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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엄마의 친정
    부모님 이야기 2016. 6. 9. 02:03

    엄마는 함경도 북청이 고향이다.

    1.4 후퇴 때 조그만 어선을 타고 부산까지 피난을 오신 뒤 

    수많은 고생을 하시면서 정착을 했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시고

    할머니는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돌아가셨다.

    홀로 남은 할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사시던 금호동 산동네의 조그만 집,

    그게 엄마의 친정이었다.

    엄마는 세 아이를 업고, 잡고, 할머니가 안 계시는 친정에 꼭꼭 찾아갔다.


    우리 삼남매가 성장하여 하나씩 결혼했고

     막내인 내가 30 중반에 결혼하여 아이를 나았다.

    나의 친정은 

    서울대 교수의 박봉으로 간신히 아이들 교육 시키고

    연금 대신에 퇴직금으로 엄마 아버지가 마련한 안양의 아파트,

    뒷산에 약수터가 있고, 앞에 재래 시장이 있는,

    나름 시골 기분이 나는 곳이었다.


    유학 시절에 한국을 방문하여 엄마 아버지 집으로 갈 때, 나는 항상 흥분제를 먹은 사람처럼 흥분되었었다.

    언제나 환영해주시는 엄마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게 그리도 좋았다.


    그런데 생후 4 개월 된 첫 아이를 안고 엄마 아버지를 뵈러 갈 때,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항상 느끼던 설레는 감정이었는데 좀 달랐다.

    내가 가는 곳이 '친정'이라는 사실이,

    나에게 '친정'이라는 게 생겼다는 게 신기했다.

    평생 결혼 안 할 것처럼 버티다가 갑자기 결혼한 뒤에 '이게 뭐지?' 하는 기분이 자주 들었었던 것,

    에릭이 나를 '나의 부인'이라고 소개할 때 '뭐라고? 부인?' 하면서 새로운 status에 적응이 안되었던 것과 비슷했다.

    똑같은 부모님 집인데 내가 결혼했기에 순식간에 '친정'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는 게 신기했다.


    아이와 첫 친정 방문 이후, 나는 수년을  친정을 가기 위해 사는 사람처럼 살았다.

    조교 월급에, 사업 시작에, 돈이 쪼들렸으나

    무슨 일이 있어더 한 해에 한번은 친정을 가야했다.

    어떨 때는 두 번도 갔다.

    친정이 그리도 좋았다.

    방에 누웠을 때 천장을 보면, 그 천장의 높이가 가장 완벽한 것같이 보이고 안온함이 느껴졌다.,

    깨끗하고 맨들맨들한 방바닥에 이불을 덮고 누으면

    침대 없이 살던 어렸을 때의 향수가 몰려와 행복했다.

    밥 한 술 한 술이 꿀맛이고

    아이의 재롱에 웃는 웃음이 미국에서와는 달리 가슴부터 터져나오는 것처럼 시원했다.

    아이가 옹알이를 하고, 숫가락을 잡고, 바닥을 기고, 소파를 잡고 일어서고, 쌔엑쌔엑 고른 숨을 쉬면 잠을 자고...

    모든 일상이 친정에서는 더 신나는 일이 되었고,

    아이들을 보면서 박수치고, 웃고, 칭찬하고, 도돌이표를 단 듯 똑같은 감탄을 여러번 하시는 부모님 앞에서

    나는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기라도 한 듯 의기양양했다.


    아이들이 크고,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부모님이 점점 쇠약해지셨다.

    나의 친정 방문은 조금씩 조심스러워졌다.

    집에 들어가 자는 첫날 밤, 웅크리고 자다가 오랫만에 온 몸을 쭉 펴고 자는 듯한 시원함은 여전했으나

    매 해 엄마 아버지가 조금씩 늙어가시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우리가 한국에 가는 것보다 부모님이 미국에 오시는 일이 잦아졌다.

    부모님은 기후가 좋은 캘리포니아에서 휴식을 취하시고 충전하셔서 

    한국에 돌아가셨다.


    그리고나서...

    오빠가 돌아가셨고,

    2 년 후 아버지가 우리집에 와 계실 때 사고가 났다.

    의사가 아버지는 목숨을 걸지 않는 한 여행을 할 수 없다고 하여

    아버지는 한국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아버지의 산소 호흡기 역할을 하는 엄마도 동시에 한국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엄마와 아버지는 고향을 두 번 잃으셨다.

    돌아갈 수 없는 이북,

    돌아갈 수 없는 한국.


    부모님의 마음이 어떠실까....헤아려보던 중,

    갑자기 나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한국은 친정이었다.

    관양동 기슭의 아파트만이 아니라, 한국이 친정이었다.

    엄마 아버지가 계시기에...


    이제 내가 한국에 갈 때,

    나는 부모님이 안 계시는 친정에 들어가는 거구나.

    부모님이 안 계시면 친정이 아닌 거지.


    고향을 잃으셨던 부모님이 이런 기분을 느끼셨을까?

    할머니 없는 금호동 친정을 드나들던 엄마도 이런 기분을 느끼셨을까?


    친정을 잃었다는 상실감..

    이제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부질없는 욕심이랄까 아쉬움이 섞여지 그런 상실감이었다.

    이상하게도 그게...마치...사랑하는 이가 죽은 뒤에 느껴지는 그런 상실감처럼 

    아픈 감정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친정이 살아난다.

    아버지와 엄마와 함께 산 지 1 년이 되어가면서.

    딸 집에 여행간다고 즐거운 마음으로 오셨다가 눌러 앉게 된 부모님과

    두 아이가 대학을 가면 좀 신나게 살아보자~~ 벼르던 에릭과 나는

    새롭게 주어진 상황을 결단하듯이 빨리 받아들였고

    우리는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다.


    지난 1 년간, 우리는 

    그 어떤 경험이든 우리가 피해자나 방관자가 되지 않고 그 경험의 주체가 되어서 

    운명과 협동해서 열심히 살면

    나름 만족할 수 있는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힘든 일이 있더라도 그 힘든 일에 감정적으로 메몰되지 않고

    차가운 마음으로, 빠릇빠릇한 이성의 힘으로 관조하고 분석하면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은

    언젠가 한번 이야기했듯이 

    보물찾기 놀음처럼 흥미로울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북한에서 내려와 

    가난과 병마와 평생 싸워오신 부모님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뿌리채 뽑혀 내동댕이 쳐진 미국이라는 땅에

    가장 피하고 싶으셨던 상황--자식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상황--에

    초인적인 의지로 적응하고 계신다.

     

    엄마 아버지를 마치 엄마가 어린 아이들을 돌보듯이 매사를 돌봐드리면서

    나는 엄마 아버지가 내 옆에 계심을 감사드린다.

    한국이 친정이라는 물리적인, 상징적 공간이었다면,

    그리고 나는 이제 그런 친정을 잃어버렸다지만,

    감사하게도 

    나는 미국, 얼바인, 웃브릿지 호수 근처의 조그만 나의  집 안에 친정을 품고 있다.

    항상 따뜻한 부모님, 

    무슨 일이든 긍정적으로 바라보시고 격려해주시는 부모님이 계시니

    내 집 안에 친정이 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뒤,

    엄마는 친정을 잃어버리셨었다.

    엄마가 먼 길을 마다않고 아이를 잡고 업고 버스를 갈아타면서 방문했던 금호동의 친정집은 

    딸로서의 책임감으로, 남아계시는 아버지에 대한 배려와 사랑으로 찾아간 곳이었다.

    엄마께 위로, 안심, 격려를 주는 그런 친정은 아니었다.

    '엄마~'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친정이 아니었다.


    나는 나에게 친정이 되어버린 나의 집이

    엄마에게도 엄마가 예전에 갖지 못했던 그런 친정이 되기를 소망한다.

    내가 드리는 사랑이 할머니가 주었던 모성애처럼 

    따뜻하고 무조건적이라

    그냥 마음 놓고, 발 쭉 펴고 잘 수 있고,

    소박한 식탁의 밥 한 숫갈 한 숫갈이 꿀맛이고,

    어떤 일도 웃음과 사랑으로 따뜻하게 감싸어지는 

    그런 친정이 되기를 소망한다.



    ----


    이런 생각을 하던 무렵에 갑자기 그리고 싶어서 그린 그림이 있다.

    (전화기 그림)

    왜 친정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평생 한번도 살아보지 못했던 시골을 그렸는지 나도 몰랐다.


     


     몇 달 지나서 이 그림을 들여다보다가

    이걸 어디선가 봤는데...어디서 봤지? 곰곰 생각하다가 퍼뜩 떠올랐다.


    아, 경주!!


    경주의 남산이었다.

    룰루와 랄라와 함께 여행을 갔었던 남산.

    이른 아침 숙소에서 나와 포석정으로 걸어가면서 

    밤새 내린 빗물을 아직 담고 있던 신록의 경치에 감탄을 했었다.

    그 자체가 사랑인 그 경치.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아니 세계 어디에서도 느낄 구 없었던 그럼 감정을 유발하는 그런 경치였다.

    포근함.

    정겨움.

    "아, 나는 역시 뼈 속까지 한국 사람이구나....' 

    혼자 생각했었다.

    내가 만약 한국에서 살 수 있다면 경주에 와서 살고 싶다고 했었다.


    결국 나는 그 때 본 경치를 수 년이 지난 뒤 전화기에 그린 것이다.




    설합 깊게 묻혀져 있던 경주 사진들을 찾아보았다.

    아아, 내가 이걸 기억한 거구나...







    논길을 따라걷다가 마을을 지나서 포석정으로 갔다.


    길가의 무덤도 신기했고,

    그보다 더 신기했던 것은 혼자 다니는 개.

    개가 우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포석정까지 우리를 쫓아왔다.

    아이들은 좋아서 난리도 아니었음.



    난 이걸 보여주러 간 건데...


    아이들은 개를 더 만져주려고 개만 쫓아다녔음..


    룰루의 이 넋나간 표정 보소...


    대단한 유적지 안에서 홀로 다니는 개를 만져줄 수 있었던 것,

    이거이...

    이 엄마의 친정에서만 가능한 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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