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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나눈 것들
    부모님 이야기 2018. 11. 29. 14:16


    Jaffa-Tel Aviv



    사라 할머니는 이스라엘로 날 초청했던 오프라 교수의 시어머니이다. 나는 몸이 불편한 할머니를 찾아 뵈면서 아주 친하게 지냈다. 할머니는 만난지 1 년도 안되어 돌아가셨고 당시 할머니는 80세, 나는 27 세였다.

    아래는 2002 년에 출판된 책에 수록되었던 사라 할머니에 관한 에세이를 기초로, 내 기억을 새로이하기 위해 부모님께 썼던 옛 편지를 참고해서 쓴 글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쓴 글이라 '수발'이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사라 할머니


    이스라엘 가족과 같이 생활하면서 나는 향수병이 더 심하게 도졌다. 아예 처음부터 기숙사에 들어갔더라면 외국에서 온 유학생들을 만나고, 내가 느끼는 외로움과 향수를 조금 더 객관적 시각으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기숙사로 옮긴 이후에 나는 향수병이 치유되었다). 오프라 교수의 가정은 따뜻한 곳인 만큼, 내가 우리 가족 생각을 더 많이 하게끔 만들었다. 특히 몸은 깼으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아침 일찌기나 저녁 늦게, 인사, 웃음을 생략하고 그냥 무심하게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때라던가, 온 가족이 다 모여서 잔치를 벌이는 날 (오프라 집은 잔치가 잦았다)은 집생각 때문에 가슴이 절절했다. 


    내 향수병의 근원은 언어에서 오는 소외감이었다. 도착하자마자 호기있게 히브리말을 배우겠다고 선언한 것이 문제였다. 새 언어를 배우는 맛이 컸지만 히브리어를 못해서 오는 갑갑함을 가끔씩 쫄깃한 한국말 수다로 풀어낼 수가 없는 게 고통스러웠다. 이 없으면 잇몸이라고 좀 편하게 할 수 있는 영어도 내 복잡한 감정을 실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리타분한 성문종합영어판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려니 표현되지 못한 스트레스가 가슴에 차곡차곡 싸여가는 게 느껴졌다. 예루살렘에는 한국 사람들이 있다던데, 한국인은 고사하고 동양인은 찾아보기 힘든 하이파에서 나는 병이 날 지경이었다. 정말 외로웠다. 전화비가 아까와 집에 전화를 자주 걸지 못했고, 정작 전화를 하면 “엄마, 아버지!”하고 감격하여 외치다가 날씨 얘기나 하고 급하게 끊기가 일쑤였다. 전화를 하고 나면 집생각이 더 나 가슴이 아렸다.


    그 덕에 편지를 많이 썼다. 지금까지 부모님께 쓴 편지가 큰 박스로 두통이 된다. 편지지를 항상 품고 다니면서 어디던지 기회가 되면 편지를 썼다. 버스안에서, 도서실에서, 식당에서, 어디든지 줄 서서 기다리는 곳이라면 나는 편지를 썼다.  손 바닥에 대고 편지를 쓰기도 했고, 벽에 매달려 쓰기도 했다. 나의 유학이 나만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가족 전체의 경험이니 같이 나눠야한다는 책임의식도 있었지만, 그보다 한국어로 편지를 쓰는 것은 영어와 히브리어에서 소외감을 느끼던 나에겐‘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작업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더 깊은 침묵 속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꼭 해야 될 이야기가 아니면 입을 다물었고, 웃음도 점점 잃어갔다. 어떨 때는“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기분이 될까”를 골똘히 생각하기도 했다. 지나가는 자동차를 보면 한번 뛰어들어볼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생리도 끊겼다. 오프라와 새로 사귄 친구들이 어떤 방법으로든 나를 도와주려 했지만 나는 점점 더 깊은 침묵의 우울증으로 빠져들어갔다. 


    그즈음에 오프라의 권유로 사라 할머니를 방문하게 되었다. 사라 할머니는 아로디의 어머니로서 이스라엘에 도착한 첫 주에 인사를 드려서 안면은 있지만 말을 나눠본 적이 없었다. 오프라는 할머니가 실족을 하신 뒤로 휠체어 신세를 지고 계셨는데 상태가 악화되었다며 누군가 찾아오면 할머니가 기뻐하실 거라고 했다. 


    단정한 은발의 사라 할머니는 딱딱한 표정으로 인사하는 나를 오래 알아온 친구인양 환한 미소로 반갑게 맞아주셨다. 나는 할머니가 말을 걸까봐 겁이 났다. 내가 갓 배우기 시작한 히브리어로는 정상적인 대화란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주책을 떨어 남을 웃기면서 대화를 하기는 질색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안심했다. 할머니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뿐,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참 오랜만의 침묵이었다. 나야 당시 항상 말이 없었지만 상대방이 나처럼 말이 없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내가 히브리어를 하는 게 신기해서, 더 배워주겠다는 좋은 의도로 나에게 쉴새 없이 말을 걸었다.) 할머니가 긴 침묵을 개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이상한 자유로움을 느꼈다. 이전까지 나의 침묵이 히브리어를 못하는 데서 오는 '강요된' 침묵이었다면, 할머니와 나는 마치 침묵을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함께 즐기는 것같았다. 내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다가 내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


    “바트 카마 아트?” (How old are you?)


    초급 히브리어 시간에 배운 몇 안 되는 표현 중의 하나였다.  아뿔사! 여자 나이는 묻는 게 아니라고 하던데 어쩌다 이런 실수를 했나. 할머니는 약간 의아한 듯 잠시 나를 쳐다보시더니, 장난어린 윙크를 하며, "제 소드"라 했다. 

     

    일흔 일곱이라든가 여든이라든가 숫자로서의 대답을 기대했던 나는 '제 소드'가  무슨 말인지 전혀 추측을 할 수 없었다. 가방에서 히브리어 사전을 꺼내 할머니께 찾아달라고 하였다. "소드"는 "비밀"이란 의미였다.


    할머니가 나에게 말장난을 거신 거구나! 


    그 순간 내 마음이 밝아졌다. 할머니는 내 초급 히브리어 수준에 맞추어 교과서 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아니면 과장된 제스처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대신에 나를 동등한 대화 상대로 삼은 것이었다. 히브리어를“문화 적응의 기초 작업" "정보 교환의 수단”으로만 보고 전투적으로 공부하다가 진이 다 빠져있던 나에게 할머니의 말장난은 의미가 컸다. 처음으로 히브리어가 인간과 인간을 맺어주는 대화의 수단이라는 뻔한 사실을 실감하면서 나는 마치 그림의 꽃만 보다가 생화의 향기를 맡는 것처럼 신선한 기쁨을 느꼈다. 나는 사라 할머니를 보며 소리내어 웃었다. 내 웃음 소리에 스스로 깜짝 놀라면서. 그만큼 오랜만에 들은 나의 웃음소리였다. 


    그 날 이후, 나는 적적한 할머니를 정기적으로 찾아가 뵈었다. 할머니는 기꺼이 내 히브리어 대화 상대가 되어 주셨다. 아니 나의 반향판 (sounding board)이 되어 주셨다. 나는 이제까지 내가 침묵속에 꼭꼭 묶어 놓았던 감정을 서툰 언어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의 말을 경청하셨다. 할머니의 침묵이 내게는 최고의 히브리어 선생이었다. 내가 점점 기가 살아서, 말 실수도 창피해하지 않고, 막히는 표현을 굴하지 않고 수다를 떨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내가 적절한 단어를 못 찾으면 그냥 편안히 미소를 띤 침묵으로 내가 표현을 찾아낼 때까지 기다리셨다. 내가 어려운 단어를 사용해서 멋진 문장을 만들면,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하셨다.

     

    나의 히브리어 실력이 조금씩 늘면서 할머니의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할머니는 러시아의 시골에서 태어났는데, 열 다섯의 나이로 팔레스타인 땅에 와 이스라엘 건국 운동에 참여하시게 되었단다. 하이파의 해변 모래사장에 텐트를 치고 공동생활을 하면서 하이파 시를 세우는 데 참여하셨다. 나는 나중에 오프라로부터  사라 할머니가 남편이 작고한 후에는 상당히 큰 회사의 대표로 일을 하며 아들 둘을 키웠으며 하이파 시의 문화 활성을 위해 많은 일을 해서 '하이파 시에 문화 공연의 뒤엔 항상 사라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적지 않이 놀랐다. 이렇게 연약한 할머니가 그렇게 활발한 사회 활동을 했다니!


    할머니와 친해지고 히브리어가 익숙해지면서 나는 서서히 우울증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마음 문을 열기 시작하면서 친구가 많이 생겼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친구들은 물론, 미국, 영국, 독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캐나다에서 온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공부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기가 살아서 하는 공부는 어렵지도 않았다. 히브리어 공부도, 내 전공 공부도 점점 수월하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건강이 점차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셨다. 나는 노느라 아무리 바빠도, 바로 다음 날 시험이 있어도 할머니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할머니가 나를 기다리시는 것을 알고 있어서 실망드리고 싶지 않아서였기도 했지만 내가 병실에 들어설 때 환히 웃으며 반겨주는 할머니를 뵙는 낙이 컸기 때문이다. 나를 보고싶어 하고,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난 큰 보람과 기쁨을 느꼈고, 내가 어떤이의 인생에서 필요한 사람이라는 의식은 나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오프라와 아로디 부부는 할머니가 점점 무표정해지시고 말수가 적어진다며  평생을 독립적으로 활발하게 살아 오신 분이 이제 몸을 가누기 못하고 침대 신세를 지게 되면서 우울증에 걸린 게 아닌가 우려했다. 그러나 그런 할머니가 나를 보면 소곤소곤 이야기를 많이 하고 삶의 의욕이 넘치고 장난기마저 흐르는 귀여운 여성으로 돌변한다고 놀라워했다.  자기들을 보면 별 반응이 없으셔서 '이젠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실 건가보다' 하는데, 내 이름을 듣거나 이야기를 들으면 얼굴이 햇님처럼 밝아진다고 하며 할머니를 기쁘게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나를 반기는 할머니의 미소, 장난기와 호기심이 반짝이는 눈망울은 여전했지만, 그녀의 몸과 마음의 건강은 나날이 악화되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의 근육이 퇴화되는 것을 막으려고 매일 전신 맛사지를 해 드렸으나 하반신은 거의 마비가 되었고, 수술도, 약도, 효력이 없었다. 숟가락으로 음식을 떠서 입에 집어 넣는 일도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오후 할머니의 병실에 들어섰을 때 할머니는 이른 저녁식사를 하고 계셨다. "샬롬, 할머니!” 나의 인사에 할머니는 비밀스런 행동을 하다 들킨 듯 화들짝 놀라시면서 음식 쟁반을 옆으로 밀어내셨다. 


    무슨 일인가 다가가서 보니 할머니의 음식 쟁반에 상추 사라다, 감자 찜, 참치 요리등이 지전분히 널려 있었다. 할머니가 손이 떨려서 나이프로 음식도 썰지도 못하고 포오크로 입에 넣지를 못하셨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수치스러운 얼굴로 나를 외면하셨다. 내가 모른 척 하며 숟가락에 음식을 떠서 조심스레 할머니 입에 갖다 대었으나 할머니는 슬픈 얼굴로 식욕이 없다고 하셨다. 삶의 의욕이 완전히 상실된 얼굴이었다. 


    "사브타, 한국에서는 쌈밥이란 음식이 있는데요, 그건 손으로 말아 먹는 거랍니다. 자, 보세요.“


    나는 상치 한 조각에 삶은 감자 조각과 참치 샐러드를 얹고, 잎으로 잘 싼 다음, 그것을 들어 

    올려 허공에 큰 원을 한 번 그린 다음에 내 입에 쑥 집어 넣고 우적우적 씹어 보였다. 할머니가 보시기에 쉬우라고 약간 과장된 제스쳐를 썼다.

     

    “자, 이젠 할머니 차례!” 


    할머니는 수줍음과 호기심이 섞인 얼굴로 나를 따라 상치쌈을 말아 입에 넣으셨다. 입이 꽉 찬 상태에서 우리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웃음보가 터졌고, 음식 접시는 금새 비워졌다.


    며칠 후, 할머니의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음식 썩는 냄새같은 악취가 났다. 할머니에게서 나는 냄새임이 분명했으나 정확히 어디인가 모르겠기에 조심스런 눈으로 할머니를 관찰했다. 할머니의 머리는 빗질한 지 오래되어 엉켜있었고, 감은 지도 오래되어 기름냄새가 났다. 목과 어깨도 비듬처럼 살 껍질이 벗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악취의 근원은 할머니의 손톱이었다. 손으로 음식을 드시고 씻지 못하여서인지 손톱에 음식 찌꺼기가 끼어 있었다. 내 눈이 머무는 시간이 너무 길었나. 할머니가 내 시선을 알아차리셨다. 수치심으로 얼굴이 일그러 지시면서 이불 밑으로 손을 집어 넣으셨다. 내가 얼마나 죄송하던지...


    말없이 나가서 병원 세면장으로 갔다. 더운물을 한 대야 떠와서 할머니 침대 옆의 탁자에 놓고 할머니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할머니는 잠시 의아한 표정이셨다. 그러나 금방 내 뜻을 아신 듯, 눈을 감고 손을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비누칠 한 수건으로 주름이 깊게 패인 할머니 손을 닦고, 손톱 속 음식 찌끼를 세세히 파내었다. 손을 씻은 후에 다시 물을 떠와 할머니 머리를 감았다. 성성한 은발은 내 손으로 한 줌도 안되었다. 비누로 감고, 맑은 물에 헹군 수건으로 여러 번 닦아냈다. 새 물에 딱딱히 굳은 어깨, 살 비늘이 묻어나는 등,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깨끗이 씻었다. 말없이 나에게 몸을 맞기신 할머니나 묵묵히 할머니 몸을 닦는 나나 마치 침례식을 드리는 것 마냥 엄숙하고 진지했다.


    할머니의 손톱과 발톱을 다듬고, 비누향이 나는 머리를 빗긴 후, 마지막으로 내 가방에서 립스틱을 꺼내 수줍어 하는 할머니 입술에 발랐다. 


    “자~~ 할머니! 여기 보세요.”


    사라 할머니는 조심스레 거울을 받아 당신의 얼굴에 비추셨다. 고개를 천천히 돌리면서 거울을 보시는 할머니의 얼굴에 잔잔히 만족의 미소가 퍼졌다. 할머니는 아름다왔다.


    나는 남 몰래 처음 화장을 한 사춘기 소녀같이 수줍게 웃는  할머나를 품에 부등켜 안으며 내가 굉장히 늙은 사람같이 느껴졌다.


    이스라엘 식구들은 할머니와 나의 우정에 감탄했다. 내가 할머니의 몸을 꺼리지 않고 만지는 것도, 또, 할머니가 맘 편히 자신의 몸을 나에게 맡기는 것도 신기해 했다. 되려 나는 키스와 포옹에 익숙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작 스킨쉽이 필요한 사람의 몸에 손을 못 대는 게 이상했다. 한국 공중 목욕탕에서 생판 모르는 이의 등을 이태리 타월로 벅벅 문지르는 것에 익숙한 나로서는 내가 그리도 사랑하는 할머니의 몸을 만지는 것은 별로 큰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Jaffa-Tel Aviv




    몇 주 후 할머니는 하이파 시에서 좀 떨어진 오프라네 집 근처의 요양원으로 옮겨갔다. 기숙사에서는 먼 곳이어서 나는 안식일을 보내러 오프라의 집에 가는 주말에만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요양원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슬퍼졌다. 거동이 아주 불편한 치매 노인들이 거주하는 요양원에는 대화와 소통이 전무했다. 할머니들은 대부분 침범할 수 없는 그런 침묵의 세계에 속해 있었다. 날씨에 따라서 하루에 한 번 또는 두 번, 할머니들은 따뜻한 담요에 싸여 휠체어롤 타고 정원으로 나와 원형으로 앉혀졌는데 해가 찬란히 비추는 늦은 오후, 상쾌한 미풍을 즐기면서 각양각색의 꽃들이 만발한 정원에서 일광욕을 하는 게 아주 유뫠한 일이련만, 할머니들은 목석처럼 굳은 얼굴로 아름다운 자연에는 무심하게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아무도 그들을 깊은 생각에서, 아니, 아무 생각도 없는 진공 상테에서 구해낼 수 없었다. 앙증맞은 꽃, 푸른 이파리, 꽃 내음을 퍼뜨리는 부드러운 바람, 이 어느 것도 그들을 활기차게 만들 수 없었다. 돌계단의 돌들이 할머니들보다 더 생생해 보일 정도였다.

    사라 할머니는 좀 달랐다. 할머니는 나를 보면 미소짓고 이야기했다. 내가 방에 들어설 때마다 할머니는 온 방안을 밝게 만드는 함박 미소를 지으셨다. (오프라는 다른 사람들이 방문할 때 할머니는 무표정하게 '안녕' 하고 인사를 한다며 "사라는 미소를 너만 위해서 남겨두는 것같다" 라고 했다.)

    어느날 오후 할머니는 매일 열심히 운동한다고 자랑했다. 할머니가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휠체어에 앉은채 팔을 천천히 들어 머리 위까지 올렸다가 내리는 것으로 내가 할머니가 스스로의 몸에 책임감을 가지시라고 내린 처방이었다. 대단한 운동은 아니지만 할머니께는 힘든 동작이었다.

    "운동을 했더니~~," 할머니가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배가 아프지 않아!"  

    "오! 할머니, 메쭈이안! (excellent!)"

    그때 바로 우리 옆에 있던 간호사 마르셀라가 갑자기 사라에게 질문을 했다. 나를 가르키며,

     "이 사람의 이름이 뭐에요?" 라고.

    그 순간 아, 안돼! 나는 외치고 싶었다.  마르셀라는 분명 할머니에게 기억력 운동을 시키려는 의도였겠지만 기억력이 하루가 가르게 감퇴되어가는 할머니가 나의 한국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혹시라도 할머니가 마르셀라의 질문을 그대로 다시 반복해서, "이 사람의 이름은 뭐에요?" 라고 할까 기대했다. 왜냐면 할머니는 대답을 할 수 없을 때는 주로 들은 질문을 그대로 반복하는 버릇이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마르셀라는 좀 더 단호한 목소리로 추궁하듯이 "이름이 뭐에요?" 라 다시 물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입은 꼭 다물어졌다. 할머니는 우리의 시선을 피했다.

    나는 급한 마음으로 끼어들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사실이다. 할머니가 내 이름을 기억하냐 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나를 알아보는 것만해도
    어딘데!

    나는 당황해하는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서 크게 말했다.

    "할머니, 중요한 것은 말이죠~~" 

    그리곤 잠시 정지했다. 그래, 내 이름따윈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자. 그럼 뭐가 중요한 거라 해야하지?
    내가 번듯한 생각이 안 떠올라 머뭇거리는데 할머니가 큰 소리로 외쳤다.

    "운동! 중요한 것은 운동이야!"

    나는 기대치 않은 대답에 잠시 말을 잊었다. 그리곤 웃음을 터뜨렸다.

    "할머니, 맞아요! 맞아요! 중요한 것은 운동이에요!"

    마르셀라가 혼돈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이름이 뭐냐는 질문에 얼토당토않은 대답을 한 할머니를 두고 내가 왜 이리 기뻐하는지 이해가 안된 거다. 

    내가 좋아한 이유가 있다. "운동" 이란 내가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뒤 끊임없이 강조해온 개념이다. 
    노화, 근육의 퇴화를 늦추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운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들어서였다. 요양원으로 옮겨지신 뒤에는 한층 더 열심히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해서 할머니의 팔을 들어올리면서
    "할머니, 운동 운동 운동, 운동이 중요해요!" 하곤 했다.

    할머니가 과연 진짜로 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건가? 
    아니면 당신 기억에 각인되어 있는 어떤 소리를 그대로 되뱉은 건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실제로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기억했다는 것만해도 충분했다. 

    내가 사브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8 월 말의 어느 안식일이었다. 
    오프라 댁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요양원에 들렀다. 
    현관에서부터 나는 할머니를 알아보았다. 할머니는 무릎에 담요를 두른 채 요양원의 앞뜰에 나와 앉아 있었다. 

    나는 인사를 하면 할머니가 웃어주시겠지 기대하면서 돌계단을 급히 올라갔다. 그런데 할머니가 가만히 있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도 않으신다. 할머니가 내 등장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 목소리를 못 들으셨나? 

    나는 소란하게 의자를 끌어서 할머니 옆으로 가 크게 말했다.

    "할머니, 저 신주에요!

    조용.
    반응이 없다.
    나는 할머니께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저에요, 할머니, 저 신주에요!"

    응답이 없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며 “할머니” 하고 불렀다. 그 순간 할머니는 천천히 나를 향해 얼굴을 돌리셨다. 나는 할머니 뺨에 키스를 하려고 얼굴을 가까이 하다가 멈칫했다. 할머니의 공허한 시선에 압도되어서이다. 


    할머니의 눈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은 마주쳤다. 그러나 할머니는 나를 보고 계신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집중된 시선은 마치 내 몸이 투명체인 듯, 나를 뚫어 지나쳐 뭔가 다른 것을 향해 있었다. 그 시선에 두려움과 허탈함이 한번에 밀려들었다. 난 약간 압도되어 할머니 옆에 앉았다. 할머니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정적. 나는 화석처럼 굳은 채 침묵 속에 정원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할머니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침묵이 우리를 편안하게 엮어주고 친하게 만들어주었건만 지금의 짓누르듯이 무거운 침묵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었다. 


    버스 시간이 되어 일어났다. 할머니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섬뜩하리만큼 차가웠다. 

    할머니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는 75 번 버스 한 구석에 앉아 소리내어 울었다. 


    Jaffa-Tel Aviv

    할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나는 할머니가 떠나실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할머니의 죽음에 준비되지 않았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준비가 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녀의 장례식에서 나는 너무도 많이 울어 실신 지경까지 되었다. 처음 몇 주는 참을 수 없게 고통스러웠다. 할머니의 기억은 아무 때도 나를 휘둘러쳤고 나는 눈물이 터졌다. 나의 증상이 심해서 나도, 오프라와 아로디도 내가 깊은 우울증의 늪에 빠질까 걱정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나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허덕이었을지언정, 침체되거나 방황하지 않았다.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이 슬퍼질 때마다 내가 가던 곳이 있다. 하이파 대학의 정문에서 나오자마자 왼쪽 옆으로 있는 조그만 잔디밭. 나는 그곳에 하염없이 오래 앉아 앉아 오만가지 생각과 감정이 나를 어지럽히게 내버려 두었다. 대답이 안 나오는 질문에 대해서도 한참 생각했다. ('왜 돌아가신 거지? 바로 얼마 전까지 나랑 웃고 이야기하던 분이 그렇게 단 순간에 사라져버렸지? 등) 어떨 때는 울기도 했다. 한참 그렇게 있다가 일어나 옷에 묻은 잔디를 털고 책과 가방을 주서주섬 줒어들 무렵,  나의 마음은 차분해져있었다. 


    할머니와의 우정을 통해서 나는 근본적인, 그리고 긍정적인 변화를 겪었다. 외로운 할머니에게 말동무를 해 드리면서 할머니를 만나기 전에 겪던 향수병과 우울증이 깨끗이 치유되었고, 할머니의 몸과 마음을 만져드리면서 나는 내 무력감의 고통을 극복했다. 또한 할머니께 내가 없어서는 안된다는 책임감이 내 존재의 의미를 확실하게 해 주었다. 나는 좀 더 강해졌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옛날 일을 새롭게 들춰내어 다시 고통하고, 기뻐하고, 의미를 들춰내곤 한다. 나는 두 아이를 낳은 다음에 할머니가 나에게 주신 사랑의 의미를 새로이 깨닫게 되었다. 이전에는 나는 내가 마치 엄마라도 되는 양 음식 시중, 몸 시중을 들면서 할머니를 보살펴드리면서 할머니를 도왔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눈에 보이는 행위로 할머니께 사랑을 표현했다면, 할머니가 나에게 주신 사랑은 좀 더 미묘하고 깊은 것이었다. 당신의 전체를 나에게 다 주셨으니까. 오프라와 아로디가 누누이 이야기하고 놀라워했듯이 평생을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오신 할머니에게는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의 몸을 나에게 선선히 맡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자신의 몸을 나에게 맡겼고, 그렇게 자신을 비움으로써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퍼 부을 수 있게 해 주셨고, 그 과정에서 나는 나 스스로를 발견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할머니가 내가 주는 사랑을 통해 다시 추스르고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아셨을까?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하다. 내가 할머니에게 '아가를 돌봐주는 엄마'와 같았다면 할머니는 나를 좀 더 긍정적이고 밝게 만들어준 엄마였다. 


    할머니와 작별한지 30 년이 되고 아버지 수발을 들면서 사라 할머니와의 옛 경험은 또 다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나의 부모님이 연세가 많아지셔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던 나이가 되셨기에 나는 젊었을 때 할머니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감지하지 못했던 치매와 우울증, 노화에 대한 공포와 고통을 절실히 느끼고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물을 떠와 내 멋대로 할머니께 해드린 목욕은 아버지 수발을 들면서 알게 된 전문 용어, '스폰지 바스'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내가 할머니께 했던 잔소리들 (식욕이 없어도 맛있게 먹어봅시다! 운동, 운동, 운동이 중요해요!) 는 지금 그대로 부모님께 하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나는 아버지께 현재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30 년 전에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수발 예행연습이라도 하듯이. 


    이 에세이를 쓰기 위해서 옛 편지들을 들춰보았는데 그 중에 한 대목이 나의 눈을 끌었다. 마치 현재를 예견하기라도 한 듯이 적고 있었다.


    "엄마, 난 안 지 1 년도 안되지만 할머니를 모든 힘을 다 해 돌봐드리려고 하고 있잖아? 나를 평생 사랑해준 엄마랑 아버지가 아주 늙게 되셨을 때도 당연히 똑같이 할 거야." 


    나는 그게 일종의 자기 실현적 예언이었다고 생각한다. 현재 내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게 30 년 전의 약속을 지키고 있는 것, 아니면, 30 년 전의 꿈이 실현된 것이라는 사실에 뭔가 엄숙해지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하다. 동시에 내 


    또한 나는 나에게 자신의 몸을 선선히 맡기심으로서 내가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신 사라 할머니에게 감사드리듯이 바로 같은 이유에서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수발의 상황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수발을 드는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처럼 타인에게 자기 몸을 맡겨야하는 상황에 이른 분들이시다.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평생 남에게 폐를 끼칠까 조심하며 살았던 단정한 아버지, 자신의 존엄성을 내팽개치는 듯한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가 나에게 자신을 맡겨주시고 내가 돌볼 수 있게 해주신 것, 그리고 우울증을 이겨내 밝은 모습으로 살아내시는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사라 할머니든 아버지든, 그냥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의 마음과 손이 자연스럽게 향했고, 그들은 자신이 처한 힘든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나에게 축복을 주고 행복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보면 참 단순하다. 사라 할머니와 나, 나와 아버지, 우리의 이야기는 살면서 서로 다른 방법으로 돕고 사랑하고 독려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중의 하나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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