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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서 (1)
    스치는 생각 2020. 2. 15. 17:26

     

     

    시댁/브러셀로 여행 계획이 잡힌 뒤에 남편과 나는 아주 중요한 일을 했다---유서 검토와 수정.

    사실 유서 검토는 우리가 대략 일년에 한번씩 하는 일이다. 에릭과 내가 둘이 오래 집을 비우게 될 때--주로 휴가 떠나기 전에--하게 되는 듯하다.

    유서에서 중요한 항목은 1) 재산과 2)'사전 의료 지시서' (Advance Health Directives) 이다. 

    평소 남편과 내 가치관, 특히 돈에 관한 사고, 그리고 신앙에 기초해 재산에 관한 뜻을 문서화 해두었다.  그러나 , 매년 크고 작게 변화하는 우리의 재정과 아직도 학생으로서 성장해가고 있는 아이들의 여러 크고 작은 변화와 아이들의 (변화무쌍한!) 미래의 계획 등을 고려해서 우리의 유서/결정이 합리적인지를 검토하고 수정한다. 

    사전의료지시서는 아이들을 편하게 해주고 우리도 깨끗하게 죽기 위해서는 아주 필요한 것이다. 아이들이 평소 대화를 통해 우리가 의식 불명 등으로 치료를 선택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일 때 무의미한 생명 연장을 거부한다는 뜻을 잘 알고 있지만 그건 실제 상황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공증을 받은 사전 지시서를 통해 우리의 결정을 표명해놓아야만한다. 그 서류가 없다면 결정권은 병원과 의료진의 몫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12 월 중순이 넘어가는데, 크리스마스 츄리는 세울 생각도 하지 않고 나는 유서 읽고 생각하는 '놀이'에 심취해있다. 나는--이게 좀 엽기적인 소리같다만--유서 검토하는 게 넘 재밌다.

    유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은근슬쩍 들어있는 재밌는 이야기이다. 건조한 법률적 언어와 딱딱한 문장으로 표현된 나와 남편의 수많은 결정에는 이제까지 우리가 보고, 읽고, 생각하고, 배운 것들이 스며들어있다. 이런저런 결정에 영향을 끼친 사람들도 떠오른다. .

    유서를 검토하고 나면 나는 새로 안경을 맞춰쓴 것같이, 마음의 눈이 맑아짐을 경험한다. .죽음을 출발점으로 시작해서 삶을 보니 저절로 일어나는 시각 교정 현상. 사물/사람 관계가 더 깨끗하게 보인다.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사소한 감정의 쓰레기, 머리 속에 복잡한 생각의 쓰레기들을 그게  쓰레기라고 파악할 수 있게 되고,, 쓰레기가 쓰레기임을 알아보니 그걸 버리는 게 아주 쉬워진다. 뿐인가, 진짜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쉬워진다. 여러가지 이유로 버리지 못하던 그런 물건들,  어정쩡하고 모호한 물체들을 쓰레기라는 것을 인정하고 과감히 버릴 수 있게 된다.

    맑은 눈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새롭게 하게 된다.  therapy 가 따로없다. 용기가 불끈~~책임감도 불끈~~! 

    그러니 유서는 내가 죽은 뒤를 대비한 준비, 나의 자손들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 빠릇빠릇 살아 있는 나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올해도 나는 남편을 채근해서 즐거운 유서 검토를 하고 있다..

    (20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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