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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 년만의 장례식
    부모님 이야기 2018. 12. 12. 18:04
    '사바'는 히브리어로 '할아버지' 라는 뜻이다. 80년대 말엽 이스라엘에 살 때, 나는 나를 이스라엘로 초대했던  오프라 교수의 아버지를 사바라 불렀다. 
    사바는 무척 웃기고 유쾌한 분이였다. 당시 부모님께 거의 매일 쓰다시피한 편지에서 나는 '노인이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는게 놀랍다'며 할아버지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그 편지들에 기초해서 나중에 혼자 영어 에세이를 썼다.
    2 년 전에 오프라 교수랑 이멜을 나누던 중,  그녀는 내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 쓴 에세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보내달라고 했다. 자신의 아버지에 관해 쓴 에세이니 읽어보고 싶은 게 당연하다 싶어서 이멜로 보내드렸다. 그녀는 읽자마자 나에게 흥분해서 답장을 했다. '너의 글을 읽고 나는 이제까지 돌아가신 아버지와 화해를 하게 되었다' 라고 하였다. 나는 금방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쓴 글에 무슨 내용이 있길래 그러지?  다음은 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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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 교수의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두 달 뒤, 그녀의 친정 아버지 (사바)가 돌아가셨다. 사바의 부음을 들은 것은 안식일이 끝나는 토요일 저녁, O 교수의 아들인 드로가 나의 기숙사 방문 밑으로 남겨두고간 쪽지를 통해서였다. 
    "사바가 돌아가셨어. 텔아비브의 사바의 아파트에 먼저 간다. 네가 내 차를 같이타고 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버스를 타고 올 수 있으면 오길 바란다." 
    나는 깜짝 놀랐다. 사바는 내가 얼마 전 그의 집에 하루 묵었을때까지도 아주 건강했기 때문이다.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당장 버스를 타고 텔아비브로 향했다.
    내가 사바의 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묵었던 것은 이집트 여행을 갔을 때였다. 텔아비브에서 카이로로 가는 새벽 버스를 타기 위해서 나는 하룻밤을 텔아비브의 사바의 아파트신세를 졌다.
    84 세의 나이로 혼자 살고 있던 사바는 다리가 약간 불편하지만 혼자 사는 것에 아무런 불편이 없어 보였다. 적적하던 아파트에 손녀가 왔다고 무척 기뻐하며 그는 손수 나를 위해 샐러드와 치킨 스프를 준비했다. 식사하기 전, 그는 자기 샐러드에 귀리의 겨를 듬뿍 뿌리며 말했다.
    "난 죽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고 싶어. 그래서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으려 노력해. 매일 다이어트를 하고 있지."

    또한 사바는 나중에 자녀들에게 부담이 될까봐 두렵고, 자식들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으니 그저 잠자는 중에 죽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도 했다.

    식사 후 사바는 깨가 박힌 커다란 프레젤이 든 유리 단지를 갖고 왔다. 큼직한 프레쩰을 꺼내 나에게 주면서,
     "이게 내가 참 좋아하는 간식이야. 그러나 체중이 늘까봐 하루에 딱 한 개만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어.
    라고 했다. 이미 한 개를 먹었기에 또 먹을 수가 없다면서 내가 프레쩰 세 개를 맛있게 먹어치우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다이어트를 하는 고령의 할아버지가 손녀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맛있게 먹는 것을 침을 삼키며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 너무도 재밌어서 속으로 웃음을 참아야했다. 매사에 자신의 감정에 참 솔직한 사바. 친구같은 할아버지.
    그날 밤 나는 사바랑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많이 웃었다. 사바가 재밌는 분이라는 게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나는 이스라엘에 도착하자마자 첫 가족 모임에서 사바를 만났는데 그가 '할아버지'라는 권위에 갇혀 구석에 말없이 가만히 있지 않고 손자와 격렬히 토론을 하고 자기 '걸프렌드' (80 대 중반의 할머니!)에게 애정 표현을 하며, 솔직함과 엉뚱함을 무기로 식탁에서 대화의 주도권을 놓지지 않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었다. 노인의 모습이 저럴 수도 있는 거구나. 매사에 긍정적이고 유머러스해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사바는 내가 그때까지 갖고 있던 노년에 대한 이미지--권위적이거나, 아니면 아주 무력하고 젊은이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집단--를 바꿔버렸다.
    사바의 텔아이브 아파트에서 묵던 날 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사바는 자기가 원래 긍정적이고 유쾌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지금도 약간은 그렇지만 성격이 불같았고 아주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해서 화를 쉽게 내곤 했었어. 옆의 사람들을 많이 힘들게 했었어. 나의 가족들은 더더욱...그러다가 80 세 생일 2 주 전에 사고를 당하면서는 성격이 더 나빠진 거야모든 일에 부정적으로 되었고 내 몸이 옛날과 다르다는 사실에 내내 불만과 화를 품고 살았어.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난 왜 평생 화만 내고 살고 있지? 그래서 좋은 게 뭐람?' 하는 생각이 들겠지."
    그런 자각이 있은 후, 사바는 스스로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화가 날때마다 잠시 멈추고 생각했어.
    '내가 왜 별거 아닌 일을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거람? 
    내가 왜 화를 내는 거지?
    왜 나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내 태도를 바꿔야해.' 
    그리고 난 나를 바꾸려고 노력했어." 

    나는 사바가 80 세가 넘는 연세에, 한평생 걸쳐 형성된 자기의 성격과 사고방식을 바꾸겠다는 의지와  그것을 실천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제까지 내내 유쾌하고 긍정적인 사바를 좋아했지만 그날의 대화 이후 나는 할아버지를 더 존중하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사바는 새벽 4 시에 나를 깨워서 차로 여행사까지 데려다주셨다. 사바가 차가 한 대도 없는 텔아비브의 큰 길에서 어찌나 조심스레 천천히 운전을 하던지, 나는 그 이른 새벽에 연로하신 사바를 끌어내어 운전을 시키는 게 너무도 죄송했다. 내가 카이로행 버스를 타기 직전에 사바는 나를 꼭 껴안아줬고, 버스가 떠나는 순간, 잘 가라고 손을 하염없이 흔들었다. 시원한 눈매의 잘생긴 얼굴의 그의 미소, 그게 내가 기억하는 사바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 기억을 안고 사바의 아파트로 서둘러 갔다. 많은 조문객들이 있었다. O 교수는 슬픈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곤 눈물을 삼키며 꼭 껴안았다. 그녀의 남편은 조문객들에게 다과와 음료를 접대하고 있었다. 큰 울음이 없는 침착한 분위기.
    나보다 먼저 도착해있던 드로가 나에게 속삭였다.
    "우리는 장례식을 하지 않을 거야. 사바가 오래 전에 장기 기증 서약을 하셨거든. 그러므로 실제적으로는 오늘이 그의 장례식인셈이지" 
    드로는 또한 사바가 다른 한쪽의 다리 수술을 한 뒤 수술 경과가 좋았으며, 며칠 내로 퇴원을 할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라 알려줬다. 저녁 식사를 잘 하시고 잠이 드셨는데 깨어나지 않은 거란다.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약간 미소를 띈 듯한 그런 표정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사바가 원하던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셨다는 것에 위안을 받았다.
    조문객들이 하나 둘 떠났다.  O 교수는 방에서 사바의 유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같은 그런 울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O 교수에게 달려갔을 때 그녀는 조그만 나무 박스를 들고 벽을 향해 선 채 울고 있었다. 
    나는 O 교수가 눈물을 흘리거나 흐느끼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 그녀를 위로해야할지 엄두가 안났다. 드로 오빠가 와서, "엄마...." 하며 O 교수를 껴안았다. 그의 눈도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날 밤, O 교수와 드로와 나는 식당에 갔다. 배고파서가 아니라 사바의 뜻을 기려서였다.
    사바는 "내가 죽으면 아주 좋은 식당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나의 죽음을 축하하며 파티를 하라" 는  사바다운 독특한 유언을 남기셨단다. 우리 셋은 밝은 야외 조명이 비춰주는 테라스 식당에 앉아 주문을 했다. 사바처럼 엉뚱한 농담을 잘하는 드로가 말했다.
    "지금 분명 사바는 우리가 자신의 유언을 잘 지키지 않아서 화가 나셨을 거야. 사바는 우리더러 아주 고급 식당에 가서 파티를 하라 했는데 이런 조그만 식당에서 밥을 먹으니..."
    사바가 떠나신 뒤 1 주일 후, 나는 O 교수 가족과 안식일을 함께 하기 위해 하이파의 그녀의 집으로 갔다. 침착한 분위기에서 저녁을 먹고, 딸이 만든 케이크를 함께 즐겼다. 식사 후 혼자 잠시 산책을 하고 내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뒤 잠을 잤다.
    다음날 새벽 나는 5 시에 일어났다. 침대에서 일어나 꼼짝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슬펐다. 
    나에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O 교수의 시어머니와 친정아버지가 두 달 간격으로 떠났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한국에서 내가 경험한 죽음은 초등학교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전부였다. 항상 말이 없는 할아버지를 난 잘 몰랐고, 필시 외로움에 갇혀 살았을 할아버지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면서 외로움을 덜어드리기엔 난 너무 어렸다. 친분이 없는 나의 할아버지의 죽음은 나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이스라엘에 와서 내가 처음 친해진 분들이 사바와 사브타였다. 외로운 분들이 외로운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법, 그들은나와 같이 하는 짧은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나를 기다려줬다. 그런데...내가 따르고, 나를 사랑해줬던 그분들이 1 년 안에 다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이른 시간,  O 교수가 노크를 했다. 화장실을 가는 길에 유리창을 통해 내가 일어나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심리학자인 그녀는 나의 심리 상태가 불안하다고 우려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나더러 정원에서 따뜻한 차를 한 잔 하자고 했다. 
    우리는 따끈한 차 한잔과 함께 차가운 아침 공기에 대비해 따뜻한 담요를 안고 나무가 무성한 테라스에 앉았다. 그리고 근 2 시간 동안 하염없이, 두서없이 죽음, 삶, 기억, 사랑 등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게 서로를 위로하고 자신의 어지러운 감정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새벽 공기에 몸이 차갑게 식어서 우리는 각자 방으로 돌아가 다시 잠을 청했다. 나의 마음은 훨씬 더 평안해졌다.
    다음 주, 기숙사에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O 교수가 보낸 것이었다. 인사를 적은 카드와 함께 사진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어린 아이들이 무덤에서 강강수월래같이 큰 원을 만들어 뛰어노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복사한 종이였다.
    "신주, 무덤에서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처럼 죽음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는 것, 분명 그걸 사바가 원하실 거야." 
    싱그러운 미소의 내내 유쾌한 사바의 얼굴이 떠올랐다. O 교수의 따뜻한 사랑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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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 월, 잠시 이스라엘에 갔을 때 O 교수와 나는 옛날처럼 정원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사바에 대한 글에 대해 고맙다고 하며 왜 그 글이 자기에게 큰 도움을 줬는지 이야기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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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버지가 스스로 너에게 이야기해준 불같은 성격의 피해자였어. 아버지의 분노 조절 장애때문에 온 가족이 많은 상처를 받았어. 나만이 아니라 나의 동생도. 그리고 가장 큰 피해자는 엄마였어. 아버지의 포악한 성격에 고통을 받는 엄마에 대한 동정심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내내 품고 있었지. 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난 아버지를 용서하기 힘들었어."
    나는 그 말에 너무도 놀랐다. 
    "정말요? 저는 사바가 집에 자주 오시고 사바에게 잘해드려서 그런 사연이 있으리라곤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물론 아버지를 사랑했어. 그러나 옛날 일을 잊을 수 없었고 그 상처때문에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어. 살아계실 때는 물론, 돌아가신 뒤 한참 뒤에도. 그런데 너의 글을 읽고 나서 그게 해결된 거야."
    O 교수는 내 글을 읽으면서 사바가 자신의 성격에 대해 반성을 하고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바꾸려는 노력을 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안 것이 아버지의 과거의 행실과 허물을 용서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내 아버지가 농담하고 웃고 하는 모습, 신주 너도 잘 알지?  아버지와 화해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런 밝은 모습을 보면서 난 오히려 마음이 차가워지곤 했어.  '아버지, 당신은 당신이 우리에게 준 상처를모르시고 이렇게 철없이 떠드는 거군요'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데 네 글을 읽은 후에 아버지가 생전에 자신의 성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자기를 바꾸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야. 비록 아버지가 나랑 식구들에게 사과를 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아버지가 한 인간으로서자신이 나빴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위로를 얻었어. 그래서 난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어. 아버지를 용서하니까 내 마음에 평화가 왔단다."
    나는 O 교수가 이제까지 몰랐던 가족의 과거의 허물을 나와 허심탄회하게 나눠줘서 고마웠다. 사바가 폭군이고, 어린 자녀와 부인에게 상처를 많이 준 사람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바의 언어적 감정적 폭력이 얼마나 지독했으면 심리학자/심리치료사인 그녀가  80세가 넘어서까지 아직도 열린 상처로서 고통받았을까 싶었다.
    동시에 O 교수가 자기에게 상처를 준 아버지에게서 직/접 "내가 너에게 잘못했다" 라는 사과를 받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한 인간으로서 반성하는 모습의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자신이 받았던 상처를용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인상깊었다. 



    O 교수가 일을 하러 자기 사무실로 들어간 뒤  나는 혼자 정원에 앉아 많은 생각을 했다. 
    사바. 아파트. 새벽의 운전. 사바의 미소. 죽음.....
    문득 사바의 장례식은 텔아비브 사바의 아파트에서 조문객을 맞은 날이 아니라, 우리가 레스토랑에서 사바의 죽음을 기리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은 순간이 아니라  어쩌면 O 교수가 나의 글을 읽으면서 자기 아버지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그를 용서한 순간일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이 아버지를  자유롭게 보내드린 그 순간이..... 
    동시에 나야말로 내가 정원에 앉아서 사바를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내가 몰랐던 사바를 처음 알게 되고 이렇게 사바에 대해 열심히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순간--- 이 처음으로 드리는 사바의 장례식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30 년만에 내가 마음으로 사바의 장례식을 드린 날,  O 교수의 정원은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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