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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주표 책가방과 회상, 엄마의 마음 수련
    스치는 생각 2019. 11. 23. 08:39

    팜펨의 고등학교 시절을 같이 한 '우주표 책가방' 이다. 부모님 집 정리할 때 엄마가 고이 모셔둔 우주표 책가방, 가방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 추억들이 많이 들어있어서 차마 버릴 수 없었다. 태평양 건너 같이 가자꾸나, 우주표 가방아~~

    집에 온 뒤에 차고에 3 년간 처박혀 있어서 먼지가 잔뜩...그런데 애초에 한국에서도 먼지가 잔뜩 앉아 있었던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니, 저 먼지는 국산/미국산 이렸다. 함부로 닦고 싶지도 않다. 이 고물가방에는 먼지가 잘 어울리니까...

    아마 이 가방은 고등학교 3 학년 때 가방일 것이다.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 고등학교 3 학년.  아니 나는 고등학교 3 년의 기억이 별로 없다. 그나마 생각 나는 것이라면 고3 때 '들장미 소녀 캔디' 만화의 열풍 이랄까?.

    친구들이 캔디, 캔디, 캔디! 부르짖을 때 '한갖 만화를 갖고 유치하긴...' 하던 나는 뒤늦게 캔디 만화에 매료되어 버렸다. '들장미 소녀 캔디' 9 권을 속독, 순독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숙독, 정독(점심 시간, 쉬는 시간) 하며 보낸 고 3 여름, 이런 재미를 위해서라면 까짓 예비고사 망쳐도 좋다하며 열심히 읽었다. 

    그 외 학교는 너무 재미가 없었다.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공부 잘하는 애들이 선생님으로부터 받는 긍정적 관심의 레이다에서 완전히 벗어나 별볼일 없는 아이였던 나... 친구들 보는 낙으로 학교에 갔지만 친구들도 그리 고등학교 시절을 즐기는 것같지 않았다. 되려, "이것은 분명 아름다운 고등학교 추억이 될 거야" 라는 식으로 미래 싯점에서 현재를 과거로 그리워할 것을 상상하면서, 그래도 이정도면 아름다운 것이겠니...하고 체념하는 것같았다.. (이건 분명 나의 삐딱한 시선일 따름이다. 학교의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냈고, 그것을 지금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단지, 난 아니었다는 소리.) 당연히 고등학교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

    학교가 정말 재미없고 싫었다. 소위 등교거부증을 겪은 듯한데 그 증상은 고등학교 1 학년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결석을 자주했고, 학교에 가면 배가 아파서 조퇴를 하거나 아니면 꾀병을 부려서 조퇴를 해버렸다.

    나의 짝궁 M은 부반장으로서 출석/결석을 교무실에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었는데, 나때문에 교무실에 자주 가야한다고 짜증냈다. 1 교시 끝난 뒤에 교무실에 가서 출결을 보고하는게 그의 임무. 팜펨이가 결석을 해서 1 교시 후에 교무실 가서 보고를 하고 오면 언제 왔는지 떡~~ 하니 앉아 있다나...그래서 2 교시 끝난 뒤에 교무실에 가서 '결석'을 '지각'이라고 고치고 돌아오면, 3 교시 휴식시간 후--팜펨이의 유일한 낙이었던-- 점심 도시락을 해치워버린 팜펨이가 4 교시 끝난 뒤에 집에 가버리고, M 은 다시 교무실에 가서 '조퇴'라고 보고해야했다. 다른 반은 결석 조퇴도 별로 없는데 팜펨 때문에 결석, 지각, 조퇴 숫자가 전교 일등이라고 툴툴거렸다.  

    우리 학교에서는 결석 일수가 일년에 40 일 이상이면 유급을 했다. 내 기억에 나는 고 1 때 38 일인가, 39 일인가 결석을 하여 간신히 유급을 면했다. 일학년 초 전교 10 등안에 들던 성적이 270 등으로 떨어졌다. 

    당시 나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학교에서 멀리 있는냐였다. 학교 가면 갑자기 위장이 비틀리고 통증이 생기기도 했다. 그래서 '신경성 위궤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요즘 말하는 '등교 거부증' 에 흡사하지만 심리학자들이 꼽는 등교거부증의 원인에 해당하는 것은 없었다. (학습장애, 우울증, 분리장애, 따돌림, 왕따---다 해당되지 않았다) 

    그럼 왜? 공부가 디~~입따 재미 없었다. 내 인생에 도움이 하나 되지 않는 것들이다 싶었고. 내 마음이 삐딱하니 선생님들 중에 분명 훌류한 분들이 있었을텐데, 다 관심이 안갔고, 그저 공부 잘하는 애랑 부잣집 애를 편애하는 선생, 돈밝히는 선생, 못 가르키는 선생....식으로만 보았다. 나는 참 사랑스럽지 않은 아이였고, 사랑스럽지 않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그런 나를 사랑해준 사람이 딱 한 분 계셨으니, 바로 엄마였다.

    엄마는 그대로 받아주었다. 꾀병을 부리면 엄마는 믿었다. 엄마는 학교를 빼먹고 돌아다니다가 집에 와서 '학교에 다녀왔다' 라고 할 때도 그러려니 했다. 학교 가기 싫다고 하면 다 받아주었다.

    "오늘은 날이 너무 더운 것같아. 가고 싶지 않아."

    "그래? 그래라."

    며칠 후.

    "오늘은 비가 와. 학교 가고 싶지 않아."

    "그래? 그래라."

    며칠 후,

    "오늘은 그냥 학교 가고 싶지 않아."

    "그래? 그래라."

    엄마는 내 말을 그대로 믿어주었다. 엄마한테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동시에 내가 착하고 진실한 아이라고 믿고 있는 엄마에게 고마워하는 마음도 깊어졌다. 그러나 엄마를 아무리 사랑해도 나는 학교에 가기 싫은 마음을 이길 수 없었다. 

    어떤 때는 학교에 간다고 나섰지만 사람들이 만원버스에 대롱대롱 매달리면서 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때 나도 대롱대롱 매달려야 학교에 제시간에 가는데---러시아워가 끝난 뒤에야 버스에 올라탔다. 편히 앉아서 태능에서 묵동을 지나 중화동을 지나 중량천을 지나 전농동을 지나 청량리를 지나 제기동을 지나 신설동을 지나~~ (나는 관광객 모드로 창밖을 구경하고 있음)---드디어 나의 학교가 있는 동대문에 도착한다. 나는 내리는 대신에 외면하고 꼿꼿이 내 자리를 지키고, 버스는 오라이~ 하고 떠나 동대문을 떠나 청계천로를 지나 무교동을 지나 서울역을 지나 후암동 종점까지 갔다.

    후암동 종점은 주택가에 정류장 하나가 전부, 사무실이나 버스들이 정차되어 있는 곳은 아니었다. 또한 그 아침 시간에 후암동 주택가에 갈 일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결국 종점에서 내리는 것은 나 한 사람.

    나는 아무 것도 볼 것이 없는 평범한 후암동 주택가를 천천히 걸으면서 --치안 상태를 확인하고...ㅠ 정원이니 담이니 구경하고....---그것이 지루해지면 다시 버스 정류장에가서 45 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서울여대 정류장에서 내려 터덜터덜 골목길을 걸어서 집에 들어가면 엄마는 일찍 돌아오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곤 했다. 엄마한테는 '배가 아팠다' 한마디만 하면 되었다. 엄마는 어서 쉬어라, 고생했다 하면서 나를 따뜻하게 받아주었다. 

    그건 완전히 땡땡이를 까는 경우이고, 학교에 늦게 갔다가 일찍 조퇴하고 나올 때, 교복을 입은채 배회하는 거리에서 느끼는 감상은 또 색다르다. 아침 11시, 낮 2 시, 모든 학생들이 학교에 '갇혀' 있을 때 혼자 길거리를 걷자면 마치 죄수복을 입은 죄수가 탈옥을 하여 길거리를 배회할 때 그러하듯이 남의 눈에 뜨였고, 있어야하는 곳에 있지 않는 사람이 느끼는 불안감이나 스릴이 느껴졌다. 그리 기분 나쁘지 않은 그런 기분이었다. 나의 성공적 탈출, 나의 자유를 확인하는 것이기에...

    유급을 간신히 면하고 2 학년이 된 후, 나의 등교거부증은 서서히 고쳐졌다. 학교를 즐기지는 않았지만 땡땡이를 밥먹듯이 하지는 않았다. 성적은 좀 올랐다. 고 3 때도 어느 정도만 유지하면서 간신히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대학에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께 참 감사하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믿어주어서.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를 그대로 받아준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나도 한 엄마로서 잘 알기에 엄마께 더더욱 감사한 것이다.

    고등학교 때 나는 대단한 반항을 한 것도 아니고, 대단한 고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정의할 수 없는 어떤 혼돈 상황에 있었다. 동기 부여도 되지 않고, 욕구도 없고, 의지도 없고, 그저 '존재하기만 하던' 18 세. 

    그런데 엄마는 어떤 프레임에다 나를 넣지 않았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고, 뚜렷한 의지도 없고, 그냥 배아프다, 학교가기 싫다, 시험 못봤다, 공부하기 싫다...하는 딸을 그냥 그대로 받아주었다. 믿어주었다.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라고 재단하지 않고, 유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를 두고 조바심내지 않고 걱정하지 않았다. (그저 몸이 아플까 걱정하고. 남에게 폐가 되거나 무례한 행동은 꾸중했다.)  그 외에 꾸중을 하신 적이 거의 없었던 것같다. 성적이 200 등 이하로 곤두박질쳐도....

    나의 의식에는 아래 말들이 전무하다.

    '너는 왜 그 모양이니.' 

    '그렇게 나태하면 안된다.'

    '그렇게 하다가 생존 경쟁에서 어떻게 살아 남겠니.'

    '매사에 그래갖고는... 어쩌구...'

    '왜 그리 비관적이고 비판적이니.' (내가 무지 비판적이고 비관적이었을 때도 엄마는 타박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로부터 어떠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말에서 완/전/히 면제되어 살아왔다. 나의 의식은  비판으로 스크랫치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때 생기는 죄의식처럼 평생 남는 마음의 상채기도 없다.

    고등학교 때 나는 분명 방황을 했다. 그러나 반항을 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어찌 반항을 할 수 있겠는가...

    나의 아이들 키우면서 나는 엄마같지 못했던 것같다.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몹쓸 소리를 함부로 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몹쓸 소리를 함부로 하지 않아야한다는 의식이 지배를 해서 나의 의사를 교묘하게 표현한 것이다. (뭔가 좀 아는 엄마는 그렇게 해야한다고 배웠으니까...)  나는 아동 심리, 청소년 심리, 성인 심리, 심리 심리....에 대해 이것저것 줏어들은 게 너무도 많았다. 성공하는 방법, 실패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너무도 많이 알고 있었다. 바른 삶에 대한 동경, 그걸 자식들에게 잘 배워줘야한다는 책임감도 있었다. 고학력에, 많은 여행과 경험으로 다져진 팜펨이라는 엄마는 머리가 너무 컸고 목소리도 너무 컸다.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고상하게 나긋나긋할 때 조차도 그것은 의도한 것이었고, 교육의 한 테크닉을 적절히 구사한 것이었다. 나는 아이들에 관해서는 매사에 너무 '의도적'이었고, 목적 지향적이었다. 

    나는 나의 '똑똑함'을 좀 내려놓아야할 것같다. 줒어들은 여러 이야기들을 잊어야할 것이다. 나의 엄마처럼 대범한 엄마가 되려면...

    비가 온다고 학교 안가겠다 하고, 눈이 온다고 학교 안가겠다고 하고, 날씨가 좋다고 학교에 안 가겠다고 하는 고등학생 딸, 전교 등수가 몇 달 사이에 수백 등 떨어져도, 눈썹 까딱하지 않았던 엄마.

    아무런 분석없이, 아무런 조정 없이,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주었던 엄마의 엄청난 뱃짱을 늦게나마 나도 키워보고 싶다.

    그 무시무시한 사랑으로 아이를 품어주고 싶다. 아이들에게 사랑이 주어이고, 사랑이 동사인 언어로 이야기하고 싶다.

    긍정적인 시선도 아니고, 부정적인 시선은 더더욱 아니고, 그냥 흐믓한 시선으로만 보고 싶다. 아이의 존재를 즐기고만싶다. 진심으로....

    그랬니? 

    그랬구나.

    물론 괜찮지.

    넌 정말 재밌는 아이로구나. 

    아이를 있는 그대로, 흐믓하게 인정하는 사랑, 그 무시무시한 사랑은 나를 대담하게 해줄 것이다. 또한 그 무시무시한 사랑은 아이를 대담하고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엄마 노릇은 더더욱 재미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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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이제 수다는 끝!

    우주표 가방에서 발견한 그림 하나. 팜펨이가 어렸을 때 그린 것임. 

    이 그림을 보니 얼마전 선물 받은 한국 부채가 떠올랐음.

    한복입은 여인도, 한복도, 부채도 다 너무 예쁩니다. 

    자궁에서 놀고 있는 팜페미의 마음도 더덩~~ 둥둥~~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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