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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쌍한 노인"들과 함께 홀로 걷기
    부모님 이야기 2017. 7. 17. 10:29



    엄마가 넘어지셨다.

    아침 산책 다녀오는 길에.

    휠체어를 탄 아버지 바로 옆에서.


    급히 달려가 엄마를 일으켜 세워드렸다. 

    수선 피우면서 여기저기 살펴보니

    다행히 심하게 다친 곳이 없으셨다.


    "아버지, 엄마 괜찮으시네요!"


    몸이 불편하셔서 나무처럼 꼿꼿한 자세로 앉아 계시는 아버지께 기쁜 소식을 전했다.  


    아버지가 조용히 울고 계셨다.

    엄마 잃은 어린아이가 넋놓고 울듯이,

    그러나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으시며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울고 계셨다.

    손을 위로 올릴 수 없으신지라 눈물을 닦지 못하셔서 얼굴은 눈물 콧물 범벅이었다.



    "아버지, 많이 놀라셨어요? 엄마는 괜찮으셔요."


    얼굴을 닦아드렸다.

    아버지가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참 불쌍한 노인이구나."


    그 말을 마치자마자 또 눈물을 흘리신다.


    참 불쌍한 노인이구나...라는 말이 나의 뇌리에 박혔다.



    '아아, 불쌍해라!'  라는 말이 더 어울릴 상황인데

    엄마를 불쌍한 '노인'이라고 지칭하신 게 흥미로웠다.


    마치 엄마가 불쌍하다는 말과 노인이 불쌍하다는 말이 같이 섞여 있는 듯한 그 문장.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문장은 아버지 스스로의 '불쌍한' 처지에 대한, 노년에 대한 한스러움도 담긴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년은 불쌍하다라는...


    아버지가 1 년 반 전에 넘어지셨던 곳은 엄마가 넘어지신 곳에서 2 미터 거리, 거의 같은 장소였다.

    한번 넘어지신 후, 아버지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죽을 고비를 넘겼고, 한국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이민을 오게 되었으며, 24 시간 남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다. 어르신들에겐 잠깐 실수로 한번 넘어지면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강을 건너거나 힘든 삶을 연장해서 살아야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아버지. 그러므로 '불쌍한 노인'이란 말은 뼈에 사무치는 개인적 경험의 토로이다. 


    세월 앞에서의 무력함, 그게 처량함의 기원이다. 아버지가 넘어지시던 날, 바로 옆에 있었던 엄마는 아버지가 넘어지는 순간 바로 3 미터 거리에 있었지만 지켜줄 수 없었다. 또한 엄마가 넘어지시는 순간, 아버지는 바로 옆에 계셨지만 어쩔 수 없이 넘어지시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같이 살아도 각자의 삶은 혼자의 일이라는 엄연한 진리를 고통스럽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그 상황.


    60 년 회로라는 면류관을 쓰고 칭송받는 부부이지만, 삶의 아이러니는 60 년의 행복의 댓가를 말년에 톡톡히 치루게 된다는 사실. 동시에 늙어가고 약해지면서 그들은 상대방의 늙음을 목격한다. 또한 평생의 벗이었던 배우자의 노화는 동시에 자신의 늙음의 거울이기도 하다. 서로를 아까고, 능력이 안되어도 서로를 지켜주려고 하는 보호본능과 충성심이 눈물겹다. 배우자의 늙은 처지가 가엾고 자신이 스스로의 몸을 가누는 게 어려우니 사랑하는 이가 곤경에 빠졌을 때 도와줄 수 없다. 그도 가엾고 나도 가엾고. 무력한 노년이 처량한 거다.


    삶의 맨 마지막 끝자락의 노년의 불쌍함은 누구나 다 겪어야하는 마지막 성장통인듯하다. 한 인간이 홀로 겪는 고행이다. 개인의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지언정 고통, 외로움, 두려움이 지배하는 '불쌍한' 노년. 그 어느 누구도 한 사람이 경험할 노년의 불쌍함에서 해방시켜줄 수는 없다. 


    내가 아무리 부모님을 잘 모시려고 해도 두 분이 각자 겪어내는 그 실존적 불쌍함은 내가 도와드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나도 부모님이 불쌍해서 마음 아파하는 것이고. 


    그러나 인간이 다른 인간을 보고 가엾다 느끼고, 스스로를 보고 불쌍하다 느끼는 것이 그리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연민은 슬프나 따뜻한 감정이다. 자기에 대한 연민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자신의 무력함을 받아들이면서 허무한 추구나 산란한 욕심에서 해방되기도 한다. 죽음 앞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삶의 의미, 그것은 인생이란 천로역정이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아버지의 눈물을 닦아드리면서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 이것도 삶이 주는 각양의 맛 중의 하나를 맛보시는 것이야. 이렇게 맛 볼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지' 하고 받아들인다. 가끔 부모님을 보면서 가여워서 눈물 흘릴 때도 있지만 어떤 의미로 나는 내가 언젠가 분명히 겪게 될 미지의 노년이라는 세계를 보면서 미래의 나로서 우는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나를 위해 우는 것이든, 남을 위해 우는 것이든, 상관없다. 그저 마음이 따뜻히 녹아 눈물 흘리는 게 차갑게 얼어 있는 것보다 낫네~ 자위하면서 맘 편히 운다. 


    '불쌍한 노인'인 부모님을 모시는 게 나에게는 이제까지 내가 생각지 못했던 세계로 나를 인도해준다. 성경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는데 요즘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같다. '불쌍한' 부모님은 마음이 가난하다. 그 가난한 마음은 축복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 그들은 아주 사소한 것에도 감사해하니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게 아주 쉽다.  옆에서 이야기해드리고, 붙들어드리고, 가려운 데를 긁어주고, 다정히 머리를 쓰다듬어드리고, 눈 마주치고 이야기하고, 가끔은 건강에 안 좋다고 하는 아이스크림도 몇 스푼이라도 드리고, 벼개 바로 놓아드리고, 두꺼운 발톱 잘라드리고....이렇게 간단한 일들이 부모님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감사해하는 사람들과 함께사는 것은 행복이다. 


    수발. 불쌍한 인간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가는 여정에서 내가 잡아줄 수 있는 사람 잡아주고, 나를 잡아주는 사람에게 감사해하고...그러면서 가는 것이려니 한다. 나는 그들과 함께 홀로 걷고 있다. 


    2017.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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