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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재기와 남편 / 캘리포니아 코로나바이러스
    스치는 생각 2020. 3. 21. 03:25

     

     

    제가 며칠 전에 밤에 마켓 갔다가 쇼크 받은 이야기를 했었지요? 아직은 근근히 지지난 주에 산 야채와 견과류, 곡물로 잘 연명하고 있는데 내일 (토요일)에는 저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시장을 봐야할 것같아요. 어제 남편이 나가서 바나나(만) 다섯 개 를 사왔습니다. 어떻게 바나나가 남아 있더라고 신기해하면서. 엄마와 저는 오랫만에 보는 바나나가 반가워 둘이 식탁 옆에 서서 바나나를 감상하고 감사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덕에 요리를 열심히 하고 레시피를 많이 찾게 되고,....그건 참 긍정적인 변화에요. 

    빵을 못사게 되니까 엄마 도움을 받아 식빵을 굽고, 신선하지 않은 야채는 과감히 버리던 제가 조심스럽게 먹을 수 있는 부분을 모아서 야채스프를 끓이고, 밥 한톨도 남김없이 깨끗이 먹고.... 모든 것을 의식하면서 살게 되었어요. 제가 두달 전부터 전면 채식을 시작하였기때문에 우리집은 여러모로 완전 '템플 스테이'와 같습니다.

    미국은 냉장고가 두 개에 냉동고를 갖고 사는 가족들이 많아요. 그러니 사재기가 더 용이할지도 모르겠어요. 저희는 김치냉장고가 없고, 냉장고가 하나, 그래서 애초에 냉동식품, 냉장식품 사재기라는 게 가능하지 않아요. 게다가 사재기도 부지런한 사람이 하는 것이지, 저같은 루저는 사재기의 생존경쟁에 뛰어들 능력이 없어요. 그냥 다 잘 되어갈 거라 믿고 살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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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와의 대화.

    '빵에 넣을 밀가루가 거의 없어졌다, 메이플 시럽도 새로 하야할 것같아.'

    "제가 밀가루는 주말 아침에 꼭 사올께요. 그런데 메이플 시럽은 이미 사둔 게 있어요.'

    엄마가 눈을 크게 뜨시고 물으셨다.

    '너도 사재기를 했니?'

    '어, 아닌데요? 한달 전에 산 건데요?'

    '그럼 이건 뭐니?'

    엄마가 탁자 위에 조그만 병 두 개를 가르키셨다.

    똑같은 병 두 개. 

    '이게 왜 두 개니? 이게 뭔지 모르지만 네가 사재기 한 건가 했다.'

    '엄마...그거, 식초에요.'

    '왜 식초를 사재기 했니?

    '사재기가 아니라 실수로 두 병을 샀어요. 사두고는 까먹고 또 산 거에요.'

    그 식초로 말할 것같으면 꼭 필요한데 없어서 사야겠다 사야겠다...하면서 매번 쇼핑갈 때마다 빼먹었던 것이다. (얼렁뚱땅 살림이라 쇼핑 리스트같은 거 없음.) 그러다가 어느 날 쇼핑 중 식초를 보는 순간,  '앗! 이거 매일 까먹었지?! 사야겠다' 하면서 한 병을 샀다. 그리곤 그걸 어디엔가 처박아두고 (얼렁뚱땅 살림이라 뭐가 어디에 있는가 모름) 살다가, 몇 주 후에 쇼핑 중 식초를 보는 순간 다시 '앗, 이거 매일 까먹었지? 사야겠다' 하고 또 집어든 것이다.

    진짜 정처없이 헤매는 나의 살림. 

    그 후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터졌다. 사람들이 사재기를 한다는 뉴스에 나는 현재 있는 음식으로 얼만큼 버틸 수 있는가 찬장을 뒤져 확인하던 중, 마구 처박아둔 똑같은 식초병 두 개를 발견했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창피함을 느끼고 재빨리 한 병을 깊숙이 숨기고 또 한병을 꺼내 쓰기 시작했다. 

    어느날 남편이 피넛버터를 찾다가 식초를 발견했다. 식탁에 놓여있는 식초와 똑같이 생긴 식초병을...

    나에게 묻더라.

    '당신, 이거 또 한병 있는 거 알고 있었어?"

    (정직한 나! 대답했다)

    '응.'

    '이게 완전히 똑같은 제품인데.... 알고 있었어? 식초 한 병 다 먹으려면 6 개월도 넘게 걸리는데 왜 두 병을 샀어?'

    할 말이 없었다.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남편이  (득도한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게) 킬킬거렸다.

    '아, 이거 산 다음에 또 한병 사고, 그거 창피해서 어머니랑 나 못보게 숨겨놓은 거지?'

    (정직한 나, 대답했다.)

    '응.'

    남편은 부인의 헛점을 발견한 게 뭐 그리 좋은지 히히히히 웃으면서 부엌을 나갔다.

    이후에 식초 두 병은 그대로 식탁에 놓여있다. 하나는 뚜껑을 열었고, 하나는 안 연 상태로.

    살림 엉망진창인 내가 안 쓰는 한 병을 찬장에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근데, 엄마는 그걸 사재기 물품으로 보신 거고, 아마 나보다 살림을 더 잘하는 남편은 식초 두 병을 보면서 '아...나의 부인, 팜펨의 살림 실력' 하고 혼자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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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남편아, 당신은 모른다.

    이렇게 어쩌다가 식초 사재기를 한 당신의 부인이 얼마나 많은 비밀을 지고사는지..

    나는 비싼 것을 사지는 않지만 충동구매--아니 물건을 잘 보고 사지를 않는다. 그래서 집에 이상한 물건들을 들여놓는다. 그리고 스스로 그런 맹점을 스스로 알기에 비싼 것을 사지 못한다.

    나는 물품 설명서든, 식재료든  자세히 읽는 법이 없고 꼼꼼히 보는 게 없이 그저 한 눈에 들어오고, 마음이 동요하게 만드는 것을 휘어잡는다. 그래서 비밀이 많아진다. 남편은 모른다. 부인이 언젠가 짝이 안맞는 장화--즉 오른발만 두 개--를 들여왔다는 사실을...그 장화가 창고 한구석에 숨겨져있다가 비밀리에 버려졌다는 사실을. 

    남편은 모른다. 언젠가 과일 야채 세척용 깔깔이 장갑이란 게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걸 사면 내 삶이 편해질 거라는 착각에 낚아채서 샀는데, 또 오른쪽 두 개를 집어왔다는 사실을... 장갑에 오른쪽 왼쪽이 있냐 할 수도 있겠는데--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그냥 집어왔는데--안타깝게도 그 장갑에는 글씨가 프린트 되어 있어서 낀 순간에 짝이 안맞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그대로 눈에 보여진다. 6 불 낸 돈이 아까워서 당장은 못버리고 부엌 행주 설합에 구석에 숨겨두고 가끔 꺼내쓴다는 사실을 남편은 모르고 있다. (남편아, 부엌 설합은 제발 뒤지지 말아라!) 이렇게 나의 불행한 상품 구입기는 한없이 길고 처량하다. 그리고 나의 자존심때문에 남편에게는 감추고 산다.

    그러나 만약 남편이 모든 사실을 다 알게 되어도 난 떳떳할 것이다.

    일단, 내가 바람피우는 거 숨기는 건 아니니까. 

    또하나, 나는 남편에게 물을 것이다. 

    충동적으로, 한눈에 반해서, 아무 생각없이 낚아채는 내 성향 덕에 가장 큰 이익을 본 사람이 누구지?

    남편, 그대가 아니던가?

    내가 꼼꼼히 가격표 확인하고, 물건 검사하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사람이기에 (대머리끼가 다분하고, 나의 커리어를 위태하게 만들 소지가 분명한) 당신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을 주도한 것이었겠지?

    그러니까 식탁 위의 식초 두 병을 보고 나의 생각없음을 비웃지 말라!

    운명적으로 한 식탁에 놓이게 된 저 식초 두 병을 한 쌍의 원앙새로 삼고 앞으로 더 잘 살아보자고! 

    그리고....코로나바이러스 덕에 나도 변했다는 사실 기억하시라!

    나 이제는 쇼핑 리스트 들고 쇼핑한다!

    나 이제는 낭비없이 꼼꼼하게 살림한다!

    25 년차 주부에게서 이런 소리가 나온다는 게 약간 처량하다는 거 안다만, 그러나 기뻐합시다.

    나는 여전히 성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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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부로 캘리포니아 전역에 'stay at home order' (자택 격리령) 을 발동되었습니다. 이미 LA 카운티나 오렌지 카운티에서도 외출을 제한하는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는데 이렇게 캘리포니아 전역에 자택격리령이 내려졌네요.

    똑똑한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현명한 선택!  확진자 숫자가 미국에서 세 번째인 캘리포니아 주에 꼭 필요했던 결정!

    자세히 들어보면 좀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나는 나의 가족들에게처럼 여러분께 말을 해야할 때가 되었다' '8 주 이내에 캘리포니아 주민 (4천만명)의 56 퍼센트가 감염될 수 있는 상황이다'  '그 중 20 퍼센트 (거의 2만명!) 는 병원에 입원해야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주 병원 시스템이 감당할 수 있는 숫자를 크게 뛰어넘는 것이다' 등등.

    주지사는 자신도 자택격리령을 원하지 않으나 필요한 결정이며, 이 행정 명령은  잠정적이며 변화하는 매일매일의 상황에 맞춰 조정될 것이라고 했어요. 그러나 아마도 당분간은 이 상태가 유지될 것이겠지요. 

    자택격리령이란 게 정확히 무엇인가? 식품 쇼핑, 병원 방문, 공동세탁소, 은행, 약국 등 필수적인 용무를 제외한 모든 외출이 제한되는 것입니다.  주유소, 은행, 약국, 병원, 식료품점, 배달전문 식당들은 필수 서비스를 제공하므로 문을 열지만 그 외에 모든 가게는 문을 닫습니다. 공개행사, 모임들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단, 산책과 운동을 위한 외출은 허용되는데 그때는 옆 사람과 1.5 미터의 거리를 유지해야합니다. 

    이런 행정명령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요.  아직도 코로나바이러스의 무서움을 직시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가짜 뉴스'로 생각한다거나, 아니면 미디어가 너무 과장해서 사람들에게 공포를 조장한다는 식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즉시 '당신이 왕인줄 아니?' '흥! 나는 밖으로 나갈 거야!!' 라는 식의 저항과 조롱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개인이 사회적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자유의지로 사유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중요한 만큼 , 그런 개인주의가 공공의 건강에 커다란 해가 되면 안된다는 상식적 사고가 필요한데 이번에 보니 그 밸런스를 맞춘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구나 싶습니다.

    열흘 전, 우리동네 주민회에 저의 집 수리 문제를 건의하러 갔었는데,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회의 시작하기 전에 코로나바이러스 이야기를 하고 있더군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중국에서 일어난 플루 문제를 갖고 왜 미국 미디어가 난리를 치는가라는 말에 공감 표시. (공화당 냄새가 폴폴 ㅠ) 그런 대화가 오가는 중 한심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젓는 한 남성 (민주당 냄새가 폴폴). 왜 건강/복지 문제는 꼭 당색에 의해 색칠되어버리는 것인지ㅠ

    저도 공화당을 지지하는 친구와 3 주 전에 코로나바이러스 이야기하다가 제 혈압이 160 까지 올랐어요. 그깟 플루갖고 왜 그러냐고 해서, 그것만은 아니다, 감염 경로를 확실히 모르고, vaccine 이 없는 병이므로 우리가 조심해야한다고 했는데, 콧웃음 치면서 "네 주위에 확진자라도 있니?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같은데?" 하는 거에요. 아악.... 당시 이미 이태리에서 난리가 난 상태였는데, 이들은 뉴스를 과연 보기라도 하는 것인가?! 동네 에 개 한마리가 혼자 돌아다니다가 구조되었다는 기사에 열광하면서 정작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 끊고 그저 자기는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고 살다니? 자기에게 실질적, 개인적인 피해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매사를 다 정치적 시각으로만 보는 현실이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한쪽에서는 사재기 난리를 피우고 있고, 또 한쪽에서는 콧웃음을 치고 있고...안타까운 현실이지요.

    이번 행정명령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의 확산을 억제하고 주민들을 보호하는 것이지만,  바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려는 중요한 목적도 갖고 있는 듯합니다. (주지사의 말 "We will have the social pressure that will encourage people to do the right thing.")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험성을 직시하고 모두 협력하여 이 시간을 잘 이겨내기를 바랄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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