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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시간을 훔친다
    모성- doodle 2019. 2. 15. 07:08

     

     (2018 01--아버지 돌아가시기 1 년 전의 글)

     

     

    아버지 병수발은 아버지의 생명의 시간을 연장해보려는 시간과의 싸움이지만 그것은 또한 내가 나만의 시간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기도 하다. 돌봄이가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게 어렵다는 것, 그게 병수발과 육아의 공통점이다. 

     

    그래서 나는 수년 전 아이들이 어렸을 때의 육아를 통해 터득한 교훈, 즉 ‘시간은 나지 않는다. 고로  내가 시간을 내야한다’를 현재의 삶에 적용하려고 애쓴다. 

     

    시간을 ‘내다’와 ‘나다’는 획 하나 ‘ㅣ’ 의 차이일 따름이나, 그 획 하나는 한 인간이 시간의 주체이냐마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삶의 주체이냐마냐를 가늠짓는다.

     

    시간이 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피동적 태도라면 시간을 내는 것은 능동적인 태도이다. 두 표현이 시사하는 시간관의 본질적 차이는 ‘공부’라는 개념과 연결지으면 극명히 드러난다. (‘시간이 날 때 공부를 하는’학생과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하는’학생의 차이.) 시간을 내다는 영어로 ‘make time’ 즉, 시간을 만들다인데 ‘만들다’라는 단어는 시간의 능동적 관리, 관리자의 주체성을 잘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육아, 수발은 아무리 기다려도 나만의 시간이 안 난다.  절대로 시간이 ‘저 좀 쓰세요’ 라고 찾아오지 않는다. 게다가 시간을 낸다는 게 현실적으로 아주 어렵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하나?

     

    훔/쳐/야/한/다.  시간을 훔치고, 거기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야한다.

     

    시간을 내는 것을 ‘훔치다’라는 과격한 효편을 사용해야할 정도로 수발을 들면서 시간을 내는 게 어렵다. 아버지 건강이 약해지면서 나를 위한 시간을 내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아버지가 병상에 누우신지 1 년 후에 잠시 나름 안정기가 있었다. 도우미를 사용하고, 아버지 팔이 회복되고, 당뇨가 조절되었고 그래서 나는 짧은 기간이나마 아침에 일찍 카페에 가 40 분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2016 년 11 월에 쓴 글에서 나는 카페에서의 황홀경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는 커피빈 카페! 집에서 차로 5 분 거리의 카페이다. 내 앞에는 설탕을 듬뿍 넣은 달달한 커피가 있다. 충전이 100 퍼센트 완료된 내 컴퓨터. 세상에 부러운 게 하나도 없다. 이제 곧 내 마음의 충전도 100 퍼센트 될 것이다. 

     

    그런데 시간은 없다. 좀 있다 집에 가야한다. 40 분 동안 집중해서 글을 쓰며 나만의 시간을 만끽해야한다. 아, 그러나 40 분이라는 시간이 나에게 주어지다니, 그것만해도 어딘가!  

     

    오늘도 아침에 아버지 식사와 면도를 마친 뒤 8 시경 집을 나왔다. 도우미가 와서 엄마를 도와 아버지와 아침 산책을 하는 동안 나는 이렇게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책 읽거나 그림도 그리거나 글을 읽을 것이다. 

     

    집에 할일이 산더미이고, 이렇게 굳이 차 몰고 카페에 나오면서 내가 나만의 시간을 갖는게 영 미안하다.  아무래도 내가 있으면 소소한 것까지 챙겨드리면서 부모님을 편하게 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주에는 카페에 나오는 대신 우유 커피를 타서 50 분간 (드라이빙 시간이 절약되므로 10 분 더해서) 내 방에서 혼자 노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집에서는 모든 소리가 들리고, 마음이 분산이 되어 나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밖으로 나오면 뭘 하든 집중력과 생산성이 높아진다. 충전이 빨리 된다. 그래서 나는 운전의 불편함을 감수하며 수고스럽게 카페로 나오는 것이다.

     

    내가 나의 시간을 잠시라도 갖지 않으면 장기적으로는 우리 모두에게 유익하지 않다. 내가 잘살아야 부모님도 잘 모실 수 있으므로 나는 나부터 챙기려고 노력한다. 카페로 나오면서 마음이 좀 불편할 때 나는 '당신의 안전이 최고로 중요합니다' 라는 말을 상기한다.

     

    오늘같이 이렇게 햇빛이 찬란한 날, 커피향이 진동하는 이 아름다운 카페의 구석에서 달달한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글을 쓰자면 온 시름이 다 사라지고 마음에 감사함이 퐁퐁 샘솟는다.  너무 기뻐서 내 옆에 존재하는 이름 모르는 이웃들을 껴안아주고 싶을 정도이다. 

     

    아, 시간이 다되었다. 이제 가야한다. 돌아갈 집이 있음이, 해야될 일이 있음이, 그리고 반가움으로 나를 맞아주는 부모님이 계심이, 내가 열심히 살 이유가 너무도 확실한 현재의 상황이 신난다.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고, 등 마사지를 해드리고, 면도해드리고, 밥을 드리고, 운동시켜드리고....아직도 아버지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 

     

    그나마 건강하시기에 이렇게 시간을 훔칠 수 있는 게 감사하다.

    100 퍼센트 충전 완료!"

     

     

    그 이후 얼마 안되어 나만의 시간을 내는 게 어려워졌다. 엄마의 어깨와 팔에 이상신호가 와서였다. 도우미가 있더라도 내가 없으면 엄마가 도우미를 돕기 위해 손을 한번이라도 더 쓰게 되니 위험하다.

     

    몇 달 후 엄마의 어깨가 나아졌으나 아버지가 더 쇠약해지셨다. 그래서 내가 밖에 나가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일주일 내내 아침 6 시 반부터 자정까지, 정신없이 바쁜 삶,  일주일에 한번 슈퍼마켓 가기, 은행, 엄마 아버지 모시고 병원가기, 약국가기, 음식 준비하기, 아버지의 정신적인 삶에 도움이 되는 모든 행위-이것만해도 스케쥴이 꽉 차버린다.

     

    가끔 친구 만나는 일도 불가능해졌다. 친구들을 만나면 너무 반가운데 이야기를 하고나면 피곤해서 아버지 수발에 즉각적인 지장이 있고, 외출 다녀온 뒤 쉬지 못하고 일을 하면 며칠간 피곤에 절어 고생해야한다. 내가 피곤하면 고혈압과 심장 질환이 있는 엄마가 더 많은 일을 하게 됨을 의미한다. 안 나가는 게 답이다.

     

    어쩌다가 멀리서부터 친지들이 방문할 때는 마치 내가 해외 여행이라고 가는 듯이 며칠 전부터 면밀한 계획을 세워야한다. 자주 쉬어서 에너지를 비축해놓고, 손님이 오는 날은 도우미를 많은 시간 고용해서 내가 일을 덜 해도 되게끔 하고, 외출 전과 후로 쉬어두어 아버지를 돌볼 때 피곤하지 않게끔한다.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보이는 일상은 엄청나게 꼼꼼하게 세운 계획의 성공적인 결과이다.

     

     

    에릭을 위시해서 내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는 그래도 가끔은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엄마의 적극적인 지원과 도우미 덕으로 에릭과 3 주 또는 한 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음악회를 간다.  저녁에 4 시간을 비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밖에 나가기 위해서 준비할 게 너무 많아서 컨서트가 숙제같이 느껴질 때가 많았지만 유일하게 나와 에릭을 위해 정기적으로 하는 일이어서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나는 모짜르트, 바흐, ….의 음악에 맞춰 졸음의 해드뱅잉을 하기 일쑤, 언젠가부터는 아예 푹 자자 맘 먹고 비행기에서 쓰는 목베게를 꼭 챙겨간다. 음악회가 끝난 뒤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일어설 때 에릭은 농담기 하나 없이 진심으로 ‘음악 좋았어?' 대신 ‘잘잤어?’ 라고 묻는다.

     

    언니도 내가 몰아서 휴식할 수 있게 도와줬다. 자신이 강의와 작품활동으로 바쁨에도 시간을 ‘내/서’ 와주어 내가 평소에 누리지 못한 ‘일요일’을 몰아서 누릴 수 있게 해준다. 여름방학에는 석 주라는 긴 시간을 ‘내/서’형부랑 함께 아버지를 돌봐주었다. 내가 집을 떠나면서 가장 마음이 편한 것은 언니와 형부가 와 있을 때였고, 진심으로 감사했다.

     

    친구들도 참 고마웠다. 내가 나가지 못하니 친구들은 우리집에 잠시 들러 잠깐 차를 마시거나 문자로 근황을 나눈다. 성경공부 모임 친구들은 나의 편의를 위해 2 주에 한번씩 우리집에서 모임을 갖고 있다. 동생뻘 되는 자매, 선아와 미숙이는 정성들여 만든 김치, 찌게, 국 들을 떨궈놓고 사라지곤한다.

     

    현재까지 수발은 성공적이고 아버지의 건강이 유지되고 있으나 나는 너무 지쳐서 나만의 시간을 내서 뭔가를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되곤 한다. 하루 종일 관리자 역할을 하고, 퇴근없이 24 시간 내내 몸과 마음이 묶여있다보면 자기 것을 챙기기 쉽지 않다.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일만 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인데 말이다. 내가 나의 그런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바꾸려고 노력한다. 

     

    나만의 시간을 못 가질 때 일어난 한 에피소드.

     

    어느날 밤, 여늬 때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잠자리를 봐드리고 시계를 보니 밤 11 시였다. 하루 종일 아버지방-부엌-거실-부엌-아버지방을 오가면서, 집 밖으로 발 한자국 내놓지 않고 갇혀서 일을 한 힘든 날이었다. 마음이 갑갑해서 공기를 쐬자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은 작정하고 좀 울어보자' 생각했다. (난 울어서 스트레스를 푼다)

     

    밤 산책을 즐기는 남편은 이미 밖에 나가 산책 중이었다. 10 시 반 경에 나더러 산책을 같이 가자고 했는데 내 일이 안끝나서 혼자 나갔었다.

     

    혹시라도 밤에 우는 모습을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내딴에는 머리를 써서 남편이 가는 길의 반대쪽의 길을 택했다. 늦은 밤에 아무도 없었다. 맘 편히 눈물 흘리면서 인적이 없는 길을 걷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저만치서 어둠 속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남편이었다.

     

    나는 놀라서 멈춰섰다. 

     

    그는 어둠 곳에서 갑자기 멈춘 나의 모습을 보았지만 그게 나인지 몰라보고 묵묵히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황야의 무법자들의 결투 마냥, 단 둘이 맞닥뜨린 그 순간, 나를 못 알아보고 나에게 다가오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나는 내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날씨가 차가운 밤, 남편은 두꺼운 외투에 모자까지 쓰고 있는데 산발을 한 나는 내의같은 달라붙는 얇은 면 셔츠에 하늘하늘하는 면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창이 다 떨어진 실내화. 내 손에 들려있는 것은 핸드폰이 아니라 ‘돗보기 안경’ 이었다. 그리고 얼굴은 눈물 범벅이었다.

     

    나는 내 모습을 의식하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구차하고 처량하고 슬펐다. 남편에게 나의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뒤돌아갈 수 없었다. 돌아서면 다른 길이 없이 그저 우리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러니 그는 자기를 피해 집으로 도망치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얼어붙은 듯 서있는데 에릭이 가까이 다가왔다. 10 미처 지척에서야 날 알아보고 “당신이야?” 라고 반가워했다. 춥겠다면서 어깨를 안아준다. ‘오늘은 한번 반대로 걸어봤다, 호수의 오리들이 모여서 잠자고 있는 곳을 발견했다’고 즐겁게 이야기를 했다. 내가 방금 나의 자아를 대면하면서 충격을 받은 것은 꿈에도 모르는채. 남편이 눈치가 없는 게 너무도 고마웠던 순간이었다.

     

    그날 밤의 경험은 병수발을 드는 동안에 내가 내 시간을 갖지 못하면서 당혹해하고 좌절감을 느낀 몇 번 되지 않는 사건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육아의 경험을 되살려 나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게 당연하지’라고 선선히 받아들이고,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려고 한다. 또한 육아의 경험을 되살려 나는 나의 육체적/감정적/정신적 건강을 위해서 나만의 시간을 가져야함을 상기한다. ‘답은 내가 시간을 훔치는 것이다’ 라 마음먹고 내 시간을 잘라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지 않는 시간을 내는 것, 시간을 훔치는 것은 도전이다. 그러나 방법이 없지는 않다.

     

    나는 내내 자투리 시간이 주어질 때 집중하는 능력을 키우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집중력이 있으면 내가 정신줄 놓으면 스르르 사라져버리는 조각난 시간에 뭔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전화기에 그린 첫 그림-자화상 ^^

     

     

     

     

     

    (전화기 그리기 시작한 초기의 그림. 

    부엌 싱크대에 문제가 있어서 연관공이 와서 작업하는 동안 근처에 앉아서 그렸음. 공사 시작 전의 나의 마음과 변화된 마음이 표현되었음.
    그림 그리면서 심리치료 효과를 느꼈음.)

     

    그림 그리기 외에도 나는 하루 일과중 어차피 해야하는 일상적인 행위—목욕, 운동—를 온전히 나만의 시간으로 만끽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시간이란 게 참 요상해서 서두르면 시간의 흐름을 잊게되고 시간이 나를 스쳐 지나가버린다. 반대로 온전히 의식하고 하면 시간을 잡을 수 있다. 시간의 의식 자체만으로도  나의 시간을 훔칠 수 있다는 자각은 나의 일상을 풍부하게 해주고  단시간에 효과적으로 충전이 가능하게 해준다. 예로 선정이가 보내준 초를 켜고 물에 몸을 담고 목욕하는 10 분이란 짧은 시간은 마치 정결의식처럼 나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해준다. 아침에 창문을 열 때, 잠시 밖에 나가 5 분이라도 하늘을 보고 천천히 체조를 하면서 깊이 숨을 들여쉬면서 나의 호흡을 의식하는 순간 그 시간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된다. 아버지가 주무시는 동안 하는 운동도 마찬가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운동을 하면 책임, 걱정거리 다 잊고 나의 숨소리에 집중할 수 있다. 차 마시면서 신문 읽을 때도 그것을 할 수 있는 게 축복임을—그게 사실이니까—상기한다. 조각조각난 시간들도 의식을 하면 그 조각이 크게 느껴졌고, 그 조각들이 모이면 커다란 덩어리의 시간이 된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조각난 시간에 그려진 그림들 일부의 모음

     

     

     

    사소한 행위들을 의식하며 만끽하는 것, 그게 내가 아래층 위층, 부엌, 아버지방, 목욕탕을 통통통통 뛰어다니면서 일을 하는 하루에서 훔쳐내는 귀한 시간들이다. 

     

    "마음이 가난한자에게 복이 있나니..."라는 성경말씀만큼 "시간이 가난한자에게 복이 있나니’란 말도 진리다.  심심할 시간이 없는 것은 힘들기도 하지만 복이 되기도 한다.  시간이 남으니 '영화/나/ 보자' 라는 식의 사고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없으니 영화 '씩이나,' 외식 '씩이나'--다. 뭐든지 덤이다. 뭐든지 선물이다.

     

    사막에서 걸을 때 물 한병이 소중하고, 그 물이 엄청나게 달게 느껴지듯이, 수발로 바쁜 일상에서 조금씩 훔쳐쓰는 나의 시간은 내가 그 소중함을 알고 쓰기에 엄청 달고 소중하다. 그렇게 달게 느낄 수 있는 이 상황이, 조그만 일에 행복해지는 나의 삶이 만족도가 높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나의 시간을 갖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를 잃어가면서 남을 돌보는 것은 자기에게도 남에게도 어리석은 행위이다. 내가 내 시간을 가져야 나도 즐겁게 살고 아버지도 행복하게 산다. 그러므로 내가 내 시간을 갖는 것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다.

     

    나는 앞으로 일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더라도, 균형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나의 시간을 훔칠 것이다. 내 몸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나만의 시간을 끊임없이 욕구할 것이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흐르는 시간과 사랑이라는 따뜻한 마음을 차가운 머리로 경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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