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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쾌한 유품정리
    부모님 이야기 2018. 12. 3. 20:07

    아버지가 떠나신 뒤 한 달이 지났다. 마음이 평안하다. 아직 장례식을 치루지 않았다. 12 월 중순에 온 식구가 다 모여 예배를 드릴 예정이다. 

    장례식을 미룬 것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아이들이 (우리 애들, 조카들) 다 모일 수 있는 날짜를 잡기 위해서였는데 우리에겐 너무도 큰 도움이 되었다. 장례식의 절차에 급급하는 대신, 그리고 사망 후 사흘 후에 억지로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는 대신,  엄마, 언니, 에릭, 나는 며칠 동안 그냥 아버지 생각하고 마음이 가는대로 따라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옛날의 일들,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 죽음의 순간 등등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바다에도 두 번 가고, 좋은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서 며칠간 그저 아버지 생각만 했다. 아버지의 몸은 우리를 떠났지만 아버지는 온전히 우리 마음에 자리했다. 

    처가 나자마자 응급처치를 재빨리 하면 큰 상처로 번지는 것을 막아주듯이 아버지 죽음 직후 우리 마음대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아버지를 기린 것이 무기한 고통스러울 수 있었던 애도의 과정을 줄여 준 것같다

    엄마, 언니, 나 모두가 아버지랑 아주 친했고 그래서 아버지가 합리적이신 분이고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그래서 셋이 한마음이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만약 우리 셋 중의 하나가 '이러면 안된다, 장례식은 당장 꼭 해야한다.' 라고 주장했다면 그것도 참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장례식 없이 식당가고 해변가고 하면서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일을 하는 거라는 확신과 기쁨이 있었다. 남아있는 식구들 간의 완전한 소통은 정말로 감사한 일이다.

    또 하나, 애도의 과정을 쉽게 해주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유품정리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다 끝나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시신이 옮겨진 뒤에 남아 있는 것은 기저귀, 담요, 몇 점 안되는 옷과 신발들, 잘 포장해서  (1 시간밖에 안 걸렸다) 친구가 일하는 양로원에 기부하였다. 

    아버지의 유품정리가 그렇게 간단했던 것은 돌아가시기 전에 '짐정리'가 되어 있어서였다.  아버지가 '짐정리'를 하시고 돌아가셔서, '유품정리'가 필요없게 된 것이 본인도 축복이고 남아있는 우리에게도 큰 축복이었다. 



    유품정리의 고통

    유품을 정리하는 것이 감정적으로 얼마나 소모적인지를 나는 경험을 통해서 배웠다옛날에 이스라엘 어머니 오프라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유대교에서는 종교인들이 시신을 관리하기에 사망하자마자 유해를 종교인들이 인수해가는데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돌아가셨고 장기 기증을 했다. 오프라 가족은 할아버지 아파트에서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시신도, 관도, 사진도, 꽃도 없는 빈소는 침착하고 우아한 분위기 그 자체였다. 조문객들은 차와 다과와 함께 조용히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조문객들이 다 돌아가고 밤 늦은 시간 오프라가 유품정리를 시작했다. 갑자기 방에서 살이 칼로 베인듯한 그런 비명에 통곡소리가 들렸다. 달려가보니 오프라가 조그만 나무 박스를 들고 선 채 울고 있었다. 능력과 연륜이 있는 심리학자에게도 자기 아버지의 유품정리는 힘든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혼자 사시던 분인데도 짐이 많았다. 그 짐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과정은 고통이었다.

    2013 년, 나는 오빠의 유품정리를 하면서 힘든 과정을 겪었다. 그때 썼던 글을 잠시 인용해본다.

    빠의 이름만 들어도 쓰러져서 우는 새언니가 유품정리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하기로 했다. 그러면 언니가 감정을 추스리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었다. 

    오빠의 방에 들어갔다. 옷, 컴퓨터, 스테레오, 책과 공책, 필기용구--모든 게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두 달 전만해도 주인이 있어서 유용했겠으나 이제 아무 쓸모 없이 그저 오빠의 죽음만 상기시키는 그 물건들을 없애는 게 나의 일이다. 큰 숨을 들이키고 일을 시작했다. 

    오빠가 얼마나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유품정리를 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정리되어 있었다. 옷들은 계절별로, 색깔별로 정리되어 있었고, 책상의 서류들도 잘 분류되어 있었다. 나는 거의 내 키에 맞먹는 대량 쓰레기 봉지에 분류된 물건들을 넣기 시작했다. 옷, 신발, 책, 공책,....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오빠가 돌아가신 거라고''오빠가 이 옷을 입으셨을 때 모습은 어땠을까?' '이건 정말 오빠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네' '이 음악을 좋아하셨구나'....식으로 매 물건을 만질 때마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여러 생각들이 나를 아프게 했다. 며칠 내로 미국에 돌아가야하므로 시간이 빠듯하다는 게 축복이었다. 그날 밤 안으로 끝내야할 일이라서 나는 감정을 통제하면서 로보트처럼 일했다. 

    나는 정리 중 몇 차례 선 채로 눈물 흘렸다. 의사의 처방전과 약 영수증, 오빠의 건강기록부, 약봉지, 약병들때문이었다. 오빠의 방 안에서만 발견되었지 아파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약봉지들과 약병들을 통해 나는 오빠가 어떤 병을 언제부터 앓았는지, 그리고 오빠가 얼마나 처절하게 혼자 병과 싸웠는지를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더 근심에서 보호하고, 병에 관해서 전혀 모르고 있던 노령의 부모님을 충격과 근심에서충격에서 보호하려고 오빠는 방문을 닫고 이 방에 혼자 앉아서 투약하고, 약을 먹고, 그리고 두려움과 걱정으로 헝클어진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약병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침묵으로서 끝까지 부모를 지키려고했던 맏아들의 책임감과 외로움이 느껴져서 괴로웠다.

    내가 오빠의 유품정리를 하려고 한 이유 중의 하나는 오빠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고 싶은 것도 있었다. 오빠에게 남이 모르는 그런 비밀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내가 치워드리리라. 그 무엇이라도 나는 감당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서프라이즈는 없었다. 전화와 컴퓨터 조차도 놀랄만한 내용이나 이상한 웹사이트나--아무 것도 없었다. 오빠는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살아있을 때 알던 오빠나 돌아가신 뒤에 발견한 오빠나, 다 똑같은, 깨끗한 사람이었다. 

    오빠의 짐이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5 시간 정도 후에 모든 일이 끝났다. 자정께 쓰레기 봉지들이 줄지어 현관 앞에 세워졌다. 봉지들이 너무 무거워 질질 끌어 엘리베이터로 가져갔다. 하나 갖다 놓고 또 하나 가져와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한 봉지 끌어내고, 또 하나 끌어내고.. 질질 끌어서 재활용품 장소에 갖다 놓고...그걸 반복했다. 안해본 육체적 노동이었다. 숨이 찰 정도로 힘이 들었다. 몇 번째로 내려갔을 때였던가? 잠시 숨을 돌리려고 허리를 편 순간 나는 멈칫했다. 주차장에 빽빽하게 줄지어 있는 자동차들. 경비인도 없고 아무도 없는 주차장에서 쓰레기 봉지를 지그재그로 낑낑 거리며 끌고 있는 내 모습을 그 차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자동차들이 마치 어린이 만화 영화에서 말하는 자동차들처럼 살아서 나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관찰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갑자기 나를 둘러싸고 뚫어지고 바라보고 있는 차들이 두려워져서 내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흥얼흥얼 노래를 했다. (누군가 그때 나를 봤다면 주차장에서 노래부르는 귀신이라 기겁했을지도 모른다.) 

    1 년 후, 미국에서 에릭과 백화점에 갔을 때이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무심코 문을 열고 나온 순간 나는 굳어버렸다. 오빠 유품정리하던 날의 주차장과 너무도 흡사한 정경이 나 앞에 나타나서였다. 빽빽히 줄지어 서 있는 차들, 유리로 된 입구, 엘리베이터. 오빠의 유품을 끙끙거리면서 끌던 나를 조용히 지켜보던 차들처럼 백화점 주차장의 차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같았다. 죽음의 기억, 상실의 기억이 나를 후려쳤다. 나는 1 년 전에 내가 쉽게 하지 않았던, 할 수 없었던 것을 했다.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유품정리 대신에 짐정리를

    부모님이 애초에 유품정리가 되기 전에 짐정리를 하자고 하신 것은 아니었다. 두분 모두 기억과 세월이 스며있는 물건들을 정리하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빠, 언니, 나, 모두 부모님의 집에 갈 때마다 점점 노쇠해지는 두 분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엄청난 양의 물건들을 보면서 착잡해지곤 했다.  버리기 아까운 물건들은 하나도 없이, 그저 버리지 못해서 쌓여있는 물건들, 짐들..옷들... 오빠나 언니는 부모님께 예의를 갖춰 행동하는 착한 아이들이니까 아무 말 안하고, 막내인 나는 아버지께 짐정리를 하자고 강하고 요구했다. 당연히 아버지는 상처를 받으시고 방어적으로 되었고 나에게 역정을 내셨다.

    "내가 죽으면 그냥 버리면 된다. 생각할 거 없이 그냥 버리면 되니까 지금은 그냥 둬라!"

    평소에 온화하신 아버지가 내는 역정에 나는 나대로 화가 나 고함을 질렀다.

    "아버진, 아버지 생각만 하는 거에요. 산더미 같은 유품 치우면서 제가 겪을 고통은 생각지 않으세요? 쓰지 않는 물건 정리하자는 게 뭐가 그리 어려워요? 절 도와주는 셈치고 좀 정리해주시면 안돼요?"

    이렇게 서로 상처를 주고받은 뒤에도 아무런 진전은 없었다. 

    그러다가 급반전이 생긴 것은 2009 년이었다. 엄마가 혈압으로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다. 운좋게 내가 한국에 있어서 엄마의 퇴원까지 돕고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부모님의 낡은 아파트의 전기가 누전이 되고, 동시에 부엌 바닥의 물이 새서 아랫집 벽을 손상시키는 대사고가 일어났다. 바닥을 다 들어내는 공사만이 누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순간 엄마는 불안증이 생겨 혈압이 250까지 올라가 다시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다. 50 년 동안 쌓인 살림, 2 천권이 넘는 책들이 들어차 있는 집, 공사를 한다는 게 두려우셨던 거다. 

    나는 며칠 더 체류기간을 연장하고 문제 해결에 골몰했다. 나는 상담을 받은 뒤 바닥을 들어내는 공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아랫집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이런 저런 결정을 내렸는데 엄마가 눈에 띄게 안정되는 게 보였다.  그때 나는 엄마의 혈압은 식사/운동의 부족이 아니라 극심한 스트레스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늙어가면서 문제들은 점점 많아지는데 그 모든 책임을 엄마 혼자 지고가면서 엄마는 두려움이 생겼고 삶의 낙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엄마가 혈압으로 병원에 입원한 두차례 다 내가 한국을 떠나기 직전이라는 사실도 우연이 아닌듯했다. 

    부모님은 우리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독립적으로 잘 살아오셨으나 이제 너무 연로하여 서 오빠, 언니, 내가 개입해야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싱가포르에 있는 오빠, 캔사스의 언니, 모두 나와 엄마에게 전화를 자주 주고, 돈을 보내겠다, 한국에 들어오겠다--하면서 나를 지원해주었다. 언니랑 오빠랑 이야기를 하면 마음이 든든했다. 언니 오빠가 멀리서 도울 수 있는 일들은 없어서 내 혼자 힘으로 해보겠다 하였다. 

    엄마가 퇴원한 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나 책을 다 버리기로 했어."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랐다. 아버지와 책은 뗄 수 없는 관계인데...내가 아버지께 짐정리를 하시자고 떽떽거릴 때도 나는 아버지의 책은 전혀 정리 대상에 두지 않았었다. 

    아버지는 밤 내내 의학 사전을 읽으면서 엄마의 증상에 대해 공부를 하고, 엄마를 잘 지켜주기 위해서는 삶을 간단하게 해야겠다 마음 먹었다 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얼마나 큰 결심을 하신 것인지를 알고 감사히 받아들였다.

    이참에 엄마도 낡은 옷가지와 살림들을 정리하겠다 하셨다.

    아버지의 삶을 평생을 인도하고 지배해온 책, 엄마의 삶을 평생 인도하고 지배해온 살림을 처분하기로 하는 결정도 어려웠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책을 어떻게 처분한다지? 다행히 나의 '형'인 수원대학교의 영문과 이용관 교수의 도움으로 책들은 수원대 도서관에 기증하게 되었다. (이듬해, 수원대학교에서 아버지께 감사패를 수여했다. 아버지는 자기의 분신과도 같던 책이 도서관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행복해하셨다.) 

    아버지와 엄마와 함께 한 짐정리는 고되었지만 아주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짐정리 바로 전 날, 짐들을 대강 구분해보고 쓰레기 봉투를 수십 개 구입하고, 아파트 지하실을 누비면서 박스들을 모았다.  동네 슈퍼 옆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팔순의 할머니에게서 박스를 여분으로 더 구입하였다.

    박스들을 낑낑대며 들고 엄마 아버지 아파트로 들어갈 때 나의 마음은 날아갈 것같이 가뿐했다. 이삿짐 박스를 난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다. 

    유학시절, 박스들은 나에게 자유의 상징물이었다. 혼자, 여러번 국제 이사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사다닐 때마다 박스안에 물건을 포장하면서 나는 새로운 세계애 대한 꿈도 같이 넣었고,새로 이사한 곳에 도착하여 박스를 하나씩 뜯을 때마다 나는 희망으로 설레었다. 박스 하나를 통채로 잃어도 내 삶에 큰 지장이 없었기에 발이 가벼웠고 마음이 가벼웠다. 빚지지 않은 인생이니 비굴하지 않고 자신이 있었다.

    부모님의 박스를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이 박스를 통해 책이 나가고, 물건들이 나가겠지. 무거운 짐들이 사라지고, 깨끗한 공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시게 될 것이다. 부모님의 노년은 가벼워지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구나!!

    짐 정리 당일, 새벽에 아침식사를 든든히 하고 운동화를 신은 채 작업을 시작했다. 엄마는 살림 정리, 아버지는 책 분류, 나는 양쪽 다 참견하면서 포장과 쓰레기 정리.

    엄마도, 아버지도, 나도 즐거웠다. 박스 안에 책이 채워지고, 쓰레기 봉지 안에 물건들이 채워지는 동안,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고생했던 이야기,기뻤던 이야기, 어떤 꿈을 꾸었던가의 이야기, 왜 행복했던가...

    가끔 일하다 말고

    "이거....태능에서 살 적에 화채 그릇으로 썼었는데.."  (그래도 버리자!) 

    "이 커피잔은 정말 우리가 아낀 거였어. 그 때는 커피 한 잔 마시는 게 그렇게 큰 사치같았었는데..."

    (이건 제가 가지고 갈래요!)

    "교회 음식이나 결혼식 뷔페 할 때 요긴하게 사용했던 그릇이지..." (그래도 버리자!)



    이런 식으로 우리는 옛날을 회고하며 물건을 하나씩 정리해나갔다.

    아버지는 여기 저기 왔다갔다 하면서 책이 포장되는 것을 바라보셨다.나는 혹시라도 아버지 마음에 상처가 될까 곁눈질 하면서 보았는데 아버지가 이미 굳게 마음을 잡쉈는지 책이 한 박스씩 포장되어 다용도실로 옮겨져가는 과정을 그저 침착하게 관조하셨다

    책은 밤 9 시에 포장이 완료되었다. 부엌 살림은 밤 11 시경에 대강 정리되었다. 나는 기절 직전이었다. 이제까지 이사할 때 이런 식으로 단기간 안에 많은 짐을 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마음이 뿌듯했다. 짐이 꽉 차 있던 거실이 횅하게 뚫려 보이는데 속이 다 시원해졌다.

    다음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났다. 더러운 바닥, 밖으로 내놓야야할 서랍장, 장식장, 쓰레기 무더기 등이 즐비한 거실, 천천히 둘러보면서 심란했다. 이런 지경에 부모님을 두고 미국으로 떠나야하다니...

    지진이 나 기둥이 흔들리기라도 한 듯, 엉망진창이 된 집의 상태에 엄마 아버지 마음까지 뒤숭숭할까 걱정이 되었는데, 웬걸? 아니었다.

    짐정리가 된 후, 기쁨을 감출 길 없어서 두분은 울상이었다.(원래 너무 고마와 말로 표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마음을 표현할 때는 울상을 지으신다.)

    "고마워서 어떻게 하니. 너는 우리의 생명의 은인이다. 우리가 더 잘 살께. 고맙다. 이번에 너무 너무 고맙다."

    내가 되려 죄송스러웠다. 내가 한 일들은 부모님께는 어려워도 젊은 나에게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 자녀들은 하루 하루 조그만 일에서 부모님의 시름을 덜어드리고 일상을 가볍게 해드릴 수 있는데 
    우리 가족은 다 멀리 살아서 부모님께 적절한 도움을 드릴 수가 없었고 그래서 엄마의 병을 키운 것같아 안타까웠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내가 작별 인사를 드린 뒤에 계단을 내려가는데 나를 따라 내려오셨던 아버지의 
    애처로운 모습이다. 
    "아버지 내려오시지 마세요!"
    "아냐, 내가 봐야지. 너 가는 거 봐야지."


    나는 아버지 모습을 뒤로 하면서 떠나기 싫었는데 아버지는 무겁지도 않는 가방, 부득부득 들어주겠다면서 따라 
    내려오신다. 그래야 아버지 마음이 편하시겠지 싶어서 그냥 순종했다. 그러나 마음은 괴로웠다.

    아파트 계단 밑의 길에 차가 시동이 걸린 채 서 있었다. 유쾌함을 가장하면서 아버지를 향했다.

    "아버지, 여기서 작별해요. 포옹~~~"
    "그래, 그래."



    아무리 표정으로 감추려고 해도 넘쳐나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해 아버지를 껴안는데
    아버지의 눈에도 이미 눈물이 가득했다. 아버지를 껴안았다. 앙상히 뼈만 남은 아버지의 몸이 딱딱히 안겨졌다.
    참으려고 했던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아버지, 건강하세요. 내가 또 올께. 아버지 내가 또 와서 봐줄께, 하루 하루 즐겁게 사세요. 아버지..."
    "신주야, 우리 걱정하지 말고, 너 건강 조심하고...잘 살아라. 우리는 괜찮아. 이번에 네가 우리를 살려줬어.
    고마워."

    차에 올랐다. 단정히 서서, 울음을 삼키면서 나에게 '고맙다 고맙다'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 가여워서 눈물났다.
    공사는 잘 진척되었고, 거실과 부엌 바닥 수리를 하는 김에 싱크대도 새것으로 바꿨다. 엄마 방도 벽지를 새로 
    바르고 하얀색 장도 하나 짜 넣었다.

    몇 주 후, 엄마 아버지가 새로 단장한 집에 들어가시는 날, 너무 궁금해서 잠이 안 왔다.

    한국 시간에 맞춰서 전화를 드리니 엄마가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셨다.


    "너무 좋다! 내 평생에 이렇게 좋은 부엌을 갖게 될 줄이야! 마루도 넓고 환해...새 집같아. 너무 좋다."


    그 말 한마디에 모든 피로가 다 녹는 거 같았다. 긍정적인 엄마의 목소리가 나에게는 아름다운 노래처럼 

    들렸다. 90을 바라보는 바라보는 나이에도 새로운 공간은 삶의 의욕과 희망을 줄 수 있는 거구나.


    "속이 시원해. 언젠가 할 일이었는데 이렇게 살아서 하게 되니 좋다.

    우리가 이 짐 두고 죽었으면 그걸 정리하면서 늬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 순간 깨달았다. 엄마랑 아버지가 온 집을 꽉 채운 짐들을 보면서 '자식들을 힘들게하는 유품'이 될 거라고 걱정했으나 정리를 하고 싶어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할지를 몰랐다는 사실을. 정리를 할 기운도 딸리고 '평생의 물건을 정리한다' 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사회 초년병이 직장 생활을 시작하는 것만큼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으리라.

    다행이었다. 자식에게 도와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그런 뱃짱과 용기가 없는 두분이 누전, 누수 덕에 선택권이 없이 나의 도움을 받아야했고 그래서 '죽어서 하는 유품정리' 대신에 '더 잘 살려고 하는 짐정리'라는 유쾌한 작업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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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 년 큰 짐정리 작업이 끝난 이후에 두 차례에 걸쳐서 짐정리가 이뤄졌다. 2015 년 미국에서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신 뒤 한국에 못 돌아가게 되시고 미국으로 억지로 이민을 해야하게 된 후 집은 1 년 비워져있었다. 나는 집을 부동산 시장에 내놓기 위해서 한국에 잠시 들어갔다.

    열쇠를 열고 부모님 아파트를 들어선 순간, 엄마 아버지 집의 특유의 '다정한' 냄새를 먼지의 냄새가 압도했다. 현관 문을 여는 순간 내가 부모님의 짐정리를 하러 왔다는 뻔한 사실이 서럽게 느껴졌다. 지난 30 년 간 내가 이 집에 들어와 문을 열면 언제든지 두 분 중의 한분이 계셨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없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마음이 착잡해졌다. 천천히 둘러보면서 이제 지금의 모습을 곧 상실하게 될 아파트, 엄마 아버지의 집이자 나의 친정의 모습을 내 마음에 담았다. 옷을 갈아입고 작업을 시작했다. 아무리 치워도 버릴 것은 계속 나왔고, 끊임없이 '이걸 간직할까 버릴까' 결정을 해야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아버지 간병을 위해 내가 집을 오래 비울 수 없는 처지여서 시간이 촉박한데 마음이 복잡하니 일의 진전이 더디었다. 그래서 내 마음으로 "다 버린다" 라고 생각하고 엄마 아버지가 의미를 두셨던 물건들 중심으로 남길 것을 선택했다. 잠도 못자고 며칠 일을 한 뒤 비행기를 탔는데, 나는 엘에이까지의 비행이 그렇게 짧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내내 잤다) 살도 쭉 빠졌다.

    나는 한국에서 집파고 사는 절차를 모르므로 친구 J 의 도움을 받아 집을 내놓았다. 원격으로 집을 팔려니 준비할 서류가 엄청 많았다. 시세가 안좋다, 2 층이니 유리하지 않은 조건이다, 학군이 안좋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집은 내놓자마자 처음 방문한 사람이 그자리에서 사기로 결정해서 금방 팔렸다. 부모님의 모든 재산을 미국으로 옮기고 아파트 매매를 완결짓기 위해 다시 한국에 들어왔다. 그때 마음이 아주 복잡했었다. 아버지 건강이 안 좋으셨을 때라서 어서 일을 처리하고 미국에 돌아가야한다는 부담과 아파트의 모든 짐들을 완전히 다 비워야하는 숙제가 있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심경이 복잡해서 나는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은채 일을 했다. 온 집안을 다 비우는 일은...장례식 같았다.

    큰 물건들을 다 처분하고, 이제까지 모든 제거 작업에서 살아남았던 물건/옷/가구들이 새로운 검증과정을 거쳐 버려지거나 선택되어야했다. 우리가 태능에서부터 썼던, 내가 4 살 때부터 우리집 안방을 차지해왔던 옷장을 깨부수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그 장은 나에게 '장'이 아니라 '엄마' '아버지'처럼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존재였었다. 그 순간은 자리를 비워야했었다. 만약 저 장이 '유품'이었다면? 엄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장을 부시는 소리를 들었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해외 운송 업체에서 준 박스에 미국으로 보낼 짐을 포장하고--아무리 줄여도 35 박스가 되었다--버릴 물건들을 포장했다. 물건들을 정리하는 내내---부모님 짐을 정리할 때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이게 짐정리이지 유품 정리가 아니라 정말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팔기 위해서, 부모님의 터전을 미국을 옮기기 위해서....그런 목표를 갖고 하는 짐정리니까 내가 괜히센티멘탈해질 필요가 없다 라고 자위했다. 엄마 아버지의 집이, 한국에서 내 친정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사실에 묘한 슬픔 비슷한 감정이 든 것은 사실이나, 그것도 아버지와 엄마가 내 집에 같이 게시는데 무슨 친정타령?! 하며 묻어버렸다.그럴 수 있었다. 그게 사실이니까.

    한국에서 부친 짐이 몇 주 후에 미국에 도착한 날, 나는 2009 년부터 시작된 짐정리가 잘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짐정리'가 끝났기에 아버지는 유품정리의 숙제를 남겨두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나셨다. 축복의 죽음이다. 그렇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이 축복받은 죽음인 것은 아버지가 우리들에게 둘러싸여 나름 편안하게 임종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정리할 유품을 물려두지 않고 돌아가신 것이라고 믿는다. 아버지가 선택한 것도 있고 (책 기증), 아버지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되어 (미국 이민) 물건들이 정리가 된 바람에 정리할 유품이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여하간에 처리해야할 유품이 없었다는 사실은 남아있는 우리가 아버지를 온전히 애도하고 기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버지는 가볍게 훌훌 떠나셨고, 아버지의 빈자리에는 우리가 평생 간직할 아버지라는 인간의 여러 아름다운 모습의 기억이 남아 있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죽을까? 내 마지막 순간은 어떠할까? 스르르 잠을 자는 중에 마지막 숨을 내쉴지, 고통 속에 눈을 뜬채 세상을 떠날지, 알지 못한다. 내가 통제할 능력은 더더구나 없다. 그러나 내가 죽기 전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뭐라는 것을 적어도 하나는 안다. 내가 짐정리를 제때 제때 하면 아이들에게 유품정리라는 골치거리를 남겨두지 않을 수 있고, 아이들은 쓰레기가 대부분인 유품에 신경을 쓰는 대신에 자기 엄마와의 기억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주고 싶다. 

    아버지가 그 옛날 주차장에 내려와 나에게 눈물로 고맙다고 인사하고 껴안아주셨던 것은 아버지가 감히 할 수 없었던 짐정리를내가 도와줘서 할 수 있어서였다는 의미였다. 나는 당시에는 그냥 아버지가 가엾다는 생각으로 껴안았는데 이제는 아버지가 내게 한 '고맙다'라는 말의 의미가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아버지의 유품정리는 아버지가 당신에게는 생명과도 같이 중요한 책을 포기하는 순간 시작된 것이었고, 아버지의 죽음 준비도 이미 그때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게 일찍 준비하신 덕에 아버지는 참으로 복된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다. 이제 나는 아버지와의 경험을 통해서 배운 삶의 교훈을 내 삶에 적용해서 내 짐도 그때 그때 정리할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유품보다 기억을 더 많이 남겨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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