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언니의 남동생은 빈소에서 조문객들의 인사를 받았고, 나는 식당에서 조문객들께 인사 올리고 감사드리는 일을 맡아 처음 만나는 조문객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조문객들은 전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의 쇼크 상태였기 때문에 눈물을 닦으면서 나에게 설명을 구했고, 나는 차근차근 요약해서 설명을 했다. 오빠를 아끼고 가슴아파하는 분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는 순간은 진정한 위로가 왔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100 퍼센트 선의로 하는 말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약간 상처를 받기도 했다. 오빠를 생각해서 하는 소리인 것은 알겠는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이라던가, 아니면 본인이 생각대로만 우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참 난감했다. 이럴 때는 이래야하고, 저럴 때는 저래야하는데. 의 잣대로 오빠의 삶을 논하고, 똑같은 잣대로 장례나 매장을 (그냥 다들 하는대로) 해야한다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빈소의 대화의 예. 오빠와 잘 알지만 개인사를 잘 모르는 분과의 대화:

 

"아니...지금 저 빈소에서 상주 자리에서 인사하는 분이 누구신가요?  남동생?"

 

(처남입니다)

 

"허...그렇구만. 근데 강이사는 자녀가 없어서... 부모님은 돌아가셨나?"

 

(네 자녀는 없고, 부모님은 계십니다)

 

"저런...저런....부모님은 어떻게 하시나...정말 살기 힘드실텐데....

아니, 이런 일 있은 다음에 정말 금방 가시고 그러더라고."

 

(.....)

 

"근데 자녀가 없으니 위폐 누가 드냐... 조카 없어요?"

 

(직계 조카들은 미국에 있어요. 장례식 때 못와서...)

 

"그럼, 위폐를 들 사람이 없는 거네? 그걸 누가 들지? 참..."

 

위폐가 무엇인지, 왜 꼭 있어야하는지 모르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오빠가 떠난 뒤에 남은 부모님과 걱정해주는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오빠가 선택해서 편하게 살아온 삶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세상의 잣대// 재어져서 그런 게 아니었나 싶다.

 

세상의 참견 간섭을 당해본 사람은 아는 상황이다. 나만해도 결혼 생각없이 살고 있는데 내가 동의하지 않는 잣대로 나를 재어 너의 삶은 뭔가 문제가 있다고 외치던 사회의 기억이 있다.  결혼해서 산다면 누가 뭐라 하겠나만, 눈에는 결혼해서 사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고 그런 결혼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한 사람들은 노처녀에게는 그래도결혼을 해봐야 성장하지’ ‘애는 낳아봐야….’ 라는, 진짜 갖고 싶지 않은 류의 성장을 자랑하면서 남편 없이 사는 사람은 왜 불쌍하고 모자란 건지 부득부득 가르쳐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괜찮다고 해도 안 믿고 우기는데야 어쩌리오...그냥 뒤집어 쓰고 살면서 억울했었다.


오빠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오빠는 자녀 없는 아쉬워하지 않고 즐기고 살았고, 56 세라는 나이는 환갑이 넘어서야드는 생각-- ‘든든한 자식이 있다면 좋겠다’--- 나이는 아니었다. 그러면 오빠의 모습에 맞춰서 고인의 존엄성을 최대한 지키는 방식으로 맞춰주면 좋겠건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 없는 불효?

 

오빠와 새언니에게 자녀가 없는지 나는 이유를 모른다.  오빠 부부에게 자식을 갖지 않는지 물어보았다.  관심이 없어서도 아니고, 약점이 있어서 쉬쉬하는 것도 아니고, 둘이 행복하게 사는데 아이가 없다면 무슨 자기들만의 이유가 있을테고, 그들이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가족이라고 프라이버시를 침범할 이유는 없다고 봤다.  나라면 내가 결정에 대해 내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데 꼬치꼬치 캐물으면 싫을 거같았다. 그러니까 오빠네도 그렇게 존중한 거다. 그래서 그냥 강신열 부부는 아이 없이 행복하게 사는 부부 편히 받아들였고, 그들은 25 년을 살았다.  


내가 알기로 오빠는 자식이 없어서 안타까워한 적이 없다. 오빠는 옛날부터 어린 아이들과 노는 것은 좋지만 애들을 키우는 것은 싫다고 했다. 그래서 오빠는 친구들의 자녀들과 많이 친했다. 커플끼리 놀러가면 오빠가 항상 친구들의 자녀들을 담당해서 즐겁게 놀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오빠의 대학 동창의 부인 한분은 나더러 자신의 아이와 잘 놀아주어 '친구랑 잘 사귀는 능력'을 키워준 게 감사하다고 했다. 장례식장에 또 한 친구분의 성년이 된 따님이 와서 눈물을 흘렸던 이유도 바로 오빠가 어려서부터 여행도 같이 가고 잘 놀아줬던 기억이 있어서였다고 들었다. 


분명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말을 해서 불편할  있었을 것이고중년의 부부들 대화의 주제인 자녀이야기에서 소외되었을 것이나오빠나 새언니나 한번도 그것에 대해 불쾌해하거나 화를  적이 없다.  내가 옛날에 독신녀로서 차별이나 푸대접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화를 냈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설움이란  없이 그저 편안했다물론 우리집에서 모두 편하게 받아들여서 몰랐던 것이고 오빠가 사회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내가 몰라서 하는 소리일 수는 있지만

 

오빠와 새언니에게 자녀가 없음에 무심하다시피 지나간 건 나만이 아니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나야 시누이니까 담담하게 넘어갔지만, 부모님은 입장이 다를 수있다. 더군다나 오빠가 외아들이자 맏아들이므로 부모님이 손주 욕심이 없었을리없다.  그러나 부모님은 오빠와 새언니가 아기를 안 가지는 것에 대해 아무 말씀을 안하셨다. 자기들이 알아서 하는 결정인데, 원하면 우리에게 이야기하겠지 우리가 괜히 물어볼 이유는 없다고 하셨다. 오히려 주위에서 말들을 했지만 부모님은 항상 자신들의 인생, 부모인 우리는 존중한다로 대변했다.


우리 삼형제에겐 부모님의 그러한 태도가 그리 놀라운 건 아니였다.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엄마 아버지는 내가 결혼 적령기인 26 세에 이스라엘 간다고 사람들이 말을 많이 했을 때, 30 이 넘어서 계속 공부만 하니 결혼 적령기를 놓쳤다고들 할 때 자기 인생을 자기가 가는데 우리는 좋습니다 라고 막아주셨다.  앞서 말했듯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결혼식을 계획했을 때도 다 오케이 오케이~~장려만 해주셨다. 사람들이 뭐라고 할텐데왜 이리 유난스럽게 사냐? 는 식의 이야기는 단//// 없었다.


그런데 오빠가 결혼하신지 10 년이 지나서---오빠에게 이상 자식이 없을 거라는 확실해졌을 무렵에---나야 괜찮지만 부모님이 나몰래 혹시라도 마음 고생하시는 아닌가 싶었다엄마께 여쭸다.

 

엄마, 진짜 손주 욕심 없어? 오빠한테 물어보고 싶지 않아? 새언니한테도 은근히 물어보고 싶은 참으시는 아니야?”

 

엄마는 담담히 대답했다.

 

자기들이 나에게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라면 모르지만 내가 굳이 물어봐?  신혼 초에 잠깐 아기가 언제 생길 건가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얘들에게는 얘들만의 사연이 있겠지했어. 자기들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내가 뭐때문에 애들한테 부담가게 물어보겠어. 그냥 신앙생활 하고 자기들이 행복하면 되는 거야. 이런 일로 사랑하는 아들에게 스트레스를 줄 필요는 없지.

 

아버지께도 여쭸었다.  오빠가 자식이 없으므로 한국식으로 생각하면 대가 끊기는건데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아버지는 펄쩍 뛰셨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냐고. 애초에 대를 잇는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고. 자손의 번성도 복이지만, 자기 삶을 하나님 앞에서 깨끗이 살고 가는 것도 복이라시며 아버지는 오빠의 삶을 존중한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되려 내가 잘못생각하는 것을 고쳐주기라도 하시려는 ,

 

신주야,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그건 인간의 생각이야. 우리는 그냥 경건하게 하나님 뜻대로 살다가 하나님 나라로 가는 거야.”

 

하셨다. 

 

(! 아버지, 나도 아버지랑 동의해요. 혹시나 아버지랑 엄마가 몰래 슬퍼하시면 내가 그걸 깨드릴려고 소리지!!~~)

 

오빠는 자녀가 없는 것이 마치 '부모에 대한 효도'의 기회인양 정성으로 부모님을 챙겼다. 부모님과 오빠, 새언니가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 '책임감' 이상의 따뜻함과 즐거움이 있었다. 우리들이 애들을 놀이공원에 데리고 가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면 오빠는 엄마 아버지랑 경치 좋은 곳, 맛있는 식당으로 모시고 가는 게 낙이었다. 오빠 덕에 엄마 아버는 여행을 참 많이 하셨고, 엄마 아버지를 그렇게 잘 챙겨주는 오빠가 있어서 나도 참 든든했다. 


그런데 오빠가 떠나셨고, 나는 갑자기 내가 오빠를 보호해줘야하는 상황이 되었음을, 아니, 엄마 아버지도 오빠를 보호해줘야하는 상황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자식 없는 것은 물론이고, 부모보다 먼저 간 불효자라는 불명예로부터....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그 불명예스러운 타이틀...


 


먼저 죽은 자식은 불효다?



아이가 없었으니 불효인데 먼저 가는 불효를 범했네…”

"에고...어쩌다가 부모보다 먼저가는 불효를.....” 

이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부모보다 먼저 떠난 자식이 불효라는 사고,

또한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살아 있는 부모가 죄인이라는 사고,

 두가지 사고는 많은 이들에게 아침에는 해가 뜨고 저녁에는 해가 진다는 사실처럼 아주 단단하고 확고한 진리인 듯했다.


결국 죽은자도 죄인살아있는 자도 죄인, 다 죄인이다.

죽음이란  아주 단순하게  인간의  세상에서의 종말을 의미하건만,

혼자가는 죽음의 길에 이렇게 저렇게 엉켜붙여놓으니

 사람이 죽으면 여러 사람이 줄줄이사탕처럼 따라죽거나아니면 살아 남은자들도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망가져버리는  아닐까?

  

오빠의 삶이 아깝고, 연로하신 부모님이 가여운 건 사실이고 그래서 하는 소리인줄은 알지만, 나는 오빠와 불효라는 단어가 같이 놓는 것 자체가 너무도 부당하게 느껴졌고 마음이 너무 너무 아팠다. 오빠를 너무 몰라서 하는 소리었다.


오빠는 강하면서 부드럽고, 한없이 섬세하면서 다혈질 성격의 소유자였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공정한 사람이다. (60년대와 70 년대에 성장한 사람으로서 남성우월주의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고, 맏아들/외아들이라고 '장자의 권리'를 농담삼아 운운한 적도 한번도 없었다. 내 오빠니까 그걸 당연히 여기고 살다가 집 떠나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 경험을 해보고서야 오빠같은 사람이 드물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빠는 왜 한번도 '내가 맏아들인데...' '내가 유학 가야지...' '내가 장자라서...' 라는 생각을 안 했지? 참 고마운 일이다. 나에게도 그렇게 어질고 공정한 사람이니 부모님께는 오죽했겠는가. 오빠는 어려서부터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존대말을 썼고, 자라면서도 부모님께 항상 예의바르게 행동했다. 나와 달리 오빠는 딱히 문제를 일으키는 적이 없었다. 자기가 힘든 일이 있어도 혼자 해결하고 부모님을 마음 고생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믿음직한 배려의 아들이었다. 오빠가 돌아가신 뒤에 전화기와 사진 파일에는 부모님을 생각하는 오빠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런 아들을 잃었으니 부모님의 상실이 얼마나 클까...나도 한 엄마로서 그런 게 참 가엾다.)  


그런데 오빠가 불효란다...

불효라는 단어와 절대 결부될 수 없는 오빠가..


장례식장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왔었는데 그들 중에도 '일찍 죽는 것이 불효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기독교인들도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게 불효라는 소리를 절대 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효와 불효는 부모에 대한 자식의 의/도/적 행위를 일컷는다.  자식이 성공하여 건강히 잘산다고 효인가? 아니다.  잘살면서 부모를 잘 돌봐야 효이다. 살아서 부모를 깊이 사랑하고 매사에 세심한 신경을 쓰며 부모를 공경한 오빠는 효자였다. 그가 부모를 떠나고 싶어서 떠났나? 아니다. 그가 죽고 싶어서 죽었나? 아니다.  오빠의 죽음이 의도적 선택이었나? 아니다. 그런데 불효라는 것은 말이 안되었다. 물론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 오빠가 대단한 불효자라고 해서 하는 소리가 아님은 알지만, 그렇다고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한 게 아니라 그냥 관습적으로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임을 알기에 그런 말을 들으면 조심스럽게 내 뜻을 표현했다.

 

“오빠가 부모님보다 먼저 가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니 불효는 아니지요....”


사랑하는 아들이 그립고, 그의 자취가 사라진 게 가슴아픈 상태에서, 세상 사람들이 생각없이 하는 생각-- 부모보다 먼저간 아들이 불효라는 사고은 애도의 과정을 더 힘들게 만들어버렸다. 아마 부모님은 살아 계시는 한 그 사고와 싸워야할 것이다.  


전해져 내려오는 사고를 question하지 않고 그냥 무조건....하고 믿는 사고방식은 장례 절차에도 영향을 미쳤다. 

"왜 그래야하는 거야?' 하고 물을 때 명확한, 객관성있는 대답이 없이 '그냥, 그렇게 하는 거야' 라고 하거나 아니면 그 이유가 아무런 논리성이 없을 때도 있었다. 독립적으로 사고하여 관습과 고루한 문화를 버텨읽는 것은 투쟁해서 쟁취해야할  권리, 자유이자 (오빠와 부모님을 위해서 대신 결정을 해야했던 나의 경우에는) 신중하게 행사해야할 책임이었다. 내가 '이것만은 물러설 수 없다'고 버틴 적이 두 번 있었다.  책임/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했던 상황이었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