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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위와 젊음
    스치는 생각 2020. 9. 6. 16:08

    오늘 40 도였다. 걱정 많이 했는데 그래도 잘 버텨냈다.
    원시인의 모습이 되어 (천조각 거의 안 걸침), 찬물 샤워 두어 번 해주고, 젖은 타월로 몸을 감은채 보냈다.
    아무도 오지 않고 아이들도 없으니 이렇게 자유스럽게 있을 수 있네...집이 에덴동산이 되었네....당신은 아담, 나는 하와....하면서 감사했다.

    남편과 내가 이렇게 처절하게 반 나체로 하루를 보낸 이유는 에어컨이 고장나서이다.
    폭염, 이상기온에 몇 주 전, 남편과 나는 평소에 안 켜는 에어컨을 켜서 2 시간 정도 켜줬다.
    분명 에어컨은 쇼크샤를 한 것이리다. 갑자기 켜는 바람에 놀랐고, 2 시간 여 쉬지 않고 켜두는 바람에 더 놀랐을 것이다. 낡은 몸이 혹사를 견디지 못하고. 흐...

    수선을 하려고 사람을 불렀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퓨즈가 타버려서 몸체를 다 바꿔야한단다. 그건 큰 공사인데 지금 모든 에어컨 시공체들이 바빠서 예약 잡기 힘들 거라고 하며
    가을에 하란다. ㅠ

    그 이후에도 이상기온이 몇 번 있었지만 우리는 그럭저럭 잘 지냈다.
    그리고 오늘도 원초적인 모습으로 하루를 잘 버텼으나, 정작 저녁이 되니까 집이 후끈 달아있다. 하루 종일의 열기에 익어버린 것이다.
    특히 2 층의 방들은 벽도, 바닥도 미지근하니 열기가 느껴진다.

    남편은 자정이 되어야 집이 식기 시작할 것이며 그럼 우리는 잠을 망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더니 좀 전에 portable 에에컨을 방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 미니 에어컨으로 말하자면 10 년 전 우리가 에어컨이 없는 집에서 살 때, 어느 해인가 너무 더워서 거금 300 불을 주고 산 것이다.
    소리가 요란하고 물이 줄줄 흘러서 불편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다. 귀가 예민한 남편은 에어컨이 소음이 심하다는 이유로 거의 증오하다시피했었다.
    근데 오늘 그걸 혼자 낑낑거리면서 옮기고 나무를 잘라 안전하게 고정하고...하는 것을 보면서, 이 사람 더위 먹었구나 싶었다.

    남편만인가? 나도 평소와 다르다. 남편이 일하다가 손을 베었다고 툴툴거리니 oh my gosh!’ 하고 호들갑떨며 달려가 소독해주고, 다정히 약 발라주고 반창고 발라주다니, 나도 정상이 아니다. 게다가 당분간 글을 안 올리려했던 블로그에 글을 쓰고 앉아 있는 것도 이상한 일....나도 더위 먹었나보다.

    여하간 오늘 차가운 수건을 감은 채 비가 오면 얼마나 좋을까...생각하다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한국 여름 기억이 났다.

    1981 년 여름이었다, 노고산 캠퍼스. 교문 앞 가게에서 시원한 ‘환타’를 사서 마셨는데 차고 톡 쏘는 환타를 한모금 삼키는 티셔츠 안의 등으로, 청바지 안의 다리로 땀이 갑자기 줄줄 흘러내렸다. 그 더운 날, 내 옷은 그거였다. 두꺼운 청바지...5 cm 높이의 베이지색 힐. 그게 멋있는 거라 생각했었지. 땀이 많이 나서 혹 브래이지어가 비칠까봐 걱정했었고....

    그날 내 옆에는 밝은 초록색 ‘브라우스’ 를 입은 친구 M 이 있었다. 우리는 환타 캔을 들고 더위를 피하려고 C 관 학생회관의 여자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과 분리된 공간에 (마치 룸사롱처럼) 벤치가 있어서 여학생들이 오래 노닥거릴 수 있었던 곳...그날 친구의 옷색깔, 드라이어로 앞머리에 웨이브를 넣은 그녀의 생머리, 그녀가 웃으면서 슬쩍 하늘을 보던 그 모습을, 왜 나는 그 순간을 그렇게 선명히 기억하는 것일까? 그녀는 나와 각별히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더워 죽겠다’ 고 툴툴거리면서 학생회관으로 걸어 올라갔는데, 우린 뭐가 즐거운지 깔깔거렸다. 그날도 진짜 찜통 더위였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젊었을 때도, 나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도 더위는 더위였을 따름, 더위로 고통을 받은 기억이 거의 없다.
    어쩌면 고통을 받았을 수 있겠지만 여하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고민도 많고 고통스러운 경험도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고민거리도 즐겁게 열정적으로 고민하던 때였던지라, 더위따위는 고통리스트에 끼어들 수 없었다.
    어린 아이들과 함께 놀면서 살 때는 더더욱 모든 게 재밌었고.. 덥다고 한숨을 쉰 기억은 있지만 고통의 기억은 없다. 지치지 않았었다. 젊음...

    내일도 덥다고 한다.
    내일은 좀 더 젊은 마음으로 더위를 겪어봐야지 생각하면서 오늘의 마지막 차가운 물 샤워를 한다.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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