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위로란?

from 오빠, 안녕! 2014.10.07 03:03

오빠가 돌아가신 뒤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해주었다. 

흔히들 하는 위로들은 "좋은 곳에 있다" "편히 쉬소서" "고통이 없는 저 세상에서 행복하소서" 란 말들이다.

이미 사별을 겪은 분들은 아시는 소리겠지만 실제로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말들이다.

그 말을 하시는 분들도 아무런 위로가 안됨을 알면서도 딱히 어떻게 뭐라 해야할지 모르기에 하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유족에게 위로를 주고, 본인들의 슬픔을 다스리려고 하는 고운 의도를 감사하며 받아들였다.


진정한 위로는 '공감'에서 온다.  '양쪽 다 같이 느끼는 소통'의 공감이란 것은 어떤 경우에서든 참 어려운데 죽음의 애도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많은 분들은 우리를 가엾은 대상으로 보았고 오빠를 가여워했고, 죽음을 안타까워했지만 우리랑 같은 강도의 슬픔을 느끼진 못했다. 그건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당해본 사람만 아는 감정이기때문에 공감하라고 기대할 수 없다. 


공감까지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마음에 울림이 오는 위로는 가능하다. 그런데 그것도 쉽지는 않은 듯했다. 나는 위로를 받는 처지에서 바람직한 위로, 바람직하지 않은 위로의 방법을 알게 되었다.


일단, 절대로 하면 안되는 소리--- 슬프지 말라고 설득하려고 하는 것,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라, 죽은 게 낫지 않냐는 식의 논리는 위로는 커녕 섭섭한 마음마저 불러 일으킨다. 절대로 하지 마시압.


그냥 내버려 두는 게 가장 필요하다. 내버려 두는 것은 유족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을 때나  폭포수 수다를 떨때나, 놀랍게도 '낄낄거리는 웃을 때도 그게 애도의 한 과정이자 형태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주는 거다. '분명 통곡을 하겠지. 그럼 위로해야지' 하고 다부지게 작정하고 갔는데 유족이 (나처럼 검정 아이라인 바른 눈으로 )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말빠르게 수다를 떨 경우,  '아니, 이 사람 보게나, 되게 모질다. 오빠가 돌아가셨는데 울지도 않아?' 라고 판단하지도 말고, '아, 다행이다, 살만한가보다' 라고 안심하지도 말고 인내를 갖고 정상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게끔 말대화의 환경을 조성해준다면 참 좋으리라. 가만히 말을 안하고 있으니까 그걸로 죽음의 대화는 끝났다 싶은지 화두를 현실로 돌려 부동산 이야기, 애들 교육 이야기, 남편과의 갈등을 이야기하면 안된다. 


절대로 하면 안되는 것 또 하나는 절대 죽음을 비교하면 안된다. 위로한답시고 하다가 '당신의 아들이 잘 죽었습니다. 고마워하세요' 라고 될 수 있다.


오빠가 돌아가신 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다.

엄마는 세월호 아이들을 보면서 끔찍해서 울었고, 부모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면서 힘들어했다.

그런데 부모님이 들은 말들이 있다. 위로의 형태인데 위로가 안 되는 소리들..


"세월호 보세요. 얼마나 가엾어요. 꽃같은 어린이들이 갔는데 아드님은 그래도 50 넘게 누리다 가지 않으셨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이건 위로는 커녕 가슴에 장대못을 밖는 소리다. 세월호의 아가들이 끔찍하게, 너무도 안타깝고 아쉽게 세상을 떠난 거 생각하면 그 누구의 마음이 미어지지 않겠느냐만, 자기 아이의 죽음을 세월호의 희생자들의 죽음과 비교해서 "우리 애는 잘 죽었다"고 위로를 받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떠내보내는 것은---죽음의 모습이 어떠했던간에-- 당사자에게는 살을 베어내는 고통이다. 


죽음은 공평하다. 남겨진 사람들에게 슬픔을 준다는 면에서. 유족의 슬픔을 자기 잣대로 정의해서 '이정도 슬퍼하시면 되겠네~~' 하는 것은 무례와 무식의 극치이다. 어떤 경우라도 자기 생각으로 슬픔을 가늠하고 비교해, "당신 아들이 죽은 게 더 낫고, 저 아줌마 딸이 죽은 게 더 슬픈 일이라"고 하면 안된다. 제발.


비슷한 예로 남의 애완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의 아끼는 고양이가 죽어서 주인이 가슴아파할 때 고양이는 사람이 아니니까 덜 슬프리라 생각하거나, 사람도 아닌데 고양이 하나 죽었다고 유난떤다고 비판하지 마시라.  '왜 저러는지 몰라' 라고 비판의식이 들걸랑, 입을 닫아 걸고 절대, 절대 말을 하지 마시길. 죽은 고양이는 '하나의 고양이'가 아니라 '바로 그 고양이'이고, 웬만한 인간은 주지 못하는 순수한 사랑을 주인에게 나눠준 귀한 생명체인 것이다. 슬픔의 정도는  '고양이'이냐 '인간'이냐에 따라 나눠지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도  슬픔의 정도는 '몇살에 죽는가' '어떻게 죽는가' 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다.  돌아가신 분이,  아니면 그 고양이가 유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고, 어떤 기쁨과 행복을 주었느냐에 따라 깊이와 강도에 차이가 나는 것이다. 


잘 이해가 안된다면, 아주 간단하고 안전한 애도의 방법이 있다.

 "입다물고 애도하는 척" 하면 된다. 

그래야 상처가 없다.

위로랍시고 상처를 주는 건 가장 못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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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많은 분들을 통해서 위로를 얻었다. 말로 다 표현못할 정도로 감사하다.  나는 위로를 받으면서 '적절한 위로의 방법'으로 위로를 해준 분들은 이미 본인들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겪어봤기에, 아니면 평소에 죽음과 삶에 대한 통찰을 깊게 하고 살아서인지, 아니면 나와 어머니를 깊이 사랑해서인지, 아니면 타고난 감성이 풍부해서인지, 슬픔을  같이 지는 법을 알고 있었다.


어떨 때 위로를 받았는가.


아무 말 없이 황당한 표정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말로 위로를 하려 하지 않고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모르는 게 위로가 되었다. 황당한 슬픔---그게 바로 내가 처한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무슨 말로 위로가 되겠어요..." 하는 말은 내가 이해를 받는 듯한 기분을 주었다.  


눈물은 가장 큰 위로라는 것도 배웠다. 내가 펑펑 울 때 그냥 같이 있으면서 내가 맘편히 울게 해준 분들. 내가 우는데 나보다 더 눈물이 콸콸 쏫아진 분들. 오빠 빈소 앞에서 세상이 떠나가게 울었던 오빠 친구. 그리고 가끔은 너무 황당해서 눈물이 나오지도 않을 때, 정말 한여름 사막처럼 바짝 말라있는 나를 상관치 내 앞에서 혼자 우는 사람들---은 나에게 포근한 위로를 주었다. (나는 평소에 눈물이 좀 헤픈데, 앞으로도 남이 슬프면 내가 울고 싶은대로 울리라 마음 먹었다.)


또한 나에게 아무 말도 안했고, 울지도 않았는데...그냥 같이 있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된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그들이 겪어냈던 삶의 스토리를 알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이미 나를 안다는 공감대가 느껴졌다.  그리고 되려 내가 그들의 고통을 모르고 산 게 미안했다. 


우리 가족이 우리만의 고통에 허덕이고 있지만 한가지 확실히 배운 게 있다. 오빠의 죽음을 통해서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되거나, 이미 좋은 분들이 얼마나 귀한지를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저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게 마음을 안정시켜줬다. 말을 할 필요가 없이 그냥 나도 모르던 내가 해야할 일들을 알아서 처리해주거나 도움을 준 분들.  유품 정리할 때 기사를 대동하고 나타나 짐을 부쳐주고 날라준 친구, 오빠 홈페이지 정리해준 친구, 한국의 장례나 재산 정리에 관해 상세히 설명해주고 언제든지 도움을 청할 수 있게 해준 분, 엄마께 책을 보내주거나 목걸이를 보내준 친구, 내가 연락을 안했는데 그냥 나타난 친구들.....그들은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아직도 그것에 대해 정확히 감사 인사도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들은 위로는 '말'로가 아니라 '침묵'으로, '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음을 배워준 은인들이다.


위로는 돌아가신 분의 죽음을 논할 때 오는 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물어보지 않는 게 위로가 된다. 나는 나의 경험으로도 아주 힘들었던 조문객들이 당연히 갖는 궁금한 사실---"어떻게 가셨는지요?" "저런...왜 그러셨나요"--에 응대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해야할 일이지만 그 때마다 참 힘들었다. 내가 털어놓고 싶은 사람들이 있고 친구들에게는 묻지 않아도 자세히 이야기했지만, 처음 보는 오빠 지인들에게 상세히 기자 회견하듯이 이야기하는 게 참 힘들었다. 오빠의 죽음을 어떤 식으로든 정의하면서 슬퍼할 때 어느새  내가 그들을 위로하는 상황이 되곤 했기 때문이다.  오빠의 삶이 덧없다, 삶이란 허무하다, 부모님 너무 가엾다, 그런 불효를 하다니....등등 무수한 이야기에 나는 가끔 의문점이 들었다. 죽음에 말이 너무 많이 필요없는데....


떠나는 사람은 말이 없다. 산 사람도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사랑의 기억을 많이 되살리는 게 가장 아름다운 애도이고 위로이다.

유족에게 진정한 위로를 주고 싶다면 유족이 원하는 방식대로 고인을 기릴 권리를 존중해줘야한다.


아까 말했듯이 죽음은 공평하다. 내 오빠나, 친구의 고양이나 세월호 어린이들이나 그들은 떠나면서 그들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커다란 상실감과 슬픔을 준다. 떠난 이들에게 (사바나까지 포함!) 가장 아름다운 애도는 덧없는 세상을 떠난 것을 불쌍해하고 가엾어하기 보다는 그들과의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리고 기리는 게 아닌가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떠난 사람들의 삶은 의미가 있다. 


애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죽음은, 그리고 죽음 이전의 삶은 이미 아름다운 의미가 있다. 그 누군가의 삶이 존재할 가치가 있었던 삶이었음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애도에서 드러난다.  어떤 식으로 살았던, 어떤 식으로 마무리지어졌던, 그것이 마무리지어지는 게 아쉬웠다는 것은 그의 생명의 존귀함을 죽음으로 역설적으로 증명해준다. 그런 문맥에서 아주 아쉬운 죽음--- 열살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난 소아암 환자, 어린 아이들을 두고 죽음을 맞이한 젊은 부모, 80 의 부모를 두고 세상을 떠난 아들, 보같고 냉정한 어른들때문에 목숨을 잃은 수학여행 학생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잘 살아진 삶이었다. 사랑하는 가족이 슬퍼하고, 친구들이 아쉬워하고, 동료들이 애도하는 오빠의 삶도 잘 산 삶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죽음은 슬퍼하는 이가 없는 죽음이다. 차가운 방에서 혼자 목숨을 끊은 할아버지, 아들에게 죽음을 당한 어머니, 경제고를 이기지 못해 목숨을 끊은 세 모녀, 게임하는 부모에 의해 버려져 굶어 죽은 아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 내려버린 젊은 여성....이 커다란 세상에서, 그렇게 많은 기회가 있다고 하는 이 세상에서, 지치도록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이 세상에서 혼자 죽음을 택해야했거나, 아니면 죽음으로 버려진 이웃들이다. 다 태어날 가치가 있었고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었고 행복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인데. 


내가 모르는 그들의 생각이 자주 스치고 지나간다. 슬퍼하는 이 없이 죽은 사람들이 너무 가엾다. 

생면부지의 그들을 생각하면서 애도한다. 

마치 내가 슬퍼하는 게 거품처럼 사라진 그들의 삶에 조그만 의미라도 더할 수 있을까....


내가 내가 힘들 때 은인들로 받은 위로의 힘으로 나는 다른 이들을 이제 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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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세어라 춘산이~~! 

'춘산이의 남자'와 춘산이의 딸, 

같이 예배드리고 아름다운 석양을 마주하고 사진 찍음 




춘산이의 손자, 룰루. 

'춘산이의 남자'와 해변의 산책.

학교, 친구, 게임 등에 관해 심오한 대화를 나눴다고하심.



춘산씨, 오늘도 건강한 하루 살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