    "뭐 그럴 수도 있지. 엄마도 좋아서 피웠잖아. 난 담배 물고 혼자 생각할 때가 좋아."

    (흑...그 맘은 이해한다만... 내가 밀리면 안 되지..)

    "맞아. 그랬던 건 사실이야. 그게 잘 한 건 아니었어. 담배가 얼마나 나쁜지 몰랐었어. 엄마만이 아니라 온 사회가...지금이라면 나는 그 선택을 하지 않을 거야."

    아들은 쿨하게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선택할 날이 올 거야."라고 했다.

    (할 말이 없다ㅠ)

    "얼마큼 피워?"

    "하루에 한 개비."

    아드님께서 이 어미에게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이야기를 하신다.

    "옛날에는 몇 개비를 피웠는데, 줄인 거야. 앞으로 이틀에 한 개, 일주일에 한 개 식으로 줄여 나갈 거야. 나는 운동을 하기 때문에 담배를 많이 피우면 안 돼."


    스스로 분석하고 진단하고 계획까지 세우는데 딱 뭐라 할 말이 없다.

    “여하간, 엄마, 라이터 나오면 버리지 마. 꼭 나한테 줘.”

    평소에 물욕이 없기로 소문난 녀석이 왜 라이터에 집착을 하지?

    "왜 그걸 갖고 싶은데?" 하고 물으니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영 거짓말 같은 소리를 한다.

    "엄마 거잖아. 갖고 싶어. 엄마의 젊었을 때의 추억이 담긴 애장품이니까..."

    아.. 엄마의 유산이 라이터란 말이냐?  바이블 스터디 그룹의 한 자매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녀의 딸이 "엄마, 엄마의 소중한 성경책, 나중에 나한테 물려줘"라고 했단다. 모든 아줌마들이 '아아' '오오' '오마이' 감탄했었다.

    고운 신앙심이 깊은 엄마 밑에서 자라 회의 없이 고운 신앙을 가진 자녀들은 어머니의 성경책을 유물로 원하고, 탁한 신앙을 가진 나의 아들은 희뿌연 연기를 만드는 라이터를 달라고 하는구나.... 싶었다. 뿌린 대로 걷는다라는 말이 맞는 듯.

    나는 급작스레 말을 바꾸었다.

    “그 라이터 어디 있는지 몰라. 버렸을지도 몰라.”

    “아, 그걸 왜! 엄마, 한번 찾아봐. 내가 갖고 싶어!”

    아들이 외쳤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옛날 박스에서 라이터가 나왔다.
    아이들의 초음파 결과, 임신 테스트기 결과 등 귀한 물건들과 라이터가 함께 있었다.

    아들의 말이 맞구나 싶었다. 내 의식 속에 라이터는 그냥 '담배 불 붙이는 기구' 로서 아닌 젊은 날 내 외로움과 사색의 기억이 담긴 애장품이었던 것이다.

    아들에게 라이터 사진을 찍어 보냈다.

    아들의 기쁨에 찬 답, “오! 드디어 찾았네! 내 라이터! 역시 Zippo는 멋있어"라고 하신다.

    뭐....? 내 라이터' 라고?

    나는 당장 "아직은 아니야!"라고 답장했다.

    "왜? 엄마 안 쓰잖아."

    이걸 그리 쉽게 줄 줄 알고?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답장했다.

     

    "엄마가 잘 간직하고 있다가 네가 담배를 끊는 날 선물로 줄게!"


     

     

     

    라이터의 운명은 정해졌다. 아들에게 물려줄 것이다.
    그 라이터로 담배를 피우지는 않고, 자기 말대로 엄마의 젊은 날의 추억으로서의 의미를 소중히 여기기를 바라지만 그거야 나의 바람일 따름.

    혹시 그 라이터로 가끔 담배를 피울 경우, 엄마가 어떻게 한 번에 담배를 끊었는지, 그리고 그 후 한 번도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라이터가 무용지물이 되었는지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덤...

    다행히 딸이랑 ‘재산싸움’은 날 일이 없을 것 같다.  딸아이는 센티멘탈한 가치가 있는 물건들을 소중히 여기는 스타일이지만 아들처럼 라이터에 집착하지는 않을 것이 확실하므로.

    여행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딸에게는 엽서 몇 장을 남겨줄까 생각 중이다. 몇 장 정도는 남겨줘도 부담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재밌는 사진, 의미 있는 내용이 담긴 포스트카드를 몇 장 추려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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