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추수감사절.

남가주에서 대학 다니는 아들이

북가주에서 대학 다니는 딸이

집으로 왔다.

오랫만에 3 대가 한 식탁에 둘러 앉았다.

땡스기빙은 칠면조 요리를 중심으로 풍성한 식탁이 차려지는, 

우리나라의 추석에 버금가는 큰 휴일.

칠면조 요리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이민자들은

자기네 나라의 전통 음식을 한 상 차려내는데...

우리는 추수감사절에 '요리 안하는 전통'을 고수하는 

팜페미 덕에 

여기저기서 사다 모아 차린 

나름 화려하나 먹을 거 별로 없는 식탁에

온 가족이 둘러 앉았다.


요리를 좋아하고

건강식으로 뭐든 다 집에서 해드시던 엄마는 

(심지어 언니 결혼의 피로연 음식을 차려내신 경력이 있으심)

하루 종일 뺀질거리다가 가게 닫기 전에 쪼르르 나가 음식 꾸러미 사다가 차린

남편과 나를 보면서 경악하시고

한국식으로 생각하면 그게 다 요리 안하는 주부 책임인지라

그런 주부를 딸로 두심에 대해 무척 미안해하시고 불편해하셨다.


식탁의 즐거움은 대화!  라고 믿는 나,

아이들과 밀린 이야기 나누고

부모님의 이야기도 들어드리고

에릭이 좋은 이야기도 좀 해주고...

정말 아름다운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싶..었...으...나....


우리집 식탁의 대화의 고질적 특징,

식구들이 음과 양의 성격으로 나뉘고

취미와 관심이 각기 다른 인간들이 집단이다보니

식탁은 밥 몇 술 뜨기 전에 훈훈한 대화가

격렬한 토론의 장으로 화하곤 한다.


그날도 그랬다.

뭐, 토론....그래, 좋다.

문제는 지구 평화, 지구 온난화, 미국의 인종차별, 성차별...뭐 이런 큼직한 주제를 갖고

똑똑한 이론을 펴면서 서로의 지식의 수평선/지평선을 확 넓혀주는 그런 대화를....하..고...싶...었...으...나,

불행히도 아이들은 '털'갖고 싸웠다.


페미니스트인 딸 아이가 

 '여자라고 왜 겨드랑이 털을 밀어야해?' 라고 했다.

바디빌딩에 관심을 갖고 있는 아들아이는 딸의 논지에 분개하면서

'남자든 여자든 겨드랑이 털을 다 밀어야한다' 고 주장했다.



딸 아이가 보란듯이 자기 겨드랑이 털을 보여주면서 

이거 안 민 거고 앞으로도 안 밀거라고 도발한다.


아들 아이가 "you are disgusting!" 하고 비판하더니만

 자기 웃통을 벗어 재끼면서 나는 겨드랑이 털에 다리 털도 민다고 맞선다.

(맞아...바디 빌더들에겐 털이 없구나....새삼스레 깨달았다)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지...


'털' 이 아름답지 않다는 인식, 성차별, 개인적 취향에 대한 존중.....어쩌구저쩌구하면 토론을 하는데

결국 욧점은 

"난 겨털 기를 거야' (딸아이)

"난 겨털이든 몸털이든 다 밀 거야' (아들아이)의 주장이었고

서로 상대방의 선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들과 딸은 주장이 다를 때 쿨~~ 하게 '그러니?' 하고 받아주는 거를 못한다.

밖에 나가서는 예의바르게 자기 주장을 할지 모르겠으나 

'가족의 목적은 서로 성질부리고 고함지르기 위함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조그만 의견 차도 용납하지 못하고 핏대를 세우면서 싸워댄다.


평소에는 그런갑다 했는데

몇 개월 만에 땡스기빙이라고 다 모인 자리에서 

특히 손자 손녀 왔다고 즐거워하시면서 식탁에 앉아계신 부모님은 아랑곳없이

겨드랑이 털, 다리 털, 가슴 털~~

바락바락, 버럭버럭 

털에 대해 논쟁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가슴이 쓰려왔다.

그렇다고 아이들더러 하고싶은 이야기하지 말고

추수감사절의 행복한 가족처럼 이야기 나누면서 

헐리웃 영화 한편 찍자고 건의할 수도 없었다.

아니, 그렇게 끼어들기에는 두 아이의 토론이 너무도 진지하고 격렬했다.


가엾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두 아이가 온 몸을 바쳐가며 자기의 철학을 번갈아가면서

속사포로 쏟아내는 모습을 

이쪽 저쪽 흥미있게 바라보셨다.


아무래도 무슨 이야기인지 감이 안 잡히셨는지

나에게 물으셨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이 심각한 상황을 어찌 설명할 도리가 없어서 

요약본으로 전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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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아이는 털을 밀자고 하고

둘재 아이는 밀지 말자고 하네요."


다행히 부모님은 이해해주셨다.


"그래? 겨드랑이 털, 그게 중요한 거구나."

아버지는 뭔가 하나 더 배우셨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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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겨드랑이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채

식사가 끝났다.

달달안 디저트를 먹으면서 마음이 녹아서 헤헤 거린다.

부모님은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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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아버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유튜브로 성악가들의 노래를 감상하고 계셨다.

면도를 해드리고 나도 아버지 침대 옆에 서서 같이 

아름다운 드레스에, 머리를 한껏 예쁘게 손질하고

화려한 화장을 한 채 소리 높여 노래부르는 소프라노의 노래를 감상했다.


나같이 심취해서 듣고 있는 줄 알았던 아버지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저 가수는 겨드랑이 털을 밀었구나."


"어머! 아버지!!"


그 손자들에 그 할아버지!!


성장을 하고 드라마틱하게 노래부르는 아름다운 가수에게 죄송했다.

들어달라는 노래는 안 듣고 겨드랑이 털을 찾아보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편,  

90 이 넘은 아버지께

 '겨털' 이라는세상을 보는 인식의 창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또한 손자들과 호흡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나다.

아이들 덕에, 아버지 덕에

그 다음부터 나도 가수들의 겨드랑이를 주의깊게 보게 되었다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