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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명아, 나의 청소기야!
    스치는 생각 2008. 9. 11. 13:28

    며칠 전에 동네처자가 새 청소기를 장만했습니다.

    아주 깜찍하고 예쁜, 그러면서도 듬직하니 약간 로보트같은 분위기의 청소기였어요.
    청소기를 새로 장만하고, 정말 일을 잘 하는 청소기와 사랑에 빠진 동네처자가 인간의 존엄성 운운하면서
    감격해하는 거 들으면서 저도 덩달아 신났습니다. 저도 청소기가 참 좋거든요.

    (갑자기 마리가 나한테 장거리 이사가면서 청소기를 가져다 주려고 했던 거 생각나네. 그 무거운 걸....
    고마웠어요. 그 때 가져다 준 문방구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어요.^^)

    옛날에 소피네 홈피에 올렸던 청소기 이야기 올립니다.
    (예전에 소피네 홈피에 올렸던 글들 가끔 올려달라고 한 친구들에 대한 답변이기도...^^)





    ---------------------------------------

    사람마다 특별히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

    음식 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
    음식 먹는 거 좋아하는 사람
    음식 해놓고 사진 찍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쇼핑 좋아하는 사람..
    쇼핑 중에서도 신발 사기를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옷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문방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스카프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좋아하는 것을 사서 즐기고, 가끔 갈아치우고, 또 새로 나온 모델에 관심을 갖고....그게 삶에 자잘한 기쁨을 준다.

    나는 옛날에는 신발을 좋아했었고 (옛날에 한국에 있었을 때 가수 '방미'의 신발보다 내 신발이 더 많았던 적이 있었다. 방미가 인터뷰를 하면서 신발 갯수를 밝혔는데, 40 개 였나 그랬다. 울 엄마, 좁은 집의 신발장을 가득 채우다 못해 흘러나와 현관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내 신발을 가르키며 "네가 가수냐!" 하고 울부짖으셨었지...^^ 엄마, 안녕?)

    결혼한 뒤에 돈이 없었을 때 욕망이 사라졌다.
    돈으로 거름을 줘야 욕망이 자라는 법,돈이 없으면 욕망이 다 말라 죽더라.
    욕망이 없어지니 돈이 있어도 돈을 쓸 필요를 거의 안 느낀다.

    옷 가게라고 하면 중고품 가게들 알고 있고, 일년에 두어 번 가끔 가서 왕창 쇼핑을 하는데, 20불에 원피스 6개를 살 수 있는 가게이다. 애들 옷도 그곳에서 산다. 유행에 관심 없고 (욕망이 죽었다 해짜녀~~!!-.-) 그냥 혼자 기분내면서 옷 갈아입는 재미를 보려면 옛날 옷들 두고 두고 입어도 한참 입는다. 그러다보니 울 엄마 40대 초반에 입던 쟈켓이랑 바지, 요새 잘 입고 돌아다닌다.

    자동차, 부엌 용구나 가구에 대한 욕심도 전혀 없다.

    대강 대강 사는 모습 보고
    남들은 안스러워하고 ("저 나이에...쯧...")
    나는 편하다.

    근데...
    이렇게 욕망이 줄었는데도 가끔 흑심을 품게 되는 게 있는데
    이 글 첫머리를 읽으시면서 졸지 않으신 독자들께서는 이미 짐작하셨겠듯이,
    (제 글은 항상 옆길로 새는지라, 잠이 드셔도 이해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름하야,
    (점점 격앙되는 목소리!)

    넵!

    청소기 입니다~~~~

    전기청소기..

    나는 청소기가 무척 좋다.
    그냥 바라보는 것만해도 좋다.
    청소기들이 줄지어 서 있는 가게에서 모델 이름이나 번호같은 것은 전혀 모르지만,
    그냥 어떤 디자인으로 만들어나오나 주의깊게 보게 된다.
    가끔 저런 청소기 하나 있으면 좋겠다 욕심을 갖기도 한다.
    전기 청소기 청소는 내가 좋아하는 일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남들은 청소기 청소는 남편의 몫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내가 한다.
    첫 애 낳고서 일주일 후에 벌떡 일어나 온 집안 청소기를 돌렸다는..
    (그래서 이 몸이 지금 말이 아니라오.)

    안타까운 것은 전기 청소기는 자주 살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일 년에 100불 짜리 옷을 하나 산다면 그게 그리 유난스런 일은 아니리라.
    그러나 비슷한 가격의 전기 청소기와 같은 가전제품은 일년에 한번씩 바꿀 엄두를 내지 못한다.
    가격으로 따지자면 웬만한 옷 한벌 가격이고, 따지고 보자면 기껏해야 일년에 몇 번 입고 마는 좋은 옷보다 훨씬 더 유용한데도 말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소유했던 전기 청소기란 별로 많지 않다.
    기숙사 시절에 하나,
    터스틴 아파트에 살 때 하나,
    그리고 현재의 집에서 산 거 하나.

    몇주 전 내가 애지중지한던 전기 청소기께서 운명하셨다.
    (청소기를 너무 좋아하다보니 의인화에 존칭까지 쓰고 있다..)

    갑자기 엔진에서 검은 연기가 나오고 뭔가 타는 듯한 고약한 냄새가 나더니...
    눈을 감으셨다.

    엉엉.

    나는 그 청소기를 아주 좋아했다.
    그 청소기가 살아있었을 때에 나는 존칭을 사용하기보다는 애칭을 사용했었다.
    투.명.이

    나는 투명이를 2년 전 엄청 세일을 했을 때 샀다. 청소기 bag을 갈 필요 없이 투명플라스틱 통을 비워주기만 하면 되는 새로운 모델이었는데, 가격이 100불이 안 되었다. 투명이 전에 쓰고 있던 청소기는 무지 무지 싸구려라서 bag을 아무데서나 구할 수가 없는 것이었을 뿐더러, 흡입력이 안 좋아서 청소를 하는 기쁨이 없었다.

    그런데 투명이가 우리 집에 온 날...
    헉, 투명이의 강력 흡인력에 감동을 받았고,
    거기에 덧붙여
    투명이가 흡인한 쓰레기가 투명한 통 속으로 들여다보이는 것을 보고
    흥분했다.
    그리고 투명이와 같이 생활하면서 우리 투명이는 bag을 살 필요가 없으니 돈도 절약해줘 효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더욱 감동 받았다.
    날이 가면서 투명이와 나는 정말 친하게 지냈다.
    (정리정돈은 잘 못해도 바닥 먼지는 참지 못하는 내 성질 때문에...)
    2 년 동안...

    며칠 전, 투명이가 운명한 뒤, 에릭과 청소기를 구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여러 모델들을 살펴보는데....왜 이렇게 다양한지, 왜 이렇게 다 개성들이 강하고, 이게 좋다 싶으면 저게 더 좋은 면이 있고, 저게 좋다 싶으면 이게 더 유용하고...강력한 것은 무겁고, 예쁜 것은 흡인력이 약하고, 모델이 이쁘다 싶으면 불편한 거 같고,.....이래저래 다 따지다보니까 살 수가 없었다. (늦게까지 결혼하기 힘들었던 생각이 나더라니. 이게 좋으면 저게 문제요, 저게 좋으면 이게 문제요....식으로..)

    투명이가 운명한 시기는 내가 아주 바쁜 일이 생겨서 시장에 갈 수가 없었다.
    에릭더러 내가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상세하게 설명한 다음 에릭더러 큰 가게에 가서 좀 골라오라고 했다.

    저녁에 에릭이 청소기를 들고 왔다.
    나는 박스를 열지도 않은채 툇자를 놨다.

    "에릭, 당신은 우리 집이 뭔 성 (castle) 이라도 되나? 왜 이렇게 큰 걸 샀어? 너무 무거워. 그리고 너무 비싸."

    며칠 후, 에릭이 바꿔왔다.

    작은 모델이고 엔진과 청소기가 분리되어 나같이 힘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주 좋은 모델이었다. 가격이 100불이란다. 흠...괜찮구나.....하고 들여다보다가 나는 비명을 질렀다.

    "아니, 이건 속에 봉지를 갈아줘야하는 거잖아?!"

    에릭이 미안해하면서 대답했다.

    "응...근데...그거 뿐이 없었어. 이 모델들은 다 종이 봉지를 갈아끼워야하는 거야."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에릭, 내가 말했잖아! 나한테 제일 중요한 것은 봉지를 갈아끼우지 않아도 되는 투명이 같은 거라고. 그게 나한테는 가장 중요한 거라고!"

    내 격렬한 반응에 에릭이 당황했다.

    "나도 모르는 건 아닌데, 없는 걸 어떻게 해?"

    "그럼 사질 말아야지! 난 투명유리를 원해!"

    (내 특기...봇물 터지는 거가 시작되었다.)

    "에릭, 나는 청소를 할 때 설렌다. 투명이 속에 보이는 먼지를 보는 기쁨 때문에...내가 열심히 이방 저방 돌아다니면서 청소한 결과로 이렇게 많은 먼지를 제거했구나 하는 뿌듯함을 느껴. 그게 얼마나 짜릿한 기분인지 알아?"

    (나도 내가 투명유리 속을 들여다보는 것을 그렇게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깨닫고 솔직히 좀 놀랐다.)

    "집안 일들, 아무래 해봤자 표도 안나지. 깨끗이 청소해봤자, 애들이 학교 갔다 돌아온지 30 분 내로 다시 어지럽혀지지. 부엌, 아무리 깨끗이 치워도, 일주일 후에는 다시 여기 저기 손봐야하지. 집안 일은 제 때 하지 않으면 표가 확 나고, 제 때 해봤자 표가 나지 않아. 그래서 나는 투명이 청소기를 좋아해. 믿을 수 없겠지만, 투명이 잡고 일 시작할 때 야릇한 흥분 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거실로 목욕탕으로 투명이를 돌리면서 어서 청소를 끝내고 투명이 속을 들여다봐야지 하는 꿈을 가진다. 투명이가 왜 그리 좋으냐고? 투명이는 내가 한 일의 징표를 보여준다...단조로운 집안 일이 주는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단 말이야...나는 청소 끝난 후에 가만히 먼지 들여다보는 걸 좋아해. 몰랐지? 그래...나 청소 끝난 후에 맨날 청소기 속을 들여다보고 앉아 있어. 우리 식구의 삶의 보이지 않는 먼지들을 내가 이렇게 모았구나...그 기쁨이..."

    어쩌구 저쩌구...

    말하면서 내가 왜 이렇게 유난을 떨지? 이런 소리를 이 사람이 이해를 할까? 생각이 들었다. 

    에릭은 "신주, 또 시작이네. 이거 저거 분석하고 의미 찾고 하는 거 좋아한다해도, 청소기에 인생을 걸기라도 한 듯이 떠드나?"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어쩌냐? 내가 느끼는 감정, 내가 하는 생각, 그게 내가 말한데로 사실인 것을.....

    나는 투명이를 만난 후에 청소의 기쁨을 만끽하고 살아왔던 것을...
    그리고...
    새로운 청소기...불투명한 bag 속으로 내 '업적'을 혼자 삼켜먹을 그 청소기를 들고서 이방 저방 청소할 생각을 하니, 청소를 시작할 때, 청소를 하는 내내 내가 갖고 있던 조그만 희망----어서 끝내고 내가 모은 먼지를 투명이 속으로 봐야지!--을 포기하고 살아야한다니 앞이 깜깜하던 걸..

    에릭은 내가 흥분해서 마구 지껄이면 괜히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들어준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내 말을 다 듣더니, "그 모델이 있다면 100불을 더 주더라도 샀을 거야" 라고 하더라.

    .....

    나도 몰랐다.

    내가 "쪼잔하게" 청소기에 흥분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청소기 먼지를 보면서 몰래 희열을 느끼고 한다니..
    그리고 그 희열을 못 느끼게 될까봐 그렇게 방방 뜨다니...

    만약 내가 돈을 많이 번다면?
    내가 취업주부였다면?
    내가 집에 일하는 사람을 써서 청소를 하는 사람이라면?
    .....
    나는 필시 청소기의 생명에 내 목숨을 걸고, 청소기 모델에 의해 행복/불행감을 느끼는 사람은 아니었으리라...

    세상에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까짓 먼지덩이를 보면서 보람을 느껴?
    한심...

    그런데...투명이로 인해 남편에게 다다다다 퍼붓고 나서 곰곰 생각하다가 깨달은 게 있다.

    먼지덩이 모으면서 보람을 느끼는 게 내 삶이라는 것.
    덧붙이고 삭제할 거 없이, 있는 그대로 나의 삶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매일 매일의 삶에 인생을 걸고,
    나와 내 가족이 만들어내는 쓰레기, 더러운 것, 먼지 등을 닦고 치우는 일이
    내가 택한 삶이다.
    내가 먹는 거, 내가 입는 거, 내가 쓰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는 게 내가 택한 삶이다.

    돈의 투자를 하지 않으니 (세상적 기준으로) 별로 로맨틱하지 않은, 구차하고 지저분한 삶 속에서 남편과 서로의 영혼과 육체를 더 꽉 부등켜 안고 사는 게, 그리고 그 모습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남녀관계의 본을 주는 게 나의 꿈이었다.

    청소하는 사람을 두지 않기 위해서 조그만 집을 원하고,
    청소하는 사람 대신에 우리 가족들이 조금씩 노동을 나눠할 수 있도록
    남편과 점점 자라는 아이들이 가정을 같이 만들어나가는 '홈메이커'로서 키우고,
    그 아이들이 다시 자기 나름대로 민주적 가정을 만들어 나가게 도와주자는 게 나의 꿈이었다.

    그런 계획의 일환으로
    우리 화장실 청소는 우리 식구가 하자,
    우리 집안 청소는 우리가 하자

    그게 나의 삶의 계획이자 꿈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는,
    청소기에 대해서 고민하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청소기 먼지를 보고 기뻐하는 나는
    나의 꿈을 현실로 살고 있는 거다.

    꿈과 현실이 가까운 삶...
    그게 나에게는 '행복'이란  개념에 가장 근사한 삶이다.

    투명이는 죽으면서
    내가 과거에 가졌던 꿈과 내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 그리고 내가 향하는 미래를 다시금 보게 해 주었다.
    먼지와 뒹굴면서 사는 나의 현재의 삶이
    먼지에서 와, 먼지로 화해 영원으로 속해지는 나의 삶의 여정에서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과정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래저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투명이다.


    피에쑤: 새로 온 '불투명이'는 나름대로 자기 일을 잘 알아서 한다. 생긴 게 못생겼다고 너무 구박하지 않고, 속이 모잘란다고 너무 차별하지 않고, 구박하지 않고 잘 데리고 살기로 했다. 같이 있은지 이주일 되었는데, 나를 잘 따르고 나름대로 정이 간다. 반면, 에릭은 나의 투명이에 대한 사랑을 알고, 일년 후에 투명이를 새로 장만하리라 다짐을 하고 있다. 근데, 그 때 쯤은 내가 우리 '불투명이'한테 이미 정이 붙어서 쉽게 포기하진 않을 거 같다.

    (2004년 2월 14일)


    피에쑤:  1 년 후, '불투명이'는 청소기가 필요했던 친구에게 줬다가 그 친구가 한국에 들어가면서 다시 우리집에 오게 되었다. 현재 사막 집에 서 잘 쓰고 있다. 나는 새 투명이를 맞이했는데, 이 녀석이 아주 말을 잘 듣고, 먼지를 무섭게 잘 뽑아들여 나를 무지 무지 행복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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