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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룽지와 시간
    부모님 이야기 2016. 5. 23. 01:51

     

     

    물에 말은 현미 누룽지 반공기.  

     

    편찮으신 아버지의 밥상은 간단하다.

     

    노을로 물든 하늘을 보며

    뜨기 시작한 현미 누룽지 한 공기,

     

    깜깜한 밤이 되어도 끝날 줄 모른다.

     

    아버지가 망설이는 듯 입을 열어 물에 풀어진 누룽지의 한 술을 입에 넣으시고

    천천히 씹으신다.

     

    무표정한 아버지.

    바로 한 달 전만 해도 아버지는 잘 웃으셨다. 

    다정했다.

     

    넘어지신 뒤 몸을 못쓰시게 된 뒤 아버지는 침묵으로 하루를 보내신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우리에겐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울의 우물 속에 아버지는 빠져 계신다.

     

    삶의 의미와 욕구를 잃으신 아버지께 삼시 세끼가 고통이다.

    그리도 좋아하셨던 김치에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신다.

    맑은 설렁탕에 구역질을 하신다.

    그저 물에 말은 누룽지를 가까스로 받아 드시나

    그것도 고역인 듯, 한 숟갈을 삼키는데 오래 걸린다.

     

    조용한 방에 아버지가 밥 드시는 소리만 들린다.

    마치 스님이 염주를 한 알 두 알 돌리며 기도하듯이

    아버지는 눈을 감고 한 입 두 입 누룽지를 천천히 씹으신다.

     

    나는 걱정한다.

     

    이가 편찮으신가.

    슬프신가.

    왜 못 삼키시지.

    우리를 못 알아보시나.

    어디 아프신가.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이런저런 걱정하다가

    누룽지 한 술 떠서 아버지 입에 넣어드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다른 생각에 빠져버린다.

     

    허덕이며 건너뛰면서 언제 지나간지도 모르면서 놓쳐버렸던 시간, 

    질주하던 시간의 뒷자락을 잡고

    나는 천천히 들여다본다.

     

    그리 길지도, 그리 짧지도 않은 나의 삶을 돌이켜본다.

     

    그래, 너무 바쁘게 살았구나.

    뭐가 그리 중요했지?

     

    돌이켜보니 

    죽어도 좋다면서 차가 달리는 도로에 뛰어들 정도로 절절했던 사랑싸움도,

    이런 일, 저런 일로 뭔가 이뤘다고 떠들썩하니 기뻐했던 일들도,

    분노도, 웃음도, 원망도, 희망도

    또렷한 감정의 색은 사라지고,

    오히려 그 색이 바래서 아름다운, 그리고 조각조각이 함께 해서 잘 어울리는 모자이크같이 느껴진다.

     

    숨 쉴 새도 없이 질주하던 시간이란 녀석은 아버지의 침대에 묶여버렸다.

    이제는 일 초, 이 초, 시간의 움직임이, 그 리듬이 느껴진다.

     

    아버지가 물에 불거진 누룽지를 삼키지 못하고 오래 우물거리시듯이

    나도 오랜만에 누리게 된 이 시간을 붙들고 있다.

     

    어두움이 깊어진다.

     

     

    (December,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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