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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정 아버지 수발과 벨기에 시어머니
    부모님 이야기 2019. 1. 15. 03:11

    릭과 나는 결혼한 뒤에 최선을 다해 서로의 부모님께 뭐든지 공평히 해왔다. 우리 가족이 한국에 한 해 가면, 그 다음 해는 벨기에로. 친정 부모님이 일년에 한 번 오시면, 시부모님도 오시고. 친정 부모님과 여행을 다녀오면 그 정도 기간과 비용의 여행을 시부모님과 가고. 

    '딸 집'에서 한 달 동안 사위 눈치보지 않고 편히 지내는 친정부모님이나 '아들 집'에서 한 달 동안 며느리 눈치보지 않고 편히 지내는 시부모님이나 다 감사해했다. 특히 시부모님은 떠나실 때 "우리는 너희 집에서 왕과 왕비처럼 살았다. 고맙다" 라고 하실 정도로 우리와 함께 있는 시간을 즐기셨다.

    그러나 2013 년 오빠가 돌아가신 뒤 '공평한 효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 예로, 친정부모님을 모시고 간 하와이 여행.  깊은 슬픔에 빠져있던 부모님이 아름다운 자연 속을 통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으셨으면 좋겠다 싶어서 우리는 하와이 섬들 중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다양성으로 최고로 꼽히는 카우아이 섬을 택했다. 울창한 밀림, 수려한 계곡, 아슬아슬한 절벽, 모래해변, 산호초 등 카우아이는 부모님께 '자연 치료 요법'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비행기표 예약, 호텔 예약, 그 외 여행경비 예산을 짜다가 갑자기 시부모님 생각이 났다. 항상 공평하게 해드리던 습관 때문이다. 평소처럼이라면 공평하게 시부모과도 하와이 여행 정도의 경비와 일정이 소요되는 여행을 해야 할텐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미국 내에서는 하와이같은 곳도 없고 바쁜 고등학생 아이들이 또 다시 열흘이란 시간을 내어 휴가를 갈 수도 없었다.

    영 마음이 불편했다. 시부모님께 공평하게 못 해드리고 내 부모님만 하와이로 모셔서 죄송한 마음이라고 남편에게 말했다. 에릭은 즉시 아니라고 했다. 아주 간단한, 그러나 나름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이 싯점에서 어머니 아버지를 챙기는 게 당연해. 

    우리와의 여행이 한국 부모님께는 '생존'이 걸린 문제야. 

    나의 부모님께는 모든 게 '즐거움'의 차원인 거고. 

    그러니까 우리는 먼저 생존의 위기에 있는 어머니 아버지를 돌봐야해. 

    내 부모님께 미안해할 필요 없어."


    에릭이 그렇게 이야기해주는 게 고맙지만 내 입장에서는 여전히 시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시부모님이 우리처럼 '생존' '즐거움'의 차원에서 생각하실 리 없다. 정기적으로 꼬박꼬박 들어오는 용돈을 받지 못하는 셈인데, 당신들 입장에서는 섭섭한 게 당연했다.

    하와이 여행 다녀온 뒤에도 나는 시부모님께 공평하게 잘해드릴 수 없었다. 시부모님 모시고 여행을 가기는 커녕, 한국 어머니의 건강을 보살피기 위해 시부모님이 와 살림을 봐주는 동안에 한국에 서둘러 다녀와야했다. 브러셀에서  아주 중요한 가족 모임이 있어서 온 가족이 다 모일 때도 나는 친정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느라 못가고 아이들과 남편만 보냈다. 

    2015 년, 친정 아버지가 걷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면서 에릭과 나는 아버지가 걸으실 수 있을 때 기억에 남을 여행을 같이 하기로 결정하고, 어르신들에게 편한 크루즈 여행을 가기로 했다.  시어머니랑 통화를 하면서 우리의 여행 계획을 알렸다. 

    '덴마크에서 시작해서 독일, 핀란드, 스웨덴, 에스토니아,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에 가는 일정이에요' 라고 하며 눈치가 보였다. 어머니는 되려 나에게 '아, 그래! 너의 아버지께는 정말 편한 여행이 되겠구나. 쟈닌 이모도 무릎이 아파서 크루즈 여행을 많이 했어. 아주 편하다고 하더라' 라면서 당신이 여행 가는 것처럼 기뻐해주셨다. 그러나 나는 시부모님이 겉으로는 말씀 안 하셔도 속으로는 (나처럼) '정말 너무 불공평하다. 하와이에 이어서 크루즈라니..' 라고 섭섭해하실 것같았다.

    크루즈 여행 하면서도 시부모님 생각이 많이 났다. 시댁에서 가까운 북유럽 여행이니 더더욱.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이곳 저곳 다니면서도 '이곳을 시아버님이 좋아하실 것같아, 어머님은 이 음식을 맛있어하시겠구나'  식으로 시부모님이 떠올랐다. 여행 마지막 날 밤, 에릭과 단둘이 와인을 마시면서 서로에게 감사를 나누는 시간에 에릭더러 "한국 부모님이 한국으로 돌아가신 뒤에 겨울에 디둠 빠삐를 초대해서 아주 잘 해드리자' 라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크루즈 여행 뒤 미국에 돌아온 뒤 부모님이 한국에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 아버지가 낙상하셨다. 한국 돌아가기 열흘 전에 큰 산사태같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팔 골절 뒤 급격히 온 몸의 건강이 악화되고 우울증까지 걸려버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에릭, 나, 엄마는 총력을 기울여야했다. 부모님은 한국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우리는 집을 개조해 부모님 방을 만들고, 영주권 신청하고, 그 동안 수시로 병원 출입을 하면서 아버지 건강을 지켜야했다. 

    에릭이 2 년 전에 했던 '생존'이냐 '즐거움'이란 개념이 일종의 '비유'였다면 우리는 문자 그대로 아버지가 죽냐 마냐의 차원의 '생존'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시부모님의 여행은 물론이고 우리집에 일년에 한번 오시는 것마저 못하게 되었다.

    시부모님은 '우리 걱정은 말아라. 나중에 가면 된다. 일단은 너의 아버지를 잘 돌봐드려라' 라고 하셨다. 

    그렇게 이해해주셔서 너무도 감사했다. 또한 며느리 가족 사정으로 아들집에 와 머물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시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내색을 안하시지만 부모님도 외로우신 것을 알기에.

    시부모님은 대가족의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집을 들낙거린다. 그러나 조부모가 된 큰아들과 큰딸은 손자 손녀들을 챙기느라 바빠서 시부모님께 자주 오지 못한다. 어렸을 때 손을 타던 손자 손녀들도 이제는 대학생들이라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자주 드나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던 큰 집은 텅 빈 것같이 되어버렸고, 사람들의 방문이 뜸해지면서 하루가 길어졌고, 그 긴 하루에 텅 빈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요리를 해 여러 사람을 먹이는 것이 낙이였던 어머님은 어느새부터인가 점점 간단한 식탁을 차리게 되었고, 아버님과 어머님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미국에 오면 한달 내내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와 한 집에서 복닥거리면서 살고, 함께 시장가고 요리하고 식사하면서 오래 오래 이야기를 나누는 달달한 행복을 누리셨는데 그걸 못하게 된 것이니...

    물론 시부모님은 나에게 섭섭하다 표현하지 않으실 것임은 분명했다. 시부모님은 자식들에게 섭섭함을 느끼지 않기로 작정한 분들같다. 한 예로 내가 바빠서 오랫만에 전화를 드리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너희한테 아무 일이 없구나 하고 안심하고 있었다" 라고 하신다.  

    "한 나라에 살아도 아들, 딸 보는 거는 일 년에 몇 번 안된다. 다들 자기 삶이 있고 바쁘니까. 그런데 에릭이랑 너는 미국에 가까운 가족이 옆에 없이 사니까 얼마나 힘들겠니. 건강히 열심히 살고 우리 걱정하지 말아."

    라고 다독여주신다.

    시어머님이 불평과 비판을 꾹 억누르고 나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하시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오랫동안 시어머니를 봐오면서 시어머니의 인격을 알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는 험담을 하지 않는다. 본인이 믿는 옳고 그름의 잣대가 있지만 남들이 당신 마음에 맞게 해야한다는 그런 잣대가 없다. 그러므로 아들이든, 딸이든, 며느리든, 사위든, 남을 욕할 일이 없다. 그래서 어머니는 절대로 다른 며느리나 사위 험담을 하지 않는다. 언젠가 이모들이 동서에 대해 불평하니까 어머니는 '사람마다 다 사정이 있는 것이다' '자기 원하는대로 살면 되는 거다' 라며 며느리를 보호했다. 그런 모습을 20 년이 넘게 보아와서 나는 내 결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시어머니지만 그 누구보다도 나의 편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나도 시부모님을 진정으로 아낀다.

    그래서 친정 아버지 수발에 전념하는 중에도 계속 시부모님이 마음에 밟혔다. 또한 남편이 자기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줘야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수발 2 년 째 가을, 시부모님을 미국으로 모시기로 했다. 우리집 근처의 아파트를 빌렸다. 

    시부모님이 와 계시는 동안 나는 네번 뵈었다. 수발로 하루 종일, 밤까지 바쁘므로 찾아가뵐 시간이 나지 않아서였다. 에릭은 퇴근 후 부모님집으로 직행, 저녁을 먹고, 밤 10 시 경에 아버지 수발을 돕기 위해서 서둘러왔다. 그러므로 부모님은 한 달 간 며느리는 네번, 저녁 시간에 아들을 3 시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그런데도 다 감사하다, 캘리포니아는 날씨가 좋아서 기분이 내내 좋다, 우리는 너무 잘 쉬고 있으니 걱정말고 네 일을 해라.....하셨다. 시부모님께 많이 잘해드리진 못했지만 나는 오랫만에 부모님을 미국에 모시고 뭔가 '공평하게' 해드릴 수 있어서 기뻤다.

    2018 년도에 들어서 아버지의 몸이 점점 더 쇠약해지셔서 내가 아버지께 쏟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그래서 시부모님을 챙기기는 커녕, 바로 옆에 있는 에릭과 시간을 보내는 게 어려워졌고 표현을 못했지만 미안함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어느날 오랫만에 시어머니랑 통화를 하였다. 무척 지쳐있던 나는 평소에 닫아두고 있던 마음의 빗장이 열려버렸고, 어머니께 갑갑한 내 마음을 토로하고 말았다.

    "어머니, 제가 에릭에게 너무 미안해요. 요즘.."

    "왜?"

    "너무 바빠서요. 에릭이랑 데이트는 상상도 못하고, 이야기할 시간도 없어요. 밤에 들어오면 혼자 밥 먹고, 신문 읽고, 책 읽고 그래요. 전 아버지 방에서 일하느라 바쁘고. 기껏 이야기한다는 게 '에릭, 와서 아버지 옮기는 거 도와줘' 란 말이니... 정말 너무 미안해요."

    나는 입으로는 말을 하면서 속으로 '오랫만에 시어머니랑 통화하면서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싶었다. '시어머니가 남에게 몰래 하는 며느리 욕' 이라고 하면 딱 맞을 이야기를 내가 내 시어머니께 하고 있다니.

    그러나 또 한편, 내가 시어머니께 내 이야기를 주절거리고 있었던 게 그리 유난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평소에도 시어머니랑 이야기를 하면 내 속을 털어놓는다. 어머니의 인격을 알기에 나는 어머니가 '내 아들 고생시키네!' 하면서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거나, 아니면 '우리 에릭이 정말 큰 일 하고 있다. 네가 고마워해야하겠구나' 식으로 공치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어머니로부터 위로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아니, 어떤 반응도 기대하지 않은 채, 그냥 에릭과 나를 잘 아는 사람에게 내 속을 털어놓고 싶었고, 그 사람이 시어머니였던 것이다. 특별한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음에도 어머니의 반응은 나를 놀라게했다.

    "No, no, no! 신주,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 왜 그렇게 생각해?

    에릭이 하는 게 정상이야. 그게 정상이야! (C'est normal, c'est normal!)"


    정상이라? 

    자신이 아들이 장인 수발 드는 게 정상이라고 하는 시어머니의 선언이 내 가슴의 중심을 팍 치는 것같았다. 잠시 혼란스러웠다.

    '진심이신가?'

    진심일 것같았다. 시부모님은 20 년간 본마망 (어머니의 친정 어머니) 수발의 경험이 있다. 본마망은 딸과 사위와 한 집에서 20 년간 살면서 그들의 살뜰한 부양을 받고 100 세에 돌아가셨다. 남편이 장모 부양을 기꺼이한 역사가 있는지라 어머니가 아들이 장인의 수발을 드는 게 '정상'이라고 하시는 건 단지 며느리인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하신 말씀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본마망의 경우 어머니의 '친정 어머니'를 자신의 '남편'이 돌봐준 것이고 기저귀 수발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 경우에는 당신의 '아들'이 장인 수발 드는 건데 그게 정말로 정상일까?

    나는 어머니께 고마우면서도 뭔가 석연치않아서 담박 감사하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그 다음의 한마디가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에릭한테 미안해하지 말아. 그냥 너의 아버지께 집중해. 가족인데 뭐. 에릭이 당연한 일 하는 거야. 그리고 우리한테도 미안해하지 마. 우리는 한 가족이잖아."

    아아..우리는 한 가족.

    자신의 아들은 물론이고 자신들에게 불이익이라 여겨질 수 있는 상황임에도 어머님은 '한가족'이라는 이유로 내가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게끔 설득하셨다.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말에 갑자기 어머니 말씀이 다 이해가 되었다. 나는 진심을 다해 외쳤다

    "아...어머니 고맙습니다! 그러네요.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한 가족이잖아' 라는 어머니의 말은  최근들어 내 마음속에 서서히 쌓아지던 (시부모님과 남편에 대한) '죄의식'의 탑을 간단히, 시원하게 부셔버렸다. 죄의식 대신에 순수한 감사함이 내 마음을 채웠다. 

    나의 친정과 시댁이 한 가족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새롭게, 그리고 그렇게 확실하게 느껴진 것이 결혼한지 23 년만에 처음이었다. 어머니와 통화를 마친 뒤에도 '우리는 한 가족이다' 라는 말이 내 뇌리에 계속 맴돌았다. 부끄럽게도 나는 인정해야했다. 내가 이제까지 내가 갖고 있던 '시댁'과 '친정'이란 구분이 그저 단순한 가족관계를 일컫는 명칭이 아니라, 내 의식 속에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항상 나뉘어져 있어야하는 그런 두 개체였다는 사실을. 

    내가 20 년간 작정하고 실행해온 '공평한 효도'에 대해서도 나는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양가 부모님을 공평하게 대해드리겠다는 원칙은 필요했고, 앞으로도 계속 '공평하게' 양 부모님들을 모실 것이다.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 그런 원칙이 있는 게 없는 것보다 백 배 낫고, 실제로 부모님이 '우리는 한 가족이다' 라고 말씀할 수 있기까지 20 년 동안 꾸준히, 일관성있게 실천해온 공평한 효도의 공로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깨달은 것은 공평한 효도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양가 부모에게 공평하게 잘 해드린다'는 원칙의 근저에는 존재하는 친정 vs 시댁이라는 대립 구조이다. 공평한 효도는 대립 구조에서 일어날 수 있는 화근을 미리 제거하기 위한 적절한 방비책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보자면 23 년간의 결혼 생활 내내 나의 삶에는 시댁/친정이 합해진 하나의 대가족이 아니라 따로따로 돌봐야하는 두 가족이 존재해왔던 것이다. 

    "우리는 한 가족이다" 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현재 상황에서 약간의 불이익을 당하는 시어머니가 한 말씀이라 그 진정성이 울려나는 것같다. 내가 시부모님께 못해드리는 상황에서 '우리가 한 가족이니, 당신 아들이 내 아버지 돌보는 고생하는 걸 이해해주셔야죠! 한 가족인데 이 상황에서 제가 부모님 못 챙겨드리는 거 이해해주셔야죠!' 라고 했다면 한가족의 개념은 오히려 금이 갔을 것이다. 

    시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이 아들임을 고집하는 대신에, '나의 아들'이 '남의 사위' '남의 남편'으로서 봉사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을 선선히 받아들이는 것을 뛰어 넘어, 오히려 그것을 못받아들이고 있던 며느리를 설득하였다. 그래서 내 마음에서 이제까지 두 개로 나눠져 있던 가족이 하나가 된 것이고.

    '친정' '시댁'이란 말은 여전히 가족간의 관계를 정확하게 지칭하는 유용한 언어적 장치이다. 그러나  이제 나에게는 친정도, 시댁도 '한가족'이란 커다란 울타리 안에 편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공존하는, 동시에 따뜻한 정서를 유발하는 그런 행복한 개념이다.

    '우리가 한 가족이다' 라는 말은 그 어느 누구에게든, 그 어떤 상황에서든 가족의 구성원들에게 소속감을 주고 결속을 강화해주리라. 그러나 아버지를 간병하며 하루에도 여러 번 정서적/육체적 고갈을 경험하는 나에게는 더 큰 의미가 있다. 우리는 한가족이라는 끈끈한 공동체 의식이 나를 지원해주기에 나는 더 당당하게, 용감하게 모든 일을 해낼 수가 있다. 

    며느리 가족을 한가족으로 여기고 며느리와 아들의 친정아버지/장인의 수발을 응원해주는 시어머니께 감사드린다.


    (201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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