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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에도 때가 있다
    부모님 이야기 2021. 9. 20. 09:49

     

     

     

     

    며칠 전, 시아버님이 잠시 요양원에 들어가셨었다. 혼자 수발드시던 어머님이 너무 지치셨고, 아버님은 제대로 된 케어를 받으실 수 없어서 급히 요양원에 들어가시게 되었다. (다행히 지금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계시다.)

    우리는 딸아이가 직장 발령지로 떠나기 전에 분주하고 어수선한 가운데 그 소식을 들어 충격이 컸다.

    원래 계획대로 저녁 식사를 했고, 식사 후에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만들어두었던 동영상들을 열 편 정도를 같이 보았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어렸을 때 모습, 부모의 좀 젊었던 모습을 보면서 재밌어서 박수치며 웃었다. 우리가 저랬냐, 저 때 생각난다! 하고 즐거워했다. 동영상 중에는 친정 부모님, 시부모님의 동영상도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도 많이 났고, 현재 어려운 시간을 겪고 있는 시부모님 생각에 남편과 나는 마음이 복잡했다.

    2011 년, 로마 여행 동영상이 시작하자 남편이 말했다.

    "아니, 이 사진들 처음 보는 것같아."

    그럴 수밖에, 남편은 미국에 있었다. 내가 브러셀에 아이들과 가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간 로마 여행이었고, 사진은 내가 다 찍었다. 바빠서 남편과 사진을 같이 볼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10 년 전 일이니 그때 사진을 보고도 지금 기억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남편이 영상을 보면서 혼잣소리를 했다.

    "왜 난 저기에 없지?"

    "왜 안 간 걸까?"

    (나는 '당신은 애초에 내가 부모님 모시고 여행한다는 것도 반대했었어'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남편은 '브러셀에서 부모님과 같이 살고 공원 가고 박물관 가면 됐지  굳이 로마까지 가서 여행을 할 필요가 있냐'며 여행에 부정적이었다. 남편의 입장이 이해가 되긴 했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을 때였고, 아이와 내가 유럽에 가는 것만 해도 빠듯한 살림에 부담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삶이 좀 빠듯해지겠지만, 빚을 지지 않는 한에서 절약하고 절약하면 못할 일도 아니었다. 꼭 가야 할 것 같았다. '인생이 필요한 일만 하고 사는 거냐고, 부모님 더 나이 드시기 전에 아이들과 여행을 가야 한다'라고 우겼다.  우리가 토론할 때 내가 꼭 마지막 카드로 쓰는 말, '부모님 모시고 여행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을 쓰니 남편이 물러섰다.)

    동영상 속의 시아버님도 시어머님도 젊고 정정하셨다. 지금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아버님은 영상에서는 넓은 보폭으로 시원하게 걷는 모습이었다.  나도, 남편도 만감이 교차했다.  남편은 계속 혼잣말을 했다.

    "아버지가 젊었네..."

    "아.. 난 저때 안 간 거지? 바보 같았어.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한다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저 장소, 저기였어. 나는 여행을 갔어야 했었어."

    3 분짜리 짧은 동영상이 남편에게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한 즐거운 로마 여행’이 아니라, '부모님과 아이들과 함께 갔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안 갔던 여행'으로 보고 있었다. 

    저녁 늦게 자기 전에도 그는 여행을 안 간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경제적 여유가 생긴 지금, 우리가 부모님과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남편은 후회스러운 거다.

    남편은 나더러 '당신이라도 부모님 모시고 다녀왔으니, 그것만 해도 다행이다, 고맙다'라고 했다. (로마 여행 10 년이 지나서  아버님이 요양원에 들어가신 날, 내 고집을 잘했다고 인정받은 셈이다.) 

    낙담에 빠져있는 남편에게 나는 '그래도 우리가 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같이한 거라고, 당신은 참 좋은 아들이고 사위다'라고 칭찬해주었다.

    '당신이 나와 친정부모님을 모시고 12 일간 유럽 여행 다녀온 거 생각해봐. 그건 아버지의 마지막 여행이었지. 바로 한 달 뒤에 불구가 되셨으니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가 힘들게 짜서 해낸 그 여행은 아버지의 삶에서 가장 찬란한 여행이었어. 마치 폭죽놀이의 맨 마지막에 온 폭죽을 다 터뜨리는 것처럼, 그렇게 화려한 여행이 된 거였어. 당신이 그걸 해드린 거야.'라고 부추겨주었다. (나의 진심이었다.)

    나는 '아버님과도 앞으로도 어떻게든 더 의미 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된다'라고 위로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나도 남편도 내 말을 다 믿지는 않고 있음을.. 미국에 있는 우리가 벨기에의 아버님과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도 적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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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정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22 세의 딸은 독립해서 떠난다고 하고, 시아버님은 요양원에 들어가시고...

    로마 여행 뒤, 10 년이란 짧은 세월 동안 우리 가족은 급격히 성장하고, 급격히 노쇠해가고 있다.

    우리는 두 아이의 부모로서도 그렇고, 우리 스스로 부모님들의 자식으로서도 그렇고, 삶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를 실감하고 있다.

    그 빠른 속도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나의 마음을 몰라주고 앞으로 돌진하는 시간에 괜스레 억울함마저 느낀다.

    젊어서 바삐 지날 때는 몰랐던 시간의 속도를 늙어서 체감하면서, 남편이 로마 동영상을 보고 절감했듯이, 우리는 사랑에도 때가 있음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아이들에게, 부모님들께, 그리고 서로서로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시간이 주어졌었고, 사랑을 많이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게으름, 안이함, 무모함, 태평함, 그리고 빨리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첨예한 인식의 부족으로 사랑의 기회를 포기했고, 잃어버리기도 했었다. 과거 시제로 되어버린 그 포기의 순간들이 지금에야 깨끗이 보이다니... 나이가 먹어서 현명해져서 그런 건지 모르지만, 그 현명의 맛은 쓰기만 하네... 

    앞으로 10 년 후,  70 세의 나는 시간과의 관계가 어떠할까?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떠할까? 70 세의 나는 지나간 10 년을 어떻게 회상할까?

    적어도 사랑의 때를 놓쳤다는 말을 많이 하지는 않게 되기를 바란다. 후회 없는 삶은 불가능하겠으나, 후회가 적은 삶을 살고 싶다.  제 때에 원없이 사랑을 느끼고, 제 때에 원 없이 사랑을 표현하며 살겠다는 다짐을 상기하는 의미에서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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