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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몸의 나이, 맘의 나이
    스치는 생각 2020. 10. 22. 15:22

     



    방 정리를 하던 중 예전, 내가2003 년에 쓴 글들을 발견했다.

    브러셀 시댁을 방문했을 때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겠다고 기차를 타고 빠리에 가서 친구들을 만난 뒤, 그중 나랑 가장 가까웠던 프랑소아즈를 만난 뒤의 감상을 쓴 에세이 세 편이었다.

    그 글들은 여러모로 많은—사뭇 상반된—생각들을 불러일으켰고, 내 생각들을 정리해보기 위해서 옛 에세이들 세 편을 다 혼합해서 새 에세이로 묶어보았다.

    ——-

     

    ‘노란 자전거’

    프랑소아즈와 자주 가던 카페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어떤 자그많고 날씬한 몸집의 여성이 노란 자전거를 타고 오는 게 보였다. 그녀는 카페 가까이 사거리에서 날렵하게 자전거에서 내리더니 손쉽게 자전거를 접어 들더니 씩씩하게 사거리를 걸었다. 접이식 자전거도 신기하고, 선명한 노란색이 예뻐서 눈으로 그녀를 쫓던 나는 깜짝 놀랐다.

    프랑소아즈였다! 

    워낙 젊어보이는 그녀였지만 작은 베낭에 노란색 자전거를 가볍게 손에 들고 있는 그녀는 내가 기억하던 모습보다 훨씬 더 앳되보였다.


    7 년만에 만난 우리는 할 말이 너무도 많았다. 나는 나의 근황--나는 두 아이를 낳았고, 책을 두 권 출판했고, 심리학을 공부할까말까 고민하는 중—을 나눴고, 그녀는 여전히 자기 집에서 학생들에게 조각 교습을 하면서 살지만, 몇 해 전에 빠리 근교에 조그만 오두막을 사서 작업장으로 만들어서 자주 그곳에 가 있는다고 했다.

    “돈이 없는 내가 살 수 있을 정도의 집이라면 얼마나 허름한 집인지 상상할 수 있지? 일단 굉장히 작고, 수도, 전기도 없고, 근처의 마을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완전 고립된 원시적 공간이란다.”

    그녀가 접이식 노란 자전거를 산 이유도 그것 말고는 원시적 공간에 다다를 교통 수단이 없어서였다. 빠리에서 기차를 타고, 빠리 근교의 마을에 도착한 뒤기차역에서부터 오두막까지 자전거를 타고 간다고 했다.

    그녀는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해야해서 화덕에 큰솥을 걸어놓고 그 안에 각족 잡곡을 넣고 종일 끓이고, 배고플 때마다 죽을 떠먹는다고 했다. 전기가 없으니까 해가 질 무렵에는 작업을 중지하고 노을과 별을 감상하다가 일찍 잠을 청한다고 했다. 끼니와 불필요한 사회생활에 노력을 들이지 않고 작품 활동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하며 프랑소아즈는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60 이 되니까 하고 싶은 일들이 더 많아지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여유가 생겨서 좋다’ 고 했다.

    나는 펄쩍 뛰었다.
    “프랑소아즈, 당신이 60 살이라고?”

    그러고보니 나는 10 년 넘게 나랑 친하게 지내온 프랑소아즈의 나이를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번도 그녀의 나이가 궁금하지 않았다. 왜 나는 대강이라도 그녀의 나이를 짐작해보지 않았을까? 우리는 같이 영화보고, 연극보고, 책 이야기 나누고, 미술관을 같이 다니는 ‘짝’이었고, 만나면 조잘조잘 이야기 나누느라 바빴다. (돌이켜보면 30 대 초반으로 꿈도 많고 고민도 많았던 나에게 ‘나이’의 고민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지나쳤는지도 모르겠다.)

    60 세란 나이를 밝혀 나를 놀래킨 프랑소아즈는 그날 나를 또 한번 놀라게 만들었다.
    그녀는 바로 얼마 전까지 남자친구를 사귀었다고 했다.
    그런데 연애를 할 당시 그 남성은 30 살 연하로 나이가 27 살...

    파비앙이라는 이름의 그 청년을 만난 것은 오두막으로 기차 안에서였다.
    평소 기차를 타면 그녀는 좌석을 마다하고 자전거를 세워두는 통로의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책을 읽곤 했는데 어느 날 자기처럼 자전거를 들고 탄 한 젊은이가 맞은 편에 앉더니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가 들고 있던 책은 ‘짐 모리슨 전기’였다. 프랑소아즈는 짐모리슨과 비슷한 나이로 (이 대목에 나는 또 충격받았다!) 젊어서 그의 공연을 찾아다니고 시집을 탐독하곤 했던 열렬한 팬이었다. 책 속에 머리를 파묻고 읽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을 보며 프랑소아즈는 자신의 젊은 날을 떠올렸고, 젊은이에게 공감대를 느꼈다. 그래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자신이 옛날에 짐모리슨의 공연을 쫓아다니던 팬이었다고...

    젊은이가 깜짝 놀랐음은 물론이다. 자기에게 신화적인 존재인 짐모리슨의 공연을 실제로 본 여성이 자기에게 말을 걸었으니..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자전거를 옆에 끼고 기차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파비앙이라는 이름의 그 청년은 프랑소아즈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갸냘픈 체구의 '할머니'에게 자기와 비슷한 관심과 열정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도, 그리고 대화를 하면서 발견하게 된 그녀의 젊고 쫄깃쫄깃 야들야들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인 그녀가 그에게 오히려 또래의 친구들과는 주고받을 수 없는 그런 깊은 소통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사실고 그를 놀라게 했다.
    그들은 나중에 빠리에서 만나기로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그후 그들의 우정은 자연스럽게 연인관계로 진전되었다.
    2 년간 열렬한 사랑을 나눈 뒤, 그들은 헤어졌다.
    ‘이제 서로 자유롭게 살자고, 좋은 친구로 남자’ 라고 제안하여 연인관계를 정리한 것은 프랑소아즈였다. 

    나는 30 년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사랑이야기에 잠시 놀랐으나, 금방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정말? 착각 아닐까? 그런 관계가 가능하다고?’ 식의 의구심이나 회의감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내가 프랑소아즈를 너무도 잘 알아서였다.

    프랑소아즈에게는 통상적인 여성미의 잣대를 함부로 들이댈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작은 키, 마른 몸, 평범한 얼굴, 조용한 목소리는 힘찬 젊음,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열고, 웃고, 눈맞춤하고, 자기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순간, 그녀는 권위있는 매력으로 사람들을 압도한다. 엄마, 할머니, 아줌마, 언니, 선생님---사회가 만들어준 많은 타이들을 지고 살지만 동시에 그 어떤 타이틀도 그녀를 정의할 수 없다. 그겨는 아줌마이고 할머니이지만, 아줌마도 아니고 할머니도 아니다. 60이란 나이와 연상되는 어떠한 개념, 어떠한 이미지와도 관계가 없는 한 독특한 인격체인 그녀, 가난한 예술가, 이혼녀, 독신녀로서 사회의 주변인으로서 살아온 그녀는 애초에 사회가 정하는 나이매김, 나이값, 나이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었고, 그녀의 영혼은 늙음의 굴레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자기만의 세계를 멋대로 구축해나가는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은 찬란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나는 파비앙이 왜 프랑소아즈와 사랑에 빠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이라는 껍데기 속에 숨겨진 그녀의 아름다움을 알아본 젊은이는 현명했고, 동시에 그런 여성을 사랑할 수 있었음은 그의 행운이다. 

    (끝)

    ——————————-

    2003 년에 썼던 에세이들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당시에 내가 주제로 여겼던 프랑소아즈의 여성으로서의 주체성, 독립성과는 좀 거리가 먼 ‘나이’ 에 대한 사색에 깊이 빠져들었다.
    솔직히 나는 에세이를 읽으면서 내가 프랑소아즈가 60 이라고 놀라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내년에 나는 60.)
    글을 썼던 당시 43 세였는데, 나에게 60 이 그렇게 묵직한 의미가 있는 숫자였다는 사실이, 그리고 나로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상상할 필요가 없는 까마득히 먼 훗날의 상황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시간은 뭉터기로 금방,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기에 나는 너무도 어렸던 것이다.

    내가 모르고 있던 것은 또 하나, 어떤 싯점에서 보냐에 따라 나이에 대한 사고/의식은 변덕스럽다할만큼 유동적이라는 사실이다.

    한 예로 돌아가신 오빠의 ‘나이’만해도 그렇다.
    오빠가 돌아가셨을 때 나이가 56 세였다.
    당시 53 세인 나는 ‘오빠가 참 젊은 나이에 떠나셨다’ 고 흐느꼈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떠난 오빠’라는 나의 사고는 엄밀하게 따지자면 ‘80 살에 비해서 56 세는 젊은 나이’ 라는 식의 그런 일반적이면서 피상적인 사고였을 따름이다.
    나는 오빠가 얼마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가를 오빠의 나이, 56 세가 되었을 때 ‘몸으로’ 느꼈다.

    56 세의 나는 아직도 이렇게 젊고, 팔팔하고, 자신만만하고, 할 일도 많고 하고싶은 일도 많았다.
    그런데..........오빠가 이 나이에 돌아가셨다고?! 이 젊은 나이에?

    그제서야 나는 비로소 엄마와 아버지가 아들을 잃었을 때의 슬픔과 절망의 처절함을 이해하게 되었다.
    80 이 넘은 연세의 부모님께는 순식간에 세상을 떠난 56 세의 아들은 바로 며칠 전에 품에서 방긋거리던 젖먹이만큼 애틋하게 사랑스럽고, 어린 존재였을 것이다.
    동시에 50 대 중반이라는, 나보다 더 젊은 나이에 맏아들, 맏사위로서 온 집안의 모든 책임을 혼자 묵묵히 지고, 평생 어른 노릇만 하다가 홀연 세상을 떠난 ‘어린’ 오빠에게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 안스러움이 깊어진다. 내 나이가 들어가면서 오빠의 죽음은 이런 식으로 새로운 의미, 새로운 아픔, 새로운 고마움을 파생하는 듯하다.

    내가 56 세가 되었을 때 나의 남편의 나이가 53 세였다. 나는 장난에 진담을 담아 남편의 등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젊은이, 정말 좋은 때야. 많이 즐겨.”
    낲면이 삼종 경기를 하는데 정강이에 marker 로 진하게 씌여진 나이, 53 을 보는 순간,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도 느꼈다. 돌아갈 수 없는 그 숫자를 이 남자는 몸에 문신처럼 적고 뛰고 있구나. 저렇게 잘 뛰는구나....젊었네...

    60 세.
    프랑소아즈와 빠리의 카페에서 만났을 당시, 나 스스로의 나이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이 먼 훗날이라 여겨졌던 60 이란 숫자, 그것이 내년이면 나의 나이가 될 것이다.

    60은 사회가 정해주는 나이, 빼도박도 못하고 그냥 받아들여야하는 법적인 나이.
    사회가 정해주는 타이틀도 ‘아줌마’에서 ‘할머니’로 될 것이다. 이미 손자손녀를 본 나의 친구들은 떳떳이 ‘할머니’라는 타이틀을 누리고 살겠고, 아직 아이들이 어린 나는 편의상 ‘할머니’ 소리를 들을 것이다.
    (평생 교회에서 타이틀을 받고 살지 않기로 맘 먹은 나를 사람들이 편의상 ‘집사님’ 하고 부르듯이.)

    사회가 정해주는 나이가 숫자라면, ‘몸의 나이’도 있다. 나는 몸의 둔해짐, 잦은 병치레, 각종 성인병들을 통해서 나의 몸의 나이를 느끼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주로 한국친구들) 나더러 ‘가꾸지 않아서 갑자기 늙었네’ 라는 소리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주로 미국 친구들) ‘나이에 비해 왜 이리 젊어보이냐’고 할 것이다. 화장과 머리 손질의 비법으로 5 년 쯤은 나이를 낮춰보일 수 있다. 보톡스에 인조눈썹, 마사지를 통해서 몸의 나이를 더 젊게 할 수도 있겠고.

    사회가 정할 수 없고, 남이 판단할 수 없고, 속일 수 없는 것은 마음의 나이이다. 마음은 늙을 수도 있고, 젊을 수도 있다. 어두울 수도 있고, 밝을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사회의 나이테를 절대절명의 진리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아니기도 하다. ‘나이는 숫자일 따름’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젊거나, 아니면 적어도 젊은 마음으로 살기 원하고 노력한다. 마음이 젊은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의 목소리에 귀기울인다. ‘나이를 개의치 않고,’ ‘나이에도 불구하고, ‘ ‘나이와 상관없이’ 등등의 표현에 걸맞는 삶이 바로 그런 예이리라.

    마음이 젊은 사람들은 자기의 욕구와 꿈에 정직한 삶을 추구한다. 바로 프랑소아즈가 젊은 마음, 젊은 마음의 나이의 예.
    60 세에 고독과 침묵의 오두막 생활을 자신있게 선택하고, 그 삶을 만끽하고!, 음식과 작품 쟤료들을 베낭에 맨 채 노란자전거 패달을 신나게 밟으면서 자기의 작품실로 향하고, 지긋한 나이에 맞는 고상한 의상과 빽과 태도로서 자기를 무장하는 대신, 기차 바닥에 주저앉아 책을 읽는 자유를 즐기고, 격의 없이 소통하는 그녀. 나는 그녀가 멋대로 그려내는 삶의 그림이, 그녀가 창의성을 삶에 직접 적용해서 창조해내는 독특한 삶의 모습에 영감을 얻는다.

    프랑소아즈는 이제 70 대 중반이다. 나이를 물어보는 게 실례인 서양문화, 요즘 미국에서는 어르신들 나이 이야기를 할 때 ‘old’ 를 ‘young’ 으로 바꿔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분은 76 세야 라고 할 때 ‘She is 76 year-old’ 대신에 ‘She is 76 year-young’ 이라고. 프랑소아즈야말로 76 year-young 이란 표현이 딱 맞는다. 76세이면서 마음이 젊은 프랑소아즈이니까.

    나는 그녀가 준 작품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내 침대맡에.

    매일 그녀의 작품을 보면서 나는 사회가 그려주는 나이테에 압도되지 않고, 소진해가는 몸의 나이에 위축되지 않은채, 나의 마음을 젊게 유지하리라 마음 먹는다. 틴에이저 때와 비교해 볼 대 우슦꽝스러울만큼 큰 변화가 없는 풋풋한 나의 마음을 부정하거나 억압하지 않으리라.

    마치, 제 철이 아닌 계절에 뜬금없이 제멋대로 꽃을 피우고 향기를 발하는 꽃나무처럼, 그렇게 엉뚱하게 살아도 된다, 아니,그렇게 엉뚱하게 사는 게 바람직 한 것일 것이라고 생각을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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